세비야를 떠난 버스는 2시간 40분만에 지중해에 접한 안달루시아의 남쪽 알헤시라스 항구에 도착했다.
'알헤시라스'는 우리에게는 아주 낯설게 느껴지는 지명이다.
하여, 다시 아주 쉽게 이야기 하자면 스페인의 남쪽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지중해에 접해있는, 우리의 기억에도 친숙한 지명을 거론하자면 바로 '지브롤터"를 먼저 꺼낼 수가 있겠다.
지중해가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아프리카와 유럽이 가장 가깝게 사이좋게 붙어있는 지역을 우리는 '지브롤터 해협'이라고 한다. 그리이스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단 한번의 칼질로 두 대륙을 분래시켜 놓았다고 전해진다. 근현대사 속에서 지브롤터는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스페인. 영국. 프랑스의 대결과 현대사에 들어서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려는 열강의 침략전쟁 속에서 지브롤터가 아주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의 지중해와 접한 아주 중요한 길목에 바로 지브롤터라는 항구도시가 있다. 지브롤터의 우측으로 아주 가까운 인근에 알헤시라스가 있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인근에 카디스라는 항구가 있다. 이곳에 있는 세곳의 항구가 유럽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해주는 가장 가까운 유럽쪽의 거점 항구들이고, 그 반대편 아프리카에는 탕헤르와 탕헤르 메드와 가까운 인근에 세우타가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주 독특한 유별난 현실적 상황을 고스란히 역사속에 간직하고 있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스페인은 자신들의 영토 한 귀퉁이에 점 하나 찍듯이 놓여있는 지브롤터를 돌려달라고 영국에게 끊임없이 요청하고 있다. 지브롤터는 분명하게 영국령인 영국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열강의 대결 싸움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지브롤터를 영국에게 내주고 말았다. 2차대전 후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침략자인 유럽열강들로 부터 독립하게되는 시점을 기화로 스페인은 지브롤터의 반환을 거듭거듭 요청하고 있으나, 영국은 절대 돌려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다. 그만큼 지중해 제해권이나 아프리카로 향하는 길목으로서 지브롤터의 중요성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는것이다.
지브롤터의 반환을 영국에게 계속적으로 요청하는 스페인을 지켜보면서........ 이번엔 모로코가 스페인령 세우타의 반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모로코 영토속 탕헤르 인근의 항구도시 세우타는 스페인과 모로코 간의 전쟁결과로 스페인이 점령하여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스페인이 영국에게 요구하는 같은 이유로 모로코는 끊임없이 세우타 항구의 반환을 요청하고 있다.
지브롤터의 반환은 요청하면서도 세우타를 내주기는 싫은 스페인의 속내가 마냥 이뻐보이지만은 않는것이 현실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나 국제사회의 관계나........ '내로남불'은 우리 주변만의 이야기는 아니지 싶다.
학창시절 지리 시간에 귀가 닳토록 배운것이 오대양 육대주였다.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극해. 북극해........... 이렇게 다섯개의 바다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바다가 바로 지중해다. 대륙 사이에 끼인 바다라해서 흔히 내해라 부른다.
평균 수심이 1.458미터에 달하고, 최고 수심은 5.092 미터에 이른다. 거기에 총면적은 약297만 제곱킬로미터로 약 9억평에 이른다고 본다.
터키 이스탄불의 앞바다라 할 수 있는 보스포러스해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흑해와 연결되고, 이집트 스웨즈 운하를 통해서는 홍해와 연결된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지중해는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대서양으로 나간다.
지중해는 염분 농도가 유독 진한 맛이 아주 짠 바다로 유명하다. 염분 농도가 짙은 바닷물은 농도가 옅은 바닷물에 비해 깊이 가라앉는다. 그러다보니 ;염분 농도가 옅은 대서양과 흑배의 바닷물이 해류를 따라 지중해로 흘러 들어 온다. 해저로 가라앉은 지중해의 농도 짙은 짠 바닷물은 해저 깊은곳을 통해 거꾸로 대서양과 흑해로 빠져나간다. 이렇게 끊입없이 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1회 순환의 시간이 약 70년이 걸린다는 보고가 있고보니....... 새삼 이런것까지 계측하는 인간의 지혜에 감탄이 절로 터져나올 뿐이다.
뿐만아니라 지중해는 인류 문명사의 보고이자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복합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는 유럽과 아프리카와 소아시아(중동)이라는 세개의 대륙이 서로 연결되어 있을뿐더러, 종교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유대교가 혼재하였고, 문명적으로보자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과 그리이스와 로마 문명이 녹아있다.
그러다보니 일부 학자들은 지중해 문명을 '모자이크식 복합문명'이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는 지중해 문명을 '다양성이 내포된 수평적, 상호적 문명'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가만히 살펴본다면 상당히 모순적인 주장들이다.
14세기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은 로마 정도의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지극히 열악한 야만적인 삶을 살아왔었다. 하지만 이미 이당시 동양에서는 봉건시대에 접어들어 유럽보다도 훨씬 발전된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의 십자군 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이슬람 문명은 의학 지리학 천문학을 비롯한 인간사의 전부분에 있어서 유럽보다 훨씬 진보한 문명인으로서의 삶들을 영위하고 있었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와 종이와 화약이 이미 이때 원활하게 활용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상황을 비교한다면 유럽은 가히 철기시대에 돌입한 반문명인의 삶과 다를바가 없었던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다양한 분야의 자각과 발전이 시작되었고, 특히 산업혁명 시대와 근대화 개혁과정이 도입되면서부터 유럽은 금속도로 성장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이 주도하기 시작한 인류 문명사는 점차 역사 해석의 기본 틀이 유럽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지중해는 복합성과 다양성, 그리고 수평적 상호 관계의 역학을 급속도로 잃어가기 시작했다.
유럽쪽에 인근한 지중해야말로 차별적인, 그리고 우월적인 문명인들의 세계였고, 소아시아(동양)나 아프리카에 인접한 지중해는 뒤떨어진 야만적인 문명으로 취급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차별과 배척이 뒤따랐다.
과거의 좋은점을 되살려 수평적 상호보완적인 인류의 미래가 바람직한것인지, 차별과 배척 뒤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인종차별이 난무하는 인류의 불확실한 미래가 바람직한 것인지는..............
스페인 알헤시라스 항구는 안달루시아 지방을 대표하는 국제항이다.
항구로서도 클 뿐더러, 출입국을 관리하는 청사도 제법 위용을 갖춘듯 크고 넓었다.
