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은 재미있다.
누가 앞에서 이끌어주거나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하나하나씩 경험하고 느끼고 알아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오가는 비행시간만도 엄청난 만큼 가능하면 오래오래 머물면서 천천히 많이 걸어 다녀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비행기 보다는 기차로, 기차요금이 비행기 못지않게 상당함으로 그럴 때는 버스로(녹색의 Flix Bus 버스는 유럽 전역을 거의 완벽하게 커버해 준다), 최소한의 권역을 나누어 대중교통을 번갈아 이용하는 재미는 정말로 여행 고수들만이 누리는 아주 특별한 특권이라 하겠다. 그런 여행의 끝자락에는 바로 소도시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유명 여행지에서 ‘한 달 살기’ 혹은 ‘일 년 살기’보다는 꾸준히 느린 걸음과 휴식을 번갈아하는 소도시 여행을 나는 적극 추천 드리고 싶다. 내가 그렇게 하다가 우연히 닷새를 머물렀던 몽펠리에(Montpellier)여행은 아마도 내 여행이력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언젠가 여행이란 것을 마쳐야만 할 때가 된다면........ 그 마지막 여행지로 아내랑 손잡고 다시 몽펠리에를 찾아가고 싶다. 간절한 소망이라고 해도 좋겠다. 모든 대중교통이 완전 무료로 바뀌었다니...... 경로 우대증을 놓고 가도 되지 않겠는가?
‘왜 유럽이 그렇게 재미있어? 뭐가 그렇게 좋아?’
‘글쎄???’
참으로 난감해 진다. 그 답이 무엇이라고 딱 부러지게 선 듯 해줄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암튼 무조건 좋아. 너도 해봐. 그러면 차차 알게 될 거야.’라고 얼버무릴 수만은 없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럼 지금부터 내가 들려주고싶은 이야기를 좀 들어볼래? 조금만 들어보면 왜 유럽이 재미있는지 곧 알게 될 거야. 유럽이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를 설명하자면...........’
항공노선을 따라 열 시간을 훌쩍 넘기는 장거리 비행 끝에 비행기가 유럽의 영역에 들어섰다면 어디에서 어디를 향하던 반듯이 새하얀 눈에 덮여있는 광대한 산맥을 타넘고 지나간다. 유럽의 한복판에 우뚝 솟아 서에서 동으로 길고도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실로 엄청나 보이는 샌맥이 있다.
대륙의 서쪽 지중해 가까이에서 시작되어 북쪽으로 뻗은 다음 활 모양을 이루며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유럽의 척추로 불리는 알프스산맥(Alpes)이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독일을 지나 리히텐슈타인. 이탈리아.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동쪽 끝자락에 해당하는 슬로베니아까지 길게 이어져 나간다. 이 장대한 알프스 산맥에서 가장 높은 곳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걸쳐있는 몽블랑(4,808m)이다.
그럼 이참에 유럽이라는 용어는 어떻게 생겼으며, 누가 그렇게 붙인 것이냐?
이런 것 하나 하나를 알아가는 것 자체가 여행의 재미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유럽의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이름에는 그리스 신화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유럽의 재미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고 하겠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도시국가(폴리스)를 건설한 후, 자신들의 생활터전이 너무나 척박했던지라 살아갈 방도를 바다에서 찾았다. 삶의 터전이 바다였고, 바다에 나가서 삶을 개척하다가 해가지면 다시 찾아 돌아올 곳은 바로 자신들의 집이었다. 하여 모든 기점(시작점)은 그리스 반도의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바다에서 바라볼 때 서쪽으로 해가지는 곳을 그들은 에레브(Ereb)라고 불렀는데, 이는 일몰(日沒)을 뜻하는 말로써 유럽(Europe)은 바로 이 에레브에서 파생되었다. ‘그리스의 서쪽에 있는 곳’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해가 뜨는 동쪽(日出)을 아스주(Aszu) 또는 아쿠(Acu)로 불렀는데, 훗날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의 끝까지 말을 달려보면서 아스즈(Aszu)가 변형되어 아시아(Asia)가 되었다. 아시아는 그리스의 동쪽에 해당되는 곳‘인 것이다. '어때? 아주 쉽지?'
비행기는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 고도를 아주 낮게 낮추어 저공으로 비행을 시작한다. 아마도 숨고르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년설이 녹아 사방으로 꾸불꾸불 흘러내려가는 수많은 물줄기들이 인체의 실핏줄처럼 유럽 대륙의 곳곳을 가득 채우며 유유히 흘러가고, 알프스 산자락을 흘러내려오던 침엽수림이 가득한 구릉들이 잦아지면 그때부터는 끝도 없이 푸른 평원들이 펼쳐진다.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밭이 펼쳐지고, 풀을 뜯는 소와 소를 몰고가는 목동들이 비행기 창문을 통해 그대로 보여 질 정도이다.
지금 이 비행기의 종착점이 니스나 마르세유라면 틀림없이 거대한 바위 협곡이 물줄기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베르동 협곡(Gorges du Verdon)의 멋진 장관에 시선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정말로 압권이라 할만하다. 그랜드 캐년과는 전혀 다른 풍광을 선사해주는 베르동 협곡의 압도적 장관에 한참 취했을 즈음이면 이제 비행기는 랜딩을 위한 선회를 서서히 시작한다.