그런데 정작 드나드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우리고장 충주호 유람선 선착장 비수기 풍경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다. 국제항구인데도 각종 편의시설이 전혀 눈에 띄질않는디. 우리고장 버스터미널이 한 20배는 훌륭하지 싶다.
새벽에 세비야에서 출발했던 관계로 아침식사를 하지못해 청사 2층의 휴계소까지 올라갔는데도 바르(우리나라 버거킹 정도의 패스트 푸드점)가 달랑 하나 열려있을 뿐이다. 다른 선택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햄버거에 감자 튀김과 생맥주를 시켰는데........ 아뿔싸.
'나 태어나서 이렇게 큰 햄버거는 처음 봤다.'
커피 한잔에 햄버거 하나면 우리 두사람 한끼 식사는 충분하겠지 싶다. 그런데 몰라서 햄버거 두개에 감자 튀김에 생맥주까지 주문했으니.......
그런데 정말로........ 어처구니 없게도........ 맛있다. 내 인생 햄버거라 불러도 충분히 좋을만큼 맛있다.(종당엔 다 먹어 치웠음)
헐..... !!!
하늘은 잔뜩 흐리고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진다.
알헤시라스에서 탕헤르로 가는 페리를 예약했는데, 승선 시간 30분 전에 이동을 위해 전용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20분을 달려 인근의 다른 항구에 내려주는데...... 바로 카디스 항구다. 고로 내실은 카디스에서 탕헤르로 가는 뱃편이라는 야그가 성립된다. 이곳에서 세관업무와 출국 수속을 밟고 마침내 고대하던 모로코행 페리에 올라탄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정확하게 ;페리는 카디스 항구를 떠나 지중해로 접어들었다.
이제 느긋하게 지중해를 음미하면서 페리여행을 즐겨볼까 한다면........... 모두 개뿔뿔...........
페라가 출발하자마자 길게 줄을 서서 페리안에서 모로코 입국 세관업무와 입국심사를 받는다. 탕헤르에 도착해서 수속을 받는것이 아니라 이동중에 선상에서 모로코 입국수속 업무가 진행되는 것이다.
여권에 스템프 도장을 꽝 하고 받은 다음에 파도가 하얗게 포말로 부서져 창문에 사정없이 부딪치는 풍경을 볼려하는데........ 부서지는 파도 너머로 낯선 풍경이 펼져지고 있다. 어느새 어떤 항구도시가 짠 하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탕헤르'란다.
카디스를 떠난지 45분만에........ 입국 수속 겨우 받고 의자에 좀 앉아볼려고 하니 어느새......... 여기가 아프리카란다.
세상에나............
번쩍....... 이탈리아 최남단 메시나 항구에서 시칠리아로 건너갈 때........ 커피 한잔 마시고 나니 시칠리아라고 하던......... 꿈 같지 않고, 꼭 사기 당한것만 같더 꼭 그때 그기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러니 어쩌겠어.
페리에서 내리는 출구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아프리카가 훅 하니 다가왔다.
모로코가 북아프리카의 가장 서쪽 끝에있는 나라이다보니 당연한 일이겠으나, 페리에서 내려 항구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아프리카는 역시 아프리카로구나' 하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다.
일단 항구 입구를 가로막고 서있는 이슬람 사원의 웅장함이 여기가 카톨릭 국가 스페인이 아니라는것을 확실하게 규명해 주었고, 내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절대다수 대부분이 모두 흑인들이라는 점이 확연하게 달라져 보인다.(이곳 항구에서만 유독 흑인이 많았다)
하지만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약간 짬쪼름한 지중해의 염분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은 스페인이나 모로코나 매우 닮아있다.
아프리카 내륙 중부나 남부지역엔 흔히 아프리카 원주민이라 칭하는 흑인(니그로)들이 주로 살고있다. 그렇다고 북아프리카 지역에 흑인이 살고있지 않은것은 아니다. 다만, 북아프리카 지역의 원주민인 베르베르인은 내륙의 흑인(니그로)와는 전혀 다른 아프리카 대륙의 또 하나의 원주민인 것이다.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다. 이들은 흑인이 아니다. 이들은 아랍인. 베두인과 더불어 사하라 사막을 중심에 두고 흩어져 살고있는 함어족의 후예라 불리는 분명한 백인의 후예들이다. 모로코는 바로 아랍족과 베르베르족이 비슷한 비율로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베두인들은 일찍부터 사하라 사막을 끼고 유목생활을 시작했다. 오늘날 까지도 그 전통이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베르베르인들은 지중해 해안을 끼고 농경생활을 영위해오다가 점차 해양무역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7세기 말엽, 소아시아 지역에서 등장한 이슬람교의 내분을 틈타 수니파에게 쫓겨난 시아파의 후예들이 멀리 서쪽으로 달아나다가 이곳 튀니지나 모로코 인근까지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시대에 앞선 문물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쫓겨온 아랍인들은 곧 베르베르인들을 물리치고 이곳에 이슬람 왕조를 세웠다. 초기 모로코 왕국이 성립된 것이다. 이때부터 베르베르인들과 베두인족들에게도 이슬람교가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로코 왕조의 지배하에서 새로운 공동체 생활을 이어나가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들이 번창해 갈수록 사하라 사막을 건너 흑인(니그로)들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아랍족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파되고 또 그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게 된 지중해 인근의 북아프리카 지역들을 GMSGL '마그레브(Maghreb)'라 브르는데, 이것은 '해가 지는 서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마그레브 지역에 해당하는 국가로는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의 나라가 있다.
변화무쌍한 격변의 현대를 살아가기 위하여 이들 네 나라가 수시로 하나의 공동체로 연합하여 국제사회속에서 세력을 과시하기로 합의는 빈번히 하여왔으나, 같은 이슬람 국가들이기는 하다해도 각국의 경제적 현실과 이해관계로 하나로 뭉치기가 매우 요원해 보인다. 4개국 중에서 유일하게 모로코의 경우는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전제왕조이고, 같은 이슬람이라 해도 슬쩍 조금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무척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 사정들을 감안하면서 이곳 마그레브 지역을 통찰해 본다면 건축과 장식은 단연코 아랍양식이 눈길을 끈다. 그런가하면 마그레브 지역 사람들의 생활습관은 오랜 전통의 베르베르인 생활 풍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이들에게 공통점은 당연히 이슬람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종교적 관점일 것이다.