‘할아버지 여기가 어디예요? 완전 멋있어요.’
‘프로방스(Provence)란다. 프랑스란 나라의 남쪽 바닷가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야. 그 바다는 바로 지중해(mediterranean sea) 라고 부른단다.’
‘프로방스?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프로방스는 뭐가 유명해요?’
‘프로방스는 별(星)이 유명하지 않을까 할아버지는 생각한단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Star)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유명한 아주 특별한 곳이 바로 프로방스라고 할 수 있단다.’
‘아이돌 스타도 아니고 밤하늘에 수도 없이 많은 그 별이 유명하다고요? 왜요?’
‘음! 프로방스 하면 대충 세 가지의 별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는데, 별은 이 세상 어디에 가도 무수히 많이 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제든 볼 수 있는 흔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프로방스에는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담긴 별 이야기가 세 개나 있고 우린 이번 여행에서 그 세 개의 별 이야기를 모두 만나 볼 거야. 들어보면 너도 이미 들어서 알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요? 그럼 지금 이야기해 주세요. 할아버지. 이야기 듣고 싶어요.’
호기심 가득한 태리의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이번 여행도 틀림없이 성공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절로 생겨난다.
(지금 써 내려가는 태리와의 남프랑스 여행은 모두 허상이다. 이런 할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이 결국 이런 허구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고스란히 글자로 옮겨 적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나와 아내는 지지난해 프랑스 여행을 했다. 그 여행중에 ‘빛의 채석장’을 보기 위해서 레 보드 프로방스를 찾아갔지만..... 한 겨울이라 마을 전체가 폐쇄되어 결국 전시회를 보지 못한 채 돌아서야만 했다. 언제 또다시 찾아올 수 있을 거라는 다음 기약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빛의 채석장’을 마음속에서 접었다. 그런데 이번 병아리들과의 여행에서 (아르떼 뮤지엄)을 방문하고 나니 그 접었던 마음이 다시 열리고 차마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언제 다시 프로방스를 갈 수 있을지, 그 여행에 우리 병아리들을 동행할 수 있을지, 도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함께 가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곁들여 ‘프로방스’도 ‘빛의 채석장’도, 거기에 더하여 ‘프로방스 역사 이야기’까지 해주고 싶은데 말이다. 해서 결국 이 방법을 택했다. 꿈속에서..... 상상 속에서 태리 손을 꼭 잡고 '프로방스'와 ‘빛의 채석장’을 찾아가 보기로 말이다. 보여주고, 이야기해 주고, 스스로 많은 것을 느끼게끔 이끌어주는 여행을 만들어 보기로 말이다. 언제고 녀석이 좀 더 자라서 이 글을 읽게 된다면....... 프로방스를 여행하고 싶어질 테고, 녀석이 프로방스 여행을 한다면 이런 할아버지의 이야기들을 기억하면서 다니게 될 테니 말이다. 먼 훗날 언젠가....... 태리와 세리의 추억 속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무척 행복할 것 같다.)
'자. 그럼 첫 번째 별 이야기를 만나 볼까? 그것은 바로 알퐁스 도데의 (별)이란다.'
'알퐁스 도데의 별을 기억해야 할까봐요. 다른 별들도 모두 기억하려면요.'
‘아주 먼 옛날에 뤼르봉 산 언덕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는 젊은 목동이 있었단다. 할아버지 생각엔 그곳이 지금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레 보드 프로방스(Les Baux-de-Provence)의 언덕너머에 있는 인근 마을인 생 레미 드 프로방스(Saint-Rémy-de-Provence) 가 아닐까 생각한단다. 알프스 산맥의 남쪽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는 뤼르봉 산을 올려다보면서 그작가인 알퐁스 도데가 풍경을 묘사한 것을 가만히 살펴볼 때 아마도 생 레미 근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이야기의 어디에서도 목동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아, 다만 그 목동이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아가씨의 이름이 스테파네트라는 것은 적혀있어서 알 수 있지. 그럼 이제부터는 먼저 그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누구인지와 목동과는 어떤 관계인지가 가장 궁금하겠지? 그러자면 일단 뤼르봉 산이 올려다보이는 깊은 산골짜기로 찾아가야만 해. 태리야! 준비됐니?'
프로방스의 뤼르봉 산자락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 있었다.
해마다 긴 겨울이 지나면 그는 양떼를 몰고 풀을 찾아 산자락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늦가을이 되어 양떼를 몰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올 때까지 몇 주일씩 사람 구경조차 하지 못한 채 사냥개 라비르와 함께 산속에서 혼자 살아가야만 했다.
두 주일에 한 번씩 주인집 할아범이나 나무꾼이 목동이 먹고 살아갈 식량을 싣고 잠시 찾아오는 것이 다른 사람과의 유일한 만남이자 마을 소식을 전해 듣는 소통의 시간이었다.
그 짧은 만남을 통해 목동이 가장 궁금해 하는 마을 소식은 다름 아닌 주인집의 외동딸 스테파네트 아가씨에 대한 소식이었다.
아가씨가 왜?
산속에 갇혀 살다시피 하는 보잘 것 없는 목동이 왜 주인집 아가씨에게 궁금한 것이 있느냐고 그때마다 되물어왔지만........ 딱히 뭐라고 답변할 수는 없어도 그는 항상 아가씨에 대한 모든 것이 마냥 궁금하기만 했다.
도대체 왜냐고?
그냥...... 목동이니까. 그러고 이젠 어엿한 청년이니까.
이제껏 살아오면서 보아왔던 여자 중에서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가장 아름다웠으니까. 목동이니까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궁금함을 가지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
그나저나 왜 아직 오지 않는 것이지? 오늘은 좀 늦네?
일요일 예배 시간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저 멀리 산골짜기 아래서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주에 한 번씩 주인집 노새에 식량을 싣고 할아범이 찾아오는 때가 지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늘 식량을 내려놓고 마을의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 할아범이 돌아내려가려고 하면 그때마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왔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참이나 더 지나고 나서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노새의 방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할아범.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요? 이렇게 물어보면서 마차로 다가가던 목동은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마차를 몰고 힘겹게 올라온 사람이 바로 스테파네트 아가씨였던 것이다.
오!!! 세상에나. 아가씨가 여기까지........
할아버지가 심하게 병이 나셨고 나무꾼 아저씨는 멀리 출타하셨고 마을에 잔치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몰려가서 다녀갈 사람이 마땅치가 않았어. 내일이면 할아범이 올 수가 있다고 하셨지만 혹시 식량이 떨어졌거나 마냥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안 되겠다 싶어서 나라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섰는데 그만........ 마차를 몰아 본 적이 거의 없어서.......
Oh my God!!!!!!!!!!!!!!!!!!!!!!!!!!!!!!!!!!!!!!
그렇다고 아가씨가 여기까지 직접.......... 내일이고 모레고 기다릴 수 있었는데..........
그나저나 지금 이 세상에서 아가씨를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헐!!!!!!
목동은 이 어색함을 떨어내기 위하여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식량을 내렸다. 아가씨도 역시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목동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가씨가 이곳까지 너무 늦게 올라 온 것이다. 마을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어둠이 내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서둘러 내려가기에도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결국 마당에 모닥불을 피웠다.
꿈속에서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 아가씨와 단 둘이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될 줄이야 말이다.
집이 아니라 하늘이 그대로 올려다 보이는 노지에서 밤을 보내본 사람들만이 아는 아주 특별한 느낌이 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하늘에는 고독과 적막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낮은 살아있는 생명들의 시간이지만, 밤은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미지의 생명들이 살아 움직이는 또 다른 신비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까지 목동은 수도 없이 많은 밤을 그런 시간 속에서 혼자 감상해왔었지만 지금은 아가씨와 단둘이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목동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토록 유난히 깊고 푸른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더욱 깊고 맑은 소리를 내며 연못에서는 작은 불꽃들이 춤을 추고 나무들은 더욱 신선한 공기를 내뿜는다. 그야말로 알프스 산의 모든 요정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뛰어다니고 춤을 추며 낮에는 들리지 않던 작은 소리까지도 생생하게 들려오지 않은가.
그때,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아름다운 유성(流星) 하나가 방금 소리가 난 쪽으로 흘러갔다. 마치 저쪽 산골짝기의 소리가 유성을 이끌고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저게 뭐지?
오랜 침묵이 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것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이랍니다. 먼 하늘을 날아와서 마침내 천국에 닿았네요.
그날 밤, 우리 주위를 돌고 있는 별들은 순한 양 떼처럼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나는 밤의 성스러운 비호를 받으며 어디까지나 순결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수많은 별 중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었노라고. 그리고 그 별은 지금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아 고이 잠들어 있노라고 목동은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 까지가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별>이란다. 어때? 아름답지 않니?’
‘그럼 아가씨는 언제 어떻게 돌아갔어요?’
‘언제? 글쎄...... 아침에 해가 뜨고 나서 내려가지 않았을까? 그게 궁금해?’
‘왜 있잖아요? 선녀와 나무꾼처럼........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다 어쨌다.......... 전체적으로는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결론을 내리자면 좀....... 왜 그런 것 있잖아요?’
‘태리야. 너 요즘보면 사춘기에 접어든 것이 사실인 모양이야. 이런 이야기 들으면 괜히 어색해지고 속으로 남몰래 가슴이 쿵쾅거리고..........’
‘아닌데요? 전혀 쿵쾅거리지 않거든요? 물론 성장통이 찾아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고요. 그건 누구나 다 찾아오는 거라면서요? 그런데 지금 이것하고는 달라요.’
‘얼굴에 성장통이라고 써 있는데?’
‘이건 성장통이 아니라니까요? 할아버지. 그럼 두 번째 별 이야기는 뭐예요?’
‘두 번째 별? 그건 <십자군의 별> 이라고 할아버지가 이름을 붙였는데, 지금 알퐁스 도데의 <별>을 만나 본 생 레미(Saint-Rémy-de-Provence)에서 조금 떨어진 산골짜기에 무스띠에 생트 마리(Moustiers-Sainte-Marie) 라는 아주 예쁜 마을이 있단다. 이 마을의 골짜기에 은색별이 하나 매달려 있는데 이 별의 이름을 할아버지가 (십자군 별)이라고 붙였단다. 두 번째 이야기는 바로 그 (십자군 별)에 대한 아주 짧은 이야기야.’
‘그럼 지금 해 주세요. 이번에도 또 성장통 의심받는 이상한 남자 여자 이야기는 아니죠?’