그것이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 지역적 특징이며 그것이 바로 모로코의 모습인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알라신에게 선택된 고귀한 종족'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모로코인들은 자상하고 친절했다.
특히 탕헤르에서 만났던 모로코인들은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았으며 어떻게든 먼저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그런 느낌은 탕에르에서 뿐이었다. 모로코는 온통 '삐기'의 세상이다. 화폐로 친절과 배려에 대한 댓가를 보상받고자 하는 삐끼들이 차고 또 차고 넘쳐난다. 몇번은 유명 여행지다 보니 그저 그려러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치게 되고 짜증스럽게 되고 더하여는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까지 한다. 여행자에게는 불편과 짜증이 되고, 저들에겐 그것들이 하나의 생존 방법으로 정착된지가 이미 오래된 구태인 것있다.
그러다보니 포르투갈 여행이 새삼 그리워질 밖에.........
포르투갈에는 삐끼가 없다. 그네들의 민생법안까지는 모르겠으나 포르투갈 어디에도 여행자들을 귀찮게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삐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지하철 입구나 백화점 입구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도 전혀 없다. 여행지에 노점이나 호객행위를 하는 행상들도 전혀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길거리 노점이 새삼 그리워지기까지 한 여행지가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리스본과 포르투에서 딱 두번 노점상을 보았다. 연기를 피워올리며 군밤을 파는 작은 리어커 노점상이 전부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모로코는 가히 최악이다.
또 한가지는 모로코 사람들에게선 숫자의 개념을 정확하게 전달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탕헤르 항구에서 쉐프샤우엔으로 가기 위하여 버스터미널을 찾아가고자 할 때였다.
사원을 지키는 경찰관에게 길을 물었는데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조금만 가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조금만이 문제였다.
해안 도로를 따라 가도가도 터미널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 젊은이에게 다시 물었다. 역시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있단다. 그래서 되물었다. 여기서 걸어간다면 1KM? 아님 2KM? 넉넉잡아 3KM 쯤 되냐고 물으면 곧바로 가장 짧은 1KM쯤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서 또 걸었다. 그런데 안나온다.
다시 행인을 붙잡고 길을 물어본다. 역시나 조금만 더 가면....... 그래서 이번엔 걸어서 10분? 15분? 아님 20분 쯤 걸리냐고 물어보면..... 또 역시나 가장 짧은 10분이면 된다고 한다. 이것도 친절의 하나일까? 힘내서 잘가라고.........
어찌어찌해서 마침내 탕헤르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아뿔싸......... '그래 여기는 아프리카 였어. 유럽이 아니야. 동남아 보다도 모든면에서 못한 아프리카였어.........'
'후회막급'
사회적 기반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동남아도 열심히 돌아다닌 후였기에........ '아프리카 뭐 별거겠어?'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동남아는 그래도 아프리카에 비하자면 월등한 문명선진국들이었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고....... 그러하기에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아프리카 여행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두배 세배 내지는 다섯배 정도 필요로 한다. 시간이 아주 넉넉해 유유자적 할 수 있는 여행이 아니라면 어느정도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할것 같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적어도 아프리카는 패키지가 편할것 같다.
부랴부랴 서둘러서 지중해를 건너 탕헤르까지 왔는데......... 시간은 점심때가 겨우 넘었을 뿐인데........
탕헤르에서 쉐프샤우엔으로 가는 버스가 없다.
오전 9시쯤 첫차가 지나갔고, 오전 11시쯤 두번째 버스가 한참 전에 떠나갔다. 그런데 다음 버스이자 오늘의 마지막 버스가 밤 9시쯤에나 있단다.
살다가 살다가........ 또 살다가......... 이런 나라는 처음 경험해 본다.
그리고........ 이런 여건과 상황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삐끼를 방불케하는 택시들이 피냄새(버스가 없는 여행자)를 맡고 연실 달려든다.
자유배낭 여행에서 가장 불쾌하고 신물나는 바가지 상혼.
쉐프샤우엔가지 가는 택시비를 놓고 40분이나 실갱이를 벌였다. 결국은 바가지인줄 알면서 처음 부른 가격의 절반에서 타협을 이루어 냈다. 그저 한국에서의 물가에 비하자면 거의 거저이다시피 하다는 점을 스스로 위안 삼으면서...... 절반 정도의 바가지를 기꺼이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
2시간 반을 장담하면서 썩어도 준치라고....... 낡은 벤츠 택시로 쉐프샤우엔까지 내달렸는데....... 거의 3시간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파란만장한 모로코에서의 첫날.........
탕헤르를 출발한 택시는 노면상태가 그리 썩 좋지는 않은 벌판을 향해 달려나갔다. 초원이 나타나고 구릉이 나타나고 가파른 산언덕을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갔다. 높은 바위산 자락에 올려다 붙여놓은듯한 현대적 도시 테투안을 지나면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가 아프리카 맞아? 정말 모로코이야? 여기가?'
지중해 연안이라고는 하지만 모로코나 튀니지와 알제리는 세상에서 제일 큰 사하라 사막이 국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막지역의 나라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들은 전혀 사막의 낌새조차 느껴볼 수 없는 아주 이색적인 아름다운 풍경들이었던 것이다. 굳이 따져든다면 지중해 건너 스페인 중부의 풍경이나 별반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기록 길가에 뜨믄뜨문 나타나는 시골집들은 세월의 풍상을 짐작케 하는 낡은 모습들이었고, 먼지날리는 도로변에 전통복장을 한 수많은 여인네들이 전통빵을 파는 모습이 보이지만,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고 파란 하늘아래 구릉마다 푸른 숲이 빼곡히 들어선 다분히 이채로운 아름다운 모습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산언덕위에 파란 호수는 쪽빛 하늘을 수면에가득 머금고 있고 유난히 하얀 구름이 날개짓을 하듯이 팔랑거리며 스쳐지나간다.
농가 주변으로 호두밭과 올리브 밭과 송글송글 포도송이를 매달은 산비탈 포도밭이 질서정연하게 길게 늘어서 있다.
누가 여기를 사막의 나라 아프리카 모로코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흡사 여기는 코카서스의 조지아나 아르메니아랑 상당이 닮은 모습이다.
3시간여를 달렸을까?
운전기사가 창문 앞쪽으로 높은 바위산을 가리킨다. 리프산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목적지인 쉐프샤우엔에 곧 도착하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면 쉐프샤우엔은 온통 바위산인 리프산맥의 구릉 위에 들어선 도시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급커브의 언덕길을 내려서자 저만치 멀리 바위산 언덕위로 새하얀 집들이 마치 인형처럼 다닥다닥 옹기종기 모여있는 풍경이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파란 골목의 나라 쉐프샤우엔 이다.