‘지금으로부터 약 1천 년 전인 중세시대의 무스띠에 생트 마리(Moustiers-Sainte-Marie)에 한 청년 군인이 살고 있었단다. 아마도 그의 이름은 장(Jean) 이었거나 시몽(Simon)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단다.’
‘그럼 그 사람 이름이 진짜로는 누구인지 모른다는 이야기네요? 그런데 왜 장이나 시몽인가요?’
‘일단 청년 군인이 귀족은 아니었을테니까 보통의 일반 평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흔한 이름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떠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란다.’
‘이름에도 귀족과 평민이 따로 있어요?’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몇 몇 이름들이 아주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면...... 아무에게나 그냥 아무 이름을 줄 수는 없지 않았을까? 바르보(Barbeau)는 ‘어부’란 뜻을 가졌으니 어부의 아들에게만 붙일 수 있고, 바르텔레미(Barthélémy)는 ‘농부’란 뜻이니 당연히 농부의 아들에게만 붙였을 거야. ‘목동’을 가리키는 베르제(Berger)나 ‘빵 굽는 제빵사’를 가리키는 불랑제(Boulanger)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다른 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 이름을 붙여주면 좀 이상하지 않겠니? ‘존경할만한’이나 ‘작위를 수여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바스티앙(Bastien) 이나, ‘왕족’을 가리키는 에티엔(Étienne)과 ‘백성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이름인 티에리(Thierry), 그리고 ‘왕관’을 가리키는 스테판(Stéphane)이란 이름을 일반 백성에게 붙이기는 좀 그렇지 않겠니? 반대로 ‘심부름 하는 시종’을 가리키는 세르쥬(Serge)라는 이름을 귀족에게 붙이는 것도 좀 아닐 것 같아. 그렇다보니 아마도....... 그저 보통의 평범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지 않았을까 싶어. 그러다보니 많은 이름들 중에서도 장(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이나 시몽(꿈을 이룬 사람), 폴(겸손한 사람) 등의 이름이 널리 쓰였던 이유일거야. 여자의 이름에서 가장 돋보이는 이름으로는 에스텔(Estelle)을 꼽겠는데 ‘별’을 뜻한단다. 할아버지가 태리에게 유럽식 이름을 붙여준다면 에스텔을 붙여주겠어. 마음에 들지 모르지만 말이야.’
‘에스텔?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이름이네요. 그럼 알퐁스 도데의 알퐁스는 무슨 의미예요?’
‘알퐁스(Alphonse)는 용감하고 고귀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란다. 이름으로 보아 귀족 집안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작가에게 잘 아울리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네요. 그럼 장(Jean)이었던 시몽(Simon)이었던, 그 청년 군인과 별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예요?’
‘장은 남프랑스 무스띠에 생트 마리(Moustiers-Sainte-Marie)에서 집안 대대로 목동을 하며 내려오는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단다. 그 당시 프랑스왕국은 필리프 2세( Philippe II)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필리프 2세 왕이 십자군 전쟁에 직접 참여하겠다고 결정하면서 원정군을 징집하게 되었고, 장이 그 십자군 원정대에 뽑혀 나가게 된 것이었지.’
‘십자군 전쟁(Expeditio Sacra)이 뭐예요?’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모두 예루살렘(Jerusalem) 때문이었단다. 예루살렘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대인(유대교)들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성스러운 땅이라고 여기며 터전을 이루고 살아오고 있었던 성지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면서 탄생한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의 성지이기도 했지. 그런가 하면 한참 시간이 지난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가 죽을 때 예루살렘에서 부활 승천하였다고 해서 이슬람교 에게도 절대 성지로 추앙받게 되었단다. 다시 말하자면 세 개의 종교가 서로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성지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란다.’
‘셋이 다 하나님을 믿는 종교라면서요? 그럼 모두가 가족 아닌가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아주 큰 어마어마한 대가족이요?’
‘아주 크게 보자면 모두 맞는 말이고 또 그렇게 사이좋은 가족처럼 살아야 하겠지만....... 사실은 처음 시작 때부터 앙숙이었고 어찌해 볼 수 없는 원수지간으로 출발을 했단다.’
‘왜요? 같이 사이좋게 살면 되잖아요? 하나님이 서로 싸우라고 시키지는 않았을것 아니예요?’
‘글쎄다. 모두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한다면 너의 말처럼 서로 도우면서 함께 살았어야 하겠지만....... 아마도, 하나님이 지신들을 특별히 아끼고 선택하시는 기준이 달랐다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서열이나 계급이 있다고 생각했나봐? 그 서열이나 계급은 다시 어떤 특별한 혜택이나 권한이 허락된다고 생각했고...... 거기에서 다툼이 생기고 파벌이 생기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단다. 거기에 더하여 각 종파의 우두머리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지키기 위하여 상대를 더욱 적대시하게 만들고 뺏고 빼앗기는 혼란의 전쟁터로 끌고 들어 간 것이겠지. 그리스도교는 사랑을 최고 덕목으로 삼았고, 이슬람교는 평화를 으뜸으로 외쳤지만, 각 종파의 지도자들은 사랑이나 평화가 아니라 전쟁과 폭력을 통해 빼앗고 약탈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들이 벌인 그 모든 악행들조차 모두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핑계를 둘러댄 것이지. 하나님의 뜻대로 남의 땅에 쳐들어가 살인을 하고 약탈을 하고 방화를 하면서 빼앗은 금은보화는 몰래 자신들이 차지하면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온 세상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지. (교회와 교황은 그런 거룩한 하나님을 대신하는 권위를 물려받은 대리자)라고 또 거룩한 사기를 친 것이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황을 (성자의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지적했던 것이지. 그럼 우리도 이제 프랑스 청년 군인 장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나가 볼까?’