이 멀고 먼 오지이다시피한 산꼭대기 작은 마을까지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이제 확인해볼 수 있게된 것이다.
택시는 우리를 쉐프샤우엔의 중심이자 올드시티인 메디나의 우타 엘 함만 광장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왜 불길한 예감은 늘 그리도 정확하게 들어맞는것인지.......... 삐끼들로 인한 고역이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악몽과도 같았다. 불필요한 불합리한 한바탕의 전쟁과도 같았다.
무슨 한편의 좀비영화에 직접 출연하는 느낌이랄까?
사방에서 끝도없이 몰려들었다. 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네 멋대로 남의 배낭과 캐리어를 나꿔채듯이 끌고가기도 한다. 쫓아가서 짐을 회수하면서 거절을 하면 어느새 빈손을 내민다. 어떤 설명도 어떤 양해도 용납되거나 통용 되지 않는다. 오로지 돈이다. 갑자기 비위가 몹시 상해진다.
'모두 물러가. 난 내 스스로 모두 해결할거야. 어떤 도움도 필요없어.'
평소 여간해서 인상을 쓰거나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거의 없는 나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함이 터져나왔다. 챠밍여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왜그래? 여긴 남의나라 여행지잖아? 너무 크게 소리친거 아니야?'
'그렇다 해도 상관없어. 이들을 좀 봐. 그렇게 단호하게 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쫓아다닐거야. 벌써부터 정말 지겹다고....... '
나의 위세와 표정에 눌렸음인지 삐끼들이 하나 둘 떠나고 있었다. 가슴 한편으로 약간 미안한 마음이야 솔직히 들었지만....... 이건 정말로 여행 이전에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산언덕 아래의 현대식 숙소를 찾아볼까도 생각했었지만 매번 언덕을 힘들게 오르내리는것도 그렇고 해서 약간의 불편은 감수하고서라도 쉐프샤우엔 여행의 핵심이랄 수 있는 메디나 근처에 숙소를 얻기로 작정를 했던 상태였다. 그래서 이미 인터넷을 통해 검색했던 나름 괜찮아보였던 숙소를 두세군데 찾아나섰는데......... 초행에 내비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낡은 도시의 좁은 골목길을 찾아헤맨다는 것이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쉐프샤우엔의 모든 호텔과 게스트하우스의 명함을 잔뜩 손에 들고 길을 찾아준다는 삐끼들이 또 나타나 끼어들기 시작했다. 접입가경이었다.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하여 그중 한곳의 숙소를 정하게 되었는데........ 젊고 눈치빠른 매니저는 마음에 들었는데....... 숙소 자체는 최악이었다. 짐을 을 놓고 근처의 다른 숙소를 찾아보아도 상황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별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마도 미얀마 바간여행 이후로 가장 최악의 숙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다시 생각하기 조차 싫어져서 숙소 상태는 생략)
거기다가 밤이 늦어서 같은 숙소 같은 층과 윗층에 중국인 단체여행객이 들이닥쳤다. 밤새 악몽을 꾼것만 같았다.
쉐프샤우엔은 모로코에 대한 나의 열망과 아프리카에 대한 나의 기대를 깡그리 저버리기에 너무도 충분했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 루프탑에 올라가 시백 미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쉐프샤우엔을 둘러보았다.
스잔하게 여러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기대가 너무 컸었음인가?
이제 방금 아프리카를 시작하였기에 따라오는 낯선 이질감일까?
아직 쉐프샤우엔에서 예정했던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니 좀 차분하게 살펴보기로 해야겠다. 저들의 생활과 역사와 현실적 문제들을 이제껏과는 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쉐프샤우엔만의 이질적인 느낌일 수도 있을테니까? 아직 페스도 마라케쉬도 카사블랑카도 사하라 사막도 남아있으니까.......
그렇게 다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싱그러운 쉐프샤우엔의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챠밍여사의 손을 잡고 그 유명한 파란 골목들을 둘러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을 여행하고자 함에는 몇가지 테마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지중해 연안으로 산재해 있는 찬란한 로마시대의 유적들을 신물이 날 정도로 즐겨보고 싶었다. 유럽대륙에 산재해 있는 흔하게 많이 보아왔던 유적들과는 다르게 황량한 사막 모래위에 건설한 로마의 도시들을 돌아보는 시간여행을 간절하게 소망했었다.
그런가하면 로마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심지어 풀 한포기 조차 자라지 못하게 그 위를 소금으로 뒤덮어버린 카르타고 제국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다. 한니발의 발자취를 맨발로 따라 걷고 싶었다.
더하여 로마나 카르타고 이전에....... 지중해 연안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그리이스 시대의 도시와 페니키아 사람들의 발자취도 찾아보고 싶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이슬람 문명과 카톨릭 문명이 혼합된 복합문명의 속편격인 마그레브 문명에 흠뻑 취해보고 싶었다. 어디 그 두개의 문명이 혼합된것 뿐이겠는가? 여기 마그레브 지역에서는 이슬람과 카톨릭 문명 위에다 소아시아 지역의 문명까지 더해져서 혼합 문화의 진수를 맘껏 즐겨볼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그레브 지역 여행은 색깔과 빛깔을 찾아가는 여행이 되기도 한다.
북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색깔은 단연 '오커레드(Ochrered)'다.
오커레드가 주는 뉘앙스는 매우 오묘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달리 비슷하게 형용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굳이 '붉은 황토색'이라고 까지 해야하나?
메디나의 성벽도 골목안의 담장도 모스크도 온통 오커레드 일색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커레드는 깊이를 더해간다.
빨강도 아니고 황토색도 아니고 이따금은 분홍색을 띄기도 하는데, 햇빛을 받으면 찬연이 빛나보이지만 번뜩이지는 않는다. 빛을 반사하지 않고 흡수해 들이는 것이다. 무언가 부드럽고 온화하며 알게 모르게 항상 가까이 있는 편안하고 친숙한 느낌이 절로 생겨난다. 오묘하다 못해 참으로 신비스럽기 까지 한 오커레드의 매력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마그레브 지역이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중에서 단 한곳......... 이곳에서만은 감히 오커레드도 빛을 잃고만다.
코발트빛 불루.