‘예루살렘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십자군 전쟁이 뭐예요.’
‘헐!!!!!! 태리와 할아버지의 여행은 아무래도 한참 길어질 것 같구나. 예루살렘과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까지 모두 이야기를 하자면......... 그러자면 일단 아주 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야만 하는데........’
태.리.야.할.아.버.지.손.잡.고.시.간.여.행.을.떠.나.볼.까?
모든 이야기와 사건은 모두 이 분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보다 분명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 분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이 분의 탄생에서 시작되었고......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긍정적인 해명보다는, 아마도 영원히 미해결인 미궁상태로 그저 한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슬픈 예감이 보다 진실일 것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그럴싸한 문구는 어디까지나 고사성어 사전에나 올라있는 이야기일 뿐이고, 적어도 기독교 역사 속에서의 결자해지는 ‘영원한 침묵속의 수수방관’ 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나을 것 만 같다. 무슨 놈의 침묵이 2천년을 넘기도록 무대응 무소식이란 말인가? 이것을 까놓고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무책임’ 이라고 감히 나는 해야겠다.
말이 그렇지 2천년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다시 구세주를 세상에 내려 보내 (예루살렘 사태)로 대변되는 현실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나서신다 해도....... 그 해결은 결국 영원히 요원한 상태로 또 다시 미궁 속에 빠질 분일 것이다. 각 종파 내지는 종교 지도자들이 약아 질대로 약아져서 조금만 서툴다 싶으면 ‘구세주 스스로 구세주임을 입증하라. 입증하라. 입증하라.’ 내지는 ‘계약서와 신분증을 제시하라. 제시하라. 제시하라.’에 더하여 <우주 창조>와 같은 ‘기적을 행해 보여라. 보여라. 보여라.’ 등등 연좌데모를 벌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흙으로 만들어 입김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들었다’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 ‘온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등등은 이미 완전한 날조라는 것이 백일하에 들통 나지 않았던가?
지금의 현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타임머신) 과거속의 십자가 부활사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시험하려 드는 시대인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신께서 완전 쫄아서(?) 다시 지상에 내려올 꿈도 못 꾸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라는 풍문이 나돌고 있을 지경인 것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시간여행 만은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목숨을 걸고 가로막을 것이 뻔해 보인다. (하늘왕국)을 열심히 팔아서 (자신들만을 위한 지상왕국)을 세우고 거룩한 종교 간판을 내걸고 꾸준히 엄청난 수익을 남기는 장사를 해왔었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면......... 지상왕국이 폭망하게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지상 최고의 직업을 잃고 길바닥에 나앉게 생기면 장차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튼 모든 사건의 시작은 바로 저 분 때문에 벌어졌다.
그것이 팩트(Fact)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소재로 한 미술작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기독교 영향권의 화가치고 (십자가 처형)(수태고지)(아기예수 탄생)(예수의 세례) 등을 그려보지 않은 화가가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화가라는 직업을 택했다면 무조건 일단 그려야만 했을 소재로 여겨진다. 그 많은 작품 중에서 내가 선뜻 (십자가 처형사건)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당당하게 꺼내들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다. 정말로 소중하고 위대한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이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에다가 겐트의 제단화(Ghent Altarpiece)를 보탠다면......... 아마도 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합쳐서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어떤 미술작품을 폄하하거나 가치를 격하시키려는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내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 결과로 그런 선택을 결정해야만 하는 경우가 혹여 생긴다면, 적어도 나는 제단화 두 작품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것이라는 내 방식의 표현일 뿐인 것이다.
일전에 글을 올리다 만 <베벡의 벅스처럼 카페에 걸어두고 싶은 그림 BEST 5>에서 넘버 1에 올라있는 그림이 바로 (겐트의 제단화)이다.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젠하임 제단화는 BEST 5 에는 넣지 않았다. 중복되는 기분이 들어서였을 뿐이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최애 작품 최상부에 들어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못이 박혀 고통 속에 뒤틀어지는 손가락 마디마디의 떨림과 핏줄의 울부짖음이 느껴지고, 이미 많은 피를 흘려 점차 감각마저도 상실해 쪼그라드는 발가락 모습과 모진 매질로 드러난 온갖 상처와 시들어가는 피부색, 가시면류관 아래로 고통의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참혹한 표정하며, 십자가의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고스란히 보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해 보여주는 듯하다. 이 그림앞에서면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만큼 엄숙함에 젖어들게 된다. 그림속의 예수를 통해 그가 대속하신 우리 인간들의 죄가 어떤 것인지, 또 그 죄악의 크기와 무게가 얼마쯤인지에 대한 착잡한 심정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느껴진다.
왼쪽으로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성모 마리아와 사도요한이 그려져 있고,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오른편으로는 세례자 요한이 성경을 펴들고 오른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데, 그가 펼친 성경에는 요한복음 1장 29절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는 말씀을 가리킨다.
16세기 초엽, 독일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ünewald)가 그린 이젠하임 제단화(Isenheim Altarpiece)다. 그뤼네발트는 이젠하임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수도원의 제단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 받았는데,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아홉 가지의 장면을 소재로 제단화를 그렸다. 이 아홉 개의 목판화 중에서 한 복판에 위치한 그림이 바로 위에 게재한 ‘십자가 처형(Crucifixion)’으로 1515년에 완성되었다.
학자에 따라서 그뤼네발트의 미술을 르네상스 미술 초기에 넣기도 하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르네상스 보다는 고딕 미술의 가장 후반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르네상스 보다는 그 새로운 시대의 개척자에 해당하는 폴랑드르 화파의 반 아이크의 화풍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학자에 따르자면 반 아이크 형제 조차도 르네상스 미술에 포함시키기도 하니....... 그런 광범위한 표현에 따르자면 몽땅 르네상스가 미술이 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반 아이크 회화를 이탈리아 피렌체 중심의 르네상스 미술에 강제로 끌어 담는 것은 실로 가당찮은 횡포라고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반 아이크 형제는 폴랑드르 회화의 중심이고, 한참 시간이 흘러 르네상스 미술이 전성기를 이룰 즈음에는 굳이 르네상스와 폴랑드르 회화의 구별이 어려워졌다고 할 수는 있겠다. 그렇게 뒤섞이기 직전의 마지막 폴랑드르 회화의 맥이자 줄기가 바로 그뤼네발트였고, 거기까지가 고딕양식 미술이 아니었을까 하고 이해하고 있다.
당시 흑사병이 온 유럽을 휩쓸며 무수한 생명을 빼앗아갔고 사람들은 그것이 신이 내린 재앙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시기에, 수도원으로 몰려간 사람들이 회개를 외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때, 이 제단화를 통하여 변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치유의 희망을 가지게끔 만들기 위하여 수도원이 그뤼네발트에게 제단화를 주문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에서 치유와 위로를 얻고자 프랑스 콜마르운터린덴 미술관(Unterlinden)으로 몰려가고 있다. 아주 특별한 그림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도, 이 그림을 주문받은 그뤼네발트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은 1백년을 앞서 살다 떠나간 반 아이크 형제(Van Eyck)가 그린 겐트의 제단화(Ghent Altarpiece)인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비슷한 당시의 시대적인 목적으로 형인 휴베르트(Hubert Van Eyck)가 겐트시의 바프스 성당 제단화를 주문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뜻밖의 병을 얻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하여 부득이 동생 얀(Jan Van Eyck )이 물려받아 오랜 시간을 들여 마침내 제단화를 완성시켰다. 이 그림은 일대 혁명을 몰고 왔다. 수없이 많은 화제와 사건과 기적들이 벌어졌다.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책이 한 권 완성되고도 남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한, 머지않아 (이젠하임 제단화)와 (겐트의 제단화)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음 이야기로 이어나가도록 해야 하겠다. 지금은 <예루살렘>과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그림들의 배경에는 모두 성지 예루살렘(Jerusalem)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BC 04년 경 예루살렘 왕국의 땅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탄생하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그 시기를 AD 00년 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역사와 고고학계에 입장에서는 기원 전 4년 경이라고 판정을 내렸다.)
오늘도 평화로워야 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절대 성지인 예루살렘(Jerusalem). 하지만.......
절대전능(全知全能 / Omniscient and Omnipotent)의 하나님이시라면 2천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뻔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잘 알고 계셨을 것임에도 굳이 아기 예수를 그때 그곳에 내려 보내셔야만 했을까? 어떻게 그 결과를 모르셨을 수 있단 말인가.
특히나, 개신교의 목회자들은 온갖 이유를 대면서 그것에 어떤 의미와 뜻을 부여하려고 기를 쓰고 사력을 다해 방어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핑계다. 하나님의 실패이자 전지전능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사랑과 평화를 가르쳐 놓고는 증오와 불화와 나아가 약탈과 살인까지 망설임 없이 자행하게끔 부추기기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마치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놀이터인양 이래저래 흔들고 집어던지다가 무책임하게 돌아앉아 무관심으로 2천년을 방관해오고 계시니 말이다. 실로 거룩하지 못함의 끝판 왕이 아니겠는가?
그 본보기가 바로 이 순간의 예루살렘(Jerusalem) 모습이다.
지금 예루살렘의 어디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숨결이 느껴지는가? 인간 생명의 찬탈과 집단학살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과 평화인가? 저들에게 지금 ‘구원의 약속’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1세기 판 홀로코스트가(The Holocaust)가 지금 버젓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누가 있어 집단학살을 막고 인간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한 가지 가장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사태의 시작은 분명 하나님이 저지른 것인데, 그 분에게선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낌새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치매로 먼 우주 저편의 요양원에서 기절해 있으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구약 성경의 그 분이라면 절대로 저러시면 안 되는데 말이다. 내 말이 틀렸을까?
나는 궁금하다.
신(神)이 가짜인지, 아니면 이제 신과 인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인지가 말이다.
그럼, 그 오랜 세월동안 신(神)을 팔아가며 연명해 온 여러 종파의 지도자들, 그러니까 자칭 목자((牧者)들은 모두 사기꾼이란 말인가?