지중해의 검푸른 바다 빛깔에 맑고 투명한 파란 하늘색에 더하여 산자락에 올려진 마을(도시) 전체가 온통 푸른색이다.
'쉐프 샤우엔(Chefchaouen)'.
리프산맥 계곡을 끌어안고 가파른 언덕위에 건설된 쉐프샤우엔은 멀리서 보면 산자락 위로 하얀 지붕들이 빼곡히 들어선, 마치 눈이 소복히 내려앉은 장난감 같은 도시로 보이지만, 막상 도심에 들어서면 하늘에서 땅바닥까지 온통 코발트빛 불루 일색이다. 가히 파란 나라라 불러도 손색이 없어보인다.
마티스나 천경자 화백의 채도 높은 그림속으로 여행을 떠나온 느낌이 들 정도이다.
산자락 아래의 신도시를 거닐다보면 흰색과 오커 불루를 다른 도시들 처럼 만날 수 있지만, 구도심의 메디나 인근은 온통 코발트빛 불루 일색이다. 쉐프샤우엔은 산 위와 아래쪽에서 코발트빛 불루와 오커레드가 누가 더 원색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고 처절하게 경쟁을 벌인다.
쉐프샤우엔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생겨난 도시이다.
하지만 도시라고는 해도 아주아주 작은 도시이다. 그냥 리프 산자락에 유대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싶다.
하지만 지금은 유대인들이 거주하지 않는다.
가이드나 여행 책자에는 모두 스페인에서 쫓겨 난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살았다고는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 역사적 배경과 그러면 지금 그 유대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하여 모로코 여행을 통해서 아주 짧게 '유대인들이 서쪽으로 간 까닭'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유대인들이 통한의 눈물로 영원히 기억하는 전투가 있다.
제 1차 유대전쟁 중에 골란 고원의 중앙이라 할 수 있는 사해가 내려다 보이는 갈릴리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전투를 (마사다 항전)이라고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성지 순례의 유명 코스이기도 한 이곳을 아예 통째로 '마사다'라고 칭하고 '마사다 성지 순례'라고 부른다. 하지만 좀 더 속을 들여다 본다면 '마사다 항전'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그 코스 자체를 마사다라고 칭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싶다. 그 바위벼랑 산의 정식 이름은 '요타파타'이다. 그러니까 실은 '요타파타 순례' 또는 '요타파타 여행'이 정확한 표현이다. '마사다'는 그냥 '요새 혹은 성채'라는 영어의 캐슬 같은 뜻이다.
마사다 전투는 여러 장소 어디에서든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요타파타 성채의 전투는 오직 한곳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암튼, 예수 사후 3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서기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고대 앗시리아에 의해 패망했던것에 이어서 예루살렘 왕국이 두번째 멸망한 것이다. 6만에 이르는 로마 정규군 3개 군단이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고 쳐들어 왔다. 두달 동안의 공성전으로 백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사망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도시를 약탈했으며 철저하게 파괴를 자행했다. 포로가 된 유민 백만명 정도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건장한 남자들 일부는 이집트 지역의 노역장으로 보내졌고 나머지 남성들은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쓸모가 없다고 판명되면 살해했다. 17세 이하의 남녀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군인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두번째 디아스포라(국제적 유민)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 참화에서 벗어난 일부 유대인들이 사해가 내려다 보이는 갈릴리 지방의 바위산에 몰려들었다. 그곳이 바로 요타파타이다.
일찌기 헤로드 대왕이 유사시에 피난처로 깍아지른 바위벼랑위에 성채로 에워싼 궁전을 지었던 곳이다. 가히 인류 역사상 몇손가락 안에꼽히는 난공불락의 천험의 요새로 '방어진지의 끝판왕'이라 불릴 만 했다. 이 삼년치의 식량이 저장되었고, 그 유명한 사해인근의 바위산 아래를 지하로 흐르는 수맥을 찾아내 생활용수 걱정이 없었다. 젤롯튼(유대민족중 열심당원, 무장 혁명당원)을 중심으로 1천명 이상의 유대용사들이 모여들어 로마에 항전했다.
-- 예루살렘 함락
-- 요타파타 요새(마사다) 전경
그러나 상대는 로마군이었다.
거기에다 '카이사르의 군대'라는 별명을 가진, 시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던 로마제국의 최정예 군병인 전설속의 '로마군 제 10군단'이 요타파타 전투에 전격적으로 투입되었다. 로마제국이 치루었던 수많은 전투 중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고있는 '요타파타 공략'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까지 수많은 역사학자 내지 군사전문가들이 이 전투를 '기적이 있다 할 지라도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이라 하는 가공할 전투가 벌어졌고, 로마 제 10군단은 마침내 요타파타를 점령했다.
유대인 생존자는 단 두명이었다. 그중 한명이 혁명군 총사령관이었던 '플로비우스 요세프스'로, 유대인들은 그를 영원한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 찍게된다. 모호한 유대 지식인이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아주 특별하게 선택되었던 유대 민족이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역사에서 멸망했다.
유대 민족 자체가 예루살렘 지역에서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뿔뿔히 흩어졌다. (민족적 유민이라는 디아스포라는 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들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로마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지중해를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유대 종교를 탄압하지 않고 로마의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역으로 옮겨가 새롭게 터전을 잡아야 했다. 뿔뿔히 흩어졌지만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들끼리 뭉쳐 집단 생활을 영위했다. 안전과 신앙을 지켜나가기 위함이었다. 도망쳐 나오느라 가진 기반이 없었던 그들은 타고난 상술을 적극 활용해 무조건적으로 우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중계무역 금융업 보험업 등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4세기 초에 이르러 로마가 기독교(카톨릭)을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였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숨어다닐 정도에서는 벗어났지만 유대 민족에게는 별반 상황이 달라질 것이 없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교리상의 차이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왜냐면 돈이 그곳에 모여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카톨릭)는 유럽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돈은 유대인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거머 쥔 돈 문제로 인하여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는 기간 내내 또 유대인들은 혹독한 시련을 여러번 격게된다.
하나님이라는 같은 뿌리에 근본을 두고 있으면서도 기독교(카톨릭)에 있어서 유대인이라는 존재는 이슬람 교도와 별반 다를게 없는 이교도이자 공적이었던 것이다. 약탈과 탄압과 학살이 거듭 거듭 자행되었다. 어느 정도였느냐?
'게토(Ghetto)'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히틀러의 나찌'를 먼저 떠올린다.