로마시대의 예루살렘은 언덕위에 성벽에 둘러싸인 요새 도시였다. 비록 여러 차례 함락은 되었지만,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제국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면 나름 결코 만만하지 않은 난공불락의 최첨단으로 요새화된 성채도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지금에야 예루살렘의 상당부분이 성채가 있는 언덕 아래에 새로운 신도시로 건설되었지만, 그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다. 수 천년동안 예루살렘의 전부는 언덕 위의 작은 성채가 전부였다. 지금 우리가 예루살렘의 올드 시티라고 부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올두 시티의 면적은 0.92 제곱키로 미터........ 그러니까 (가로 1km x 세로 1km)에 이르는 아주 작은 도시로, 흡사 우리나라로 치자면 시골 면 단위의 마을 정도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물론 요새화된 성채로 둘러친 성채의 길이가 4km 정도라고 하면 중세시대로서는 결코 작은 성이 아니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 작은 성채 하나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3대 종교의 절대 성지가 되었던 것이다. 각 종교의 시작과 후에 벌어지는 이해관계는 모두 제각각을 넘어 철천지 원수처럼 대립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작은 예루살렘 영역 안에 성전의 영역(중립지역)을 제외하고 네 개의 종파가 자치권을 행사하는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유대 지역과 기독교 지역과 이슬람교 지역과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지역으로 나뉜다.
고대에 유대인들의 솔로론 성전이 위치했던 신성한 지역에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죽어 승천하였다고 해서 그 위에 이슬람 사원인 알아크사 모스크(황금돔 사원)을 세웠으며, 먼 과거에 이 지역은 공동의 구역이긴 하나 이슬람이 관리를 하며 유대인들은 들어갈 수 없다고 약속되어져 있었다. 그런데 현 정부인 네타냐후가 군대를 이끌고 사람들을 살상하면서 알아크사 모스크를 침범하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분쟁의 도화선을 만들기도 했다.
이제 유대 강경주의자들은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유대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알아크사 모스크를 헐어내 세 번째 솔로몬 성전을 건설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그야말로 뵈는 게 없고 양심과 상식과 정의가 없는 파렴치한 모습들이다. 실로 가관이라 하겠다.
본래 유대 땅이라는 것은 없었다, 팔레스타인 땅이 있었을 뿐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속한 한 부족이 유대인이었을 뿐이다. 월세로 남의 집에 세 들어간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핑계로 그 땅이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에게 지정해서 내려 준 자신들의 영토라면서 구약성경을 등기부 등본이라고 내놓고 행패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게 유대인들이 이야기하는 하늘의 법률일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는 세속의 약속된 법률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런 보편화된 법률을 깡그리 무시하고 막가파식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를 미국과 영국과 일부 서방세계가 파렴치한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서 그런 유대인(이스라엘)을 묵인 내지는 막후에서 지원하고 있는 막장 드라마가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동사태(팔레스타인 분재)의 핵심인 것이다.
그 막장 드라마의 전모는 너무나 길고 파란만장하다. 그래서 한 번에 다 다룰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이러다 혹........ 살아생전에 나는 이스라엘 여행을 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을 어느 순간부터 가지게 된 것도 솔직히 사실이다.
아마도 (이스라엘) (미국) (중국)은 나의 방문을 반기지 않을 것만 같다.
아무리 그렇기로........ 나는 할 말은 해야만 하겠다. 내가 무슨 큰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닐 터이니......... 아예 사전 박대는 감수하겠는데...... 공항에서 입국 심사에 걸려 돌아와야 한다면....... 헐!!!! 그냥 유럽에서 로마 역사와 르네상스 미술 여행이나 하며 살아야 하겠다. 이제부터라도 좀 부드럽게 표현들을 하면........ 좀 정상참작을 해서 받아들여 주려나?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다녀오거나 기독교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가 예루살렘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던 사람들에게서 자주 받아보는 질문이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거대 3대 종교가 들어서 있는 예루살렘에 뜬금없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지역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그런 거대 종파가 또 있었느냐? 도대체 아르메니아가 어디에 붙어있는 뭐하던 나라냐?’ 등의 질문이 쏟아져 나온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럴만하기도 하겠다.
개중엔 솔직히 아르메니아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또 들어 보기는 했겠으나 어디쯤에 붙어있는 나라인지 아는 사람 또한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유럽의 시선으로 보자면 약간 복잡할 터이니 아시아적 시선으로 보자면....... 아르메니아는 서남아시아 이란의 북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접국은 사이좋은 조지아(같은 기독교 국가)와 사이가 나쁜 아제르바이젠(이슬람 국가)와 더불어 흔히 ‘코카서스 3국’으로 불린다. 아시아 시선으로는 ‘유럽의 시작’이 되는 지역이다. 이들 코카서스 3국을 지나면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폴란드 등 본격적인 유럽이 등장한다. 남서쪽으로는 터키와 맞추져 있는데....... 수 천 년에 걸쳐 통한의 역사를 터키와 아르메니아 사이에서 써 내려오고 있다. 그야말로 원수 중에서도 철천지원수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역사속에서 아르메니아는 상당히 중요하다.