히틀러가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던 당시에 유대인 집단 거주지역을 게토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럼 게토가 20세기에 나찌에 의해서 생겨난 용어일까? 아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시대 각종 문헌에 보면 이미 게토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내용은 또 같은 '유대인 집단 거주지역'을 의미한다. 카톨릭이 지배하던 천년 전의 중세시대에도 이미 유대인들은 가독교인(카톨릭)들에 의해서 특별히 한정된 지역 안에서 거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철망이 쳐진 감옥은 아니었지만, 외부에서 사회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거주지만은 왕이나 영주나 교회(교황)가 허락하는 제한적인 장소에서만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들이 외부에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에도 한계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꺼리는 직업에 유대인들이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찾았다. 사실 돈은 그런 곳에서 더 많이 돌고 있었다. 점차 유대인들은 일개 국가를 넘어서는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경멸하게 된 배경에도 유대인이 독점하다시피 한 막강한 경제력이 단단히 한몫을 했다.
중세 후기에 오스만 제국이 등장하면서 유럽은 혼란기에 빠져든다. 지중해의 경제권이 점차 오스만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점점 줄어드는 지중해 경제권을 유럽의 강대국들이 나누어 쓰게 된 꼴이 된 것이다. 큰 상인들은 혼란이나 분쟁을 커다란 이익을 창출하는 호기로 변환시키는 재주가 있다. 그게 유대인들이었다. 지중해에서 비젼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시점에 포루투갈의 서인도 항로와 스페인의 대서양 항로가 개척되었다.
유대인들은 서유럽으로 몰려가 탐험 비용을 빌려주고,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은 보화와 물자를 사들였다. 그리고 이를 여타의 지역으로 되팔면서 막대한 이득을 얻는다. 재주부리는 곰이 얻는것은 사과 몇 톨과 생선 몇 마리 뿐이지만, 모든 수익은 입장권을 파는 장사꾼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스페인으로 몰려간 유대인들은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스페인 왕조도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라나다에서 이슬람을 몰아낸 이사벨 여왕은 국토회복 운동으로 불린 종교적 전쟁을 끝내자 마자 새로운 칼을 뽐아들었다.
'종교 재판'이라는 이제껏 인류 역사에 없던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이슬람 교도들을 붙잡아다가 '알라신을 버리고 하나님에게로 귀의하라'고 종용 했다. 거절하면 모조리 참수하거나 화형에 처했다. 살아남은 이슬람 교도들은 모두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로 도망 쳤다. 그들이 살 길은 바다 건너 페스로 도망치는 길 뿐이었다.
개신교(종교 혁명의 시대로 루터나 캘빈의 사상을 추구하던 사람들)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이들도 체포해서 종교재판에 넘겼고 대부분 참혹하게 처형시켰다.
유대인을 건드리는데는 신중을 기했다. 막대한 재산이 그들에게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칫 스페인의 경제가 일시적이나마 흔들릴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여왕은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유대교를 버리고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던지, 가진것을 모두 정리해서 스페인 땅을 떠나라고 여왕의 칙령을 발표하면서 그 기간을 한달로 못을 박았다. 타민족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았다는 세상의 평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하지만 1년 이라면 모를까 한달이라는 짧은 기간은 강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사방에서 너도나도 유대인들이 가진 부동산과 기계와 물품들이 시장에 나왔다. 한꺼번에 쏟아진 물건들이 거래가 성사될 리 만무였다. 또한 상황을 눈치 챈 스페인 사람들이 거래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다. 한달의 말미가 가까워지자 유대인들은 유대할 수 있는 금은 보화만 챙겨들고 나머지 부동산 등은 모두 포기한 채 허겁지겁 지중해로 몰려 들 수밖에 없게되었다. 여왕의 잔혹한 성정이 어떻게 될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로 달아난 유대인들은 목숨을 건졌다.
재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남아있게된 유대인들은 모두 종교재판정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은 모두 처참하게 처형되었으며, 유대인들이 손에 들고 가져가지 못한 어마어마한 재산은 고스란히 스페인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손도 안대고 코를 푼 것이다.
쫓겨가는 유대인들이 겨우 가져갈 수 있는것은 극히 적었지만, 이후 스페인은 한동안 적지핞게 경제적 어려움을 격게된다. 유대인들이 떠난 이유로 스페인 경제에 상당한 타격이 발생한 것이다. 반대로 이들이 가져간 유형무형의 재산은 모로코 경제에 커다랗게 기여를 하게된다.
지중해를 건너 온 유대인들은 여러 이슬람 도시의 한구석에 자신들만의 집단 거주지인 (멜라)를 스스로 만들어 생활하게 된다. 게토와는 반대 개념이랄까? 이 멜라에 사는 사람들을 '유대 아랍인' 또는 '유대 스페니쉬(세파르딤)'으로 부르기까지 하게된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왕조들은 유대인들의 종교를 허용했다. 어느 정도의 제약은 있었으나 인두세와 토지세 같은 세금으로 이를 보충했다. 이들의 재산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낯선 아프리카의 환경에 적응하는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쫓겨나온 이슬람 왕조의 보아브빌 왕이 페스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신도시로 따라가지 않은것은 생활환경 때문이었다. 이들은 사막문화에 쉽게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이들은 쫓겨나온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온화한 기후와 풍요로운 물자와 푸른 숲과 흐르는 강물이 그리웠다.
사방으로 사람들을 내보냈다. 좀 더 나은 환경을 찾고자 해서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답이 들려왔다.
내륙 깊숙한 리프 산자락에 스페인 안달루시아와 거의 똑같은 환경을 갖춘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는 이야기였다. 몇몇 유대인들이 먼저 떠났다. 바위산 중턱을 깍고 다듬어서 옹기종기 집을 짓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환경이 안달루시아와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장사나 무역 같은 경제활동은 출장을 통해서 해결하였고, 나머지 편안한 일상을 휴식처럼 취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 바로 쉐프샤우엔 이었다. 포도와 올리브등 여러 과일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소문이 나자 사방에서 더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 들었다. 마침내 작은 도시가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민족만의 오랜 전통대로 일년에 한 두번씩 벽이며 담장을 유대인 특유의 파란색으로 칠했다. 지금의 쉐프샤우엔이 탄생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1948년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되었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시작된 유대민족의 디아스포라가 그후로 2천년 가까이 흐른 즈음에서야(팔레스타인의 깊은 속내는 생략키로) 유대인들이 합법적으로 주권을 가지고 살아갈 터전이 생긴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유대인들이 속속 이스라엘로 몰려든다는 소식이 쉐프샤우엔에 까지 전해졌다.
절대 다수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스라엘 중앙정보부인 모사드가 모로코 정부에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했다.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발생한 팔레스타인 문제로 세계가 또 한번의 새로운 전쟁 광풍에 휩싸이던 혼돈의 시기였다. 도처에서 종교적 갈등과 다툼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모사드의 치밀한 계획과 사전준비속에 모로코의 정부가 많은 배려를 베풀어준 결과로 수만명의 모로코 거주 유대인들이 무사히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쉐프샤우엔은 이제 텅 빈 헛간이나 창고로 전락해 버렸다.
유목 생활에 익숙해있던 베르베르인과 아랍인들이 텅 비어있는 쉐프샤우엔에 둥지를 틀고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유대인처럼 정착민으로 살아가는 재미와 잇점을 깨닫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다시 쉐프샤우엔은 사람들로 가득차 활기찬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다. 골목 어귀에 놓여있던 시나고그(유대교 사당)을 모스크로 개조한 것도 이때 일어난 일이었다.
모로코에서는 물론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예쁘고 아름답다는 작은 마을 같은 도시 쉐프샤우엔이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유럽의 역사에서 유대인 문제는 감추고 싶은 치명적인 치부이다.
그리이스와 로마 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는 서구인(유럽)들은 자유. 평등. 인권 이라는 기본 이념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진보적 선진사상을 가진 백인 우월주의 이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아주 조금만 살짝 들춰서 그들의 속내를 엿보기만 해도 사방에 덕지덕지 '반 유대주의'라는 종교적 망령이 뿌려놓은 핏자국을 너무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En serio ?'
내 두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툭 던지다시피 내뱉은 챠밍여사의 한마디에 나는 그만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엔 쎄리오?'. 굳이 부연해서 설명을 하자면 '리~~~~~~얼~~~리(really) ??????'라고나 할까.
오.마.이.까~앗!!!!!!!!
아침 산책에서 시작해서 점심때가 될때까지 쉐프샤우엔의 파란 골목들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돌아다녔다. 쉐프샤우엔의 메디나, 그러니까 올드 시티는 아주 작은 마을 정도이다보니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굳이 아니었고....... 웬만큼 볼것들은 반나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리프 산자락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도 돌아보고 생오렌지 쥬스도 마시고, 계곡 빨래터에서 현지인들의 생활모습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계곡을 지나 산자락에 외다로 서있는 모스크(이슬람 사원)도 다녀왔다. 쉐프샤우엔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자 뷰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이제 슬슬 점심을 해결하러 나가려던 참이었다.
'우리 다음 여행지가 어디라고 했지?'
'페스. 내일 아침에 일찍 버스를 타고 4시간반을 이동해서 페스로 갈꺼야. 모로코의 옛수도였지........'
'페스에는 뭐가 있어?'
'안달루시아에서 쫓겨온 왕과 아랍인들이 세운 도시야. 한순간에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오다보니 아주아주 복잡한 도시가 되었지. 약 9천개가 넘는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쫓겨온 왕이 수도로 정했으니 알함브라를 본 뜬 작은 왕궁이 있고...... 그 냄새가 지독하다는 가죽 염색공장이 유명하지.'
'그 다음은 어디야?'
'마라캐쉬. 내륙 깊숙히 사하라 사막에 접해있어서 좀 멀지. 페스에서 한 8~9 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해야 해. 기차도 있는데 아주 열악한 환경을 각오해야해. 에어컨 없고 특등실이 천장에 달린 선풍기야.'
'마라캐쉬엔 뭐가 있어?'
'당신이 테마기행에서 보았다고 했던 제마 엘프나 광장이 유명하지. 코브랴 쇼에 빨간 옷을 입은 물장수, 그리고 휘앙찬란한 야시장.'
'그 외에는?'
'어느 도시나 다 비슷하지. 올드시티인 메디나에는 좁고 복잡한 골목이 미로처럼 서로 얽혀있고, 이슬람 사원들이 있을것이고.......'
'그럼 그 다음 여행지는?'
'사하라 사막 투어가 있는데..... 처음부터 당신이 고사했으니까 빼고나면 다시 지중해 연안의 카사블랑카에 들리거나 현 수도인 라바트에 들리는거지. 그리고 다시 탕헤르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건너갈꺼야.'
'나 당신한테 진정으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 뭔 부탁? 그리고 그게 뭔데 그렇게 어려워 해? 말해 봐. 그게 무엇이든 다 들어줄꺼야. 뭔데?'
'실은........ 나........ 이대로 지금 당장........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어............'
'뭐야???????'
우리가 지금 남해나 제주도에 와 있는것도 아닌데......... 설사 제주도라 해도 단 하룻밤에 갑자기 돌아가기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진데........
여기는 아프리카 모로코가 아닌감? 그런데 뜬금없이 갑자기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니..........
'가죽 공장이나 야시장이나 색다른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로코의 도시들은 다 여기처럼 거기서 거기 아닐까? 좁아터지고 복잡하기만 하고, 또 위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너무나 지저분한 기분이 들고 아프리카 특유의 은근한 냄새들도 점점 역겨워지고....... 좋게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해보았지만 생존을 걸고 쫓아다니는 사람들도 우리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고........ 아프리카에 대한 기대가 한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렸어.'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데?'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우리나라 실정과 비교해 여러가지 불편하기도 하고 시설이 낙후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동남아는 완전 할아버지야. 여기 아프리카에 비교하면 난 동남아에서는 아예 우리집처럼 생각할 수 있을것 같애. 이제부터는......... 페낭에서의 수상 가옥이 자꾸 생각나.........'
헐.
수상 가옥 이야기가 나오는걸 보면 이건 최악의 상황이라는 이야기이다.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어. 스페인이 너무너무 좋았어. 여기서 가질 시간들을 모아서 스페인에서 더 알차게 보내고 싶어. 내 감정과 가슴은 지금 온통 스페인에 꽂혀있단 말이야. 여기에서의 일주일 보다는 스페인에서의 이틀이나 삼일과 기꺼이 바꾸겠어. 아니 단 하루라 해도 좋아.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어.'
'알았어. 당신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겠어.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줘봐. 현상황을 파악해 본 후에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점심 식사부터 하면서 방법을 찾아보자?'
'난 지금 밥 생각도 없어. 남겨논 과일이랑 차나 한잔 마실래.'
일단 나는 밖으로 나왔다. 우타 엘 함만 광장으로 갔다. 일단 교통편을 알아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작은 여행사에 들어갔다
다행히 1시간반 후에 탕헤르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 오늘의 막차였다.
호텔로 돌아와 후런트에서 매니저를 찾았다. 체크아웃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비용을 모두 선불로 지불해 놓은 상황이었고, 하루를 일찍 떠나게 되어서 혹시나 하고........ 그냥 모든 손해를 감수하기에는...... 다행이 이 젊은 매니저는 배려심과 융통성이 있는 친구였다. 약간의 수수료를 페널티로 떼어주고 나머지 비용을 거슬러 받았다. 내가 우리가 가진 지금의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을 했고 그의 표정은 충분히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떠나는 우리를 배웅해주면서 광장으로 향하는 계단까지 캐리어를 들어다 주기도 했다.
'그래. 우린 지금부터 스페인으로 돌아갈거야.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 촉박해. 탕헤르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한시간 조금 더 남았어. 서둘러 짐을 다시 꾸리고 광장까지 나가서 택시를 잡아타고 산아래 터미널까지 가는거야.'
그새 챠밍여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번개불에 콩 구워 먹는다고......... 세상에....... 아프리카를 1박2일치기로 다녀 간다니..........
굿바이 쉐프샤우엔.
겨우 비집고 들어갈 정도로 탕헤르행 버스는 만원이었다.
나는 맨 뒷좌석에 겨우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고 챠밍여사는 조금 앞 좌석에 현지인 할머니 옆에 떨어져 앉았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실 싱글벙글이다. 모로코를 서둘러 떠난다는게 그리 좋은것인지, 아님 스페인으로 간다는게 저리도 좋은것인지.......
3시간 후에 우리는 탕헤르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제 우리를 쉐프샤우엔까지 태워다 준 택시 기사를 만났다.
그가 크게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사 그만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가게 생겼다고 설명을 하고, 그의 택시로 탕헤르 항구까지 이동했다.
서서히 주변으로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탕헤르 항구에서 아프리카의 노을을 다 보게되다니........
엎친데 덮친다고........ 거기다가 아뿔싸.........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배편이 딱 하나 남았는데 3시간 후인 밤 11시20분 출발하는 배편 하나 뿐이었다.
어쩐다?
탕헤르에서 1박을 하고 내일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하나?
'No. 좀 힘들고 피곤하다 해도 나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순간이라도 더 스페인에서 머물고 싶어. 아침을 스페인에서 맞이하고 싶어.'
그러니 어쩌겠어? 머슴이 마님 말씀대로 이행해야지.
탕헤르 국제항구는 참으로 열악했다.
번듯한 건물이 있었음에도 대부분 제한구역으로 막아놓고 있었고, 환전소와 화장실만 있는 1층 대합실을 그나마 열어 놓은것이 다행이었다. 출입국 수속은 건물 외부의 천막으로 설치한 공가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천막에 머물렀다. 우리는 썰렁한 대합실에 머무는데....... 무슨 국제 항구에 마트나 카페 하나 없다. 쵸콜럿과 콜라를 파는 자판기가 전부였다. 피로가 몰려오고 배가 몹시 고파진다.
내 여행 이력중에서 이렇게 황당한 상황도 처음이려니와 이렇게 난감하고 속수무책하기도 가히 처음이지 싶다.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마침내 탕헤르를 떠났고 스페인 영토인 카디스 항구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시계는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헐.
이런걸 진짜 여행의 묘미라고 하는것일까?
카디스에 내려서 스페인 재입국 수속을 밟고 다시 버스를 타고 알헤시라스 항구에 도착하니 새벽 한시가 되어간다.
혼자 여행이었다면 혹 알헤시라스 항구 대합실에서 새벽을 기다리기라도 했을 수도 있지만....... 지칠대로 지친 챠밍여사를 생각하면 당장 어디라도 숙소를 구해야만 했다. 항구 인근을 둘러보아도 시간이 시간이었는지라 대부분의 건물에 불이 꺼져있었는데...... 저만치 번듯하게 간판까지 켜져있는 호텔이 한군데 있었다. 척 봐도 요지에 그럴사하게 자리잡고 있는 별이 여러개 붙어있는 호텔이란 감이 들어왔다. 24시간 후런트 서비스가 있는......... 아니나 다를까?
알헤시라스에서 젤 비싼축에 끼는 호텔이다. 좀 주변을 더 돌아볼까 싶었는데 챠밍여사의 눈빛이 영 아니다. 어쩌겠어......... 이번 여행중에 젤 비싼 호텔에 그것도 아주 잠깐 머물 수 밖에....... 비싼 값을 하는 방에 여장을 풀고나니 이젠 피곤도 모두 잊어버리고 무조건 배가 고파온다. 점심때부터 쫘악 굶어온 것이 아니었는가. 무작정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쏘다녀 본다. 새벽 2시에 낯선 이국땅에서 식당을 찾으러 다니는 우리 팔자.........
항구쪽으로 딱 한군데 식당이 문을 열고 있는데........ 우째 분위기가 영락없는 우범지대 분위기..........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이 얼핏 아프리카에서 밀입국한 흑인들뿐이다. 망설이는 챠밍여사 손을 잡아 끌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엔 음식이 없다. 가계문을 닫으려고 청소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이슬람 기념일인 라마단 기간이라서 해질때까지 일절 먹지 못한 사람들이 해가 진 후에나 식사를 하기에 평소보다 늦게까지 가계를 열었다는 이슬람 식당이었다. 내일도 저녁 늦게나 문을 연다고 한다. 참으로 안될라 치면.......해도해도 너무하리만치 가지가지로 나쁜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주인에게 우리의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주문도 메뉴도 상관없이 그저 먹을것을 좀 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남은 음식이라며 내어주는데.........
이슬람식 하랄 음식을 스페인 남부 알헤시라스 항구에서 새벽 2시에 맛을 보게될 줄이야.........
그렇게 챠밍여사가 고대하던 스페인 땅에서 아침이 찾아 왔다.
잠시 새벽 항구의 풍경을 즐기며 산책을 하고....... 호텔 프런트에 특별히 부탁해서 별도로 커피 한잔씩을 얻어마시고.........
나란히 이웃해 붙어있는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으로 걸어간다. 두곳을 모두 오가면서 교통편을 확인한 결과 이번에도 버스를 선택했다.
ㅎㅎ
우리는 이제 론다로 간다.
----- 감사합니다. 다음 여행기는 멋진 론다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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