지중해를 통해 세계를 정복한 최고 전성기의 로마제국에게도 아직 두려운 존재가 하나 남아 있었던 것이다. 동방 아시아 지역에 페르시아 제국의 세력을 그대로 물려받아 확장시킨 파르티아 제국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시저 시대에 이미 크라수스가 한 차례 동방원정을 감행하다가 파르티아에게 완전 몰살당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정복자 로마도 차마 파르티아를 넘볼 엄두를 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오히려 파르티아가 로마로 쳐들어 올까봐 여러 황제들이 실제로 소아시아 지역에 주둔하면서 방어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로마에겐 카르타고 못지않은 최고 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완충지역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아르메니아였다. 그런 이류로 로마는 아르메니아를 점령하지 않았다. 파르티아도 아르메니아를 점령하지 않았다. 로마와 파르티아가 직접 국경을 맞댄다면....... 의도치 않게 발생하는 여러 사건이나 사태 때마다 전면적인 제국간의 전쟁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여 중간에 아르메니아를 끼워 놓고 서로 으르렁대는 간접 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한 때는 아르메니아도 지금 자신의 영토보다 서너 배나 큰 강성한 왕국이었으나, 로마에 치이고, 페르시아 세력권에도 치이고, 훗날엔 오스만(터키)에게 당해도 너무 엄청나게 당해서 완전히 쪼그라진 상태로 샌드위치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르메니아가 당당하게 성지 예루살렘의 4/1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역사는......... (노아의 방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해야만 하니까 그 오랜 전통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 전승대로 따르자면........ 인류의 첫 번째 시작은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였다고 하겠다. 하지만 인류의 타락과 방종으로 끝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멸망시켜 버렸다. 유일하게 선한 인간으로 선택받은 노아의 일가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진정한 시작은 노아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인류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과연 그게 모두 사실일까? 역사적 진실일까?
그럼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나머지 지구의 인구는 다 뭐야?
'진리(眞理)' 라는 것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나 항상 보편 타당한 정당성을 가지는 불변의 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는(그래서 하나님이 쓰신것이라 여겨지는) 기독교 성경은 영원한 불변의 진리라고 일컬어 진다. 그런데 교회의 영역만 벗어나면 늘 '성경을 과연 진리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흩뿌리고 있다. 인류가 모두 노아의 후손이었다면, 당연히 성결의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인류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성경의 무오류나 진리성을 강조하게되면, 나머지 인류의 절반 이상은 참으로 이상한(?), 야리꾸리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런 허무맹랑함은 바로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라고 불 수 있는 <노아의 방주>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진리인가? 아니면........ 만약 아니라면 그것은 '말짱 도루묵'이 되거나 '거룩한 사기' 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구약성경에 따르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들의 세상은 그야말로 썩을 대로 썩어버렸다. 세상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무법천지였으며 썩은 냄새가 하늘 높은 곳까지 진동하고 있었다.
이를 모두 지켜보다가 진노하심이 극에 달한 하나님께서 결국 노아를 부르셨다. 세상은 이제 더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막장에 이르렀구나.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구제불능의 세상을 나는 깨끗하게 지상에서 모두 쓸어버리기로 하였다. 너는 이제부터 서둘러 전나무로 아주 커다란 배 한 척을 만들어라. 배 안에 방을 여러 칸 만들고 내부와 외벽을 역청으로 칠해라. 환란에서 너의 일행을 구해줄 방주이니라.’라고 말씀 하셨다.
더하시어 ‘나는 너희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리라. 다시는 홍수를 통하여 모든 생명을 거두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홍수로 땅위의 세상을 멸하지 않으리라. 이는 모두 너를 비롯해 너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동물들과 모든 생명들과 나 사이에 세우는 새로운 계약이니라.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두어 영원히 나와 맺은 계약의 징표로 남길 것이다.’ 라고 하셨다. (창세기 9장 11~13절, 창세기 6장 11~14절)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대홍수로 말미암아 방주에 올라탄 노아의 가족과 동식물을 제외하고는 지구상의 모든 것이 소명되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엄청난 징벌을 내리신 것이다.
아담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인간이었다면, 노아는 대홍수 사건 이후로 새롭게 출현한 지구상의 모든 인류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인류는 모두 한 부모에게서 난 한 핏줄이며 한 가족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어째 좀 찝찝한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지구상에 널리 퍼져서 살고 있던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모조리 죽음을 맞고 사라졌다. 거대한 바다에 장렬하게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노아의 방주에 올라탄 생명들만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영원한 진리만 수록된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인 것이다. 성경의 내용은 글자 하나하나까지 어떤 오류나 허점이 있을 수 없는 절대 진리의 기록인 것이다.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하는 존엄하고 거룩한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학문이 발전하면서, 특히나 고고학을 통해서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듯 보이는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히브리 민족(유대인)의 역사는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되어 자손들을 낳고 낳고 또 낳고, 그들이 흩어져 무리를 이루며 살다가 노아의 방주사건을 계기로 모두 물귀신이 되는 바람에 한세월동안 침묵 내지는 단절되었다가 극소수의 노아의 가족만이 살아남았고, 이들의 후손들이 다시 번성하여 세상 곳곳에서 무리지어 살아가기까지 역사에서 침체기 내지는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했다.
그런데 히브리(유대) 역사보다도 더 오래된 수메르인을 비롯한 지구상의 여기저기 여러 민족들의 역사를 보면, 더 오래 유지되었으면서도 단절된 시기가 없을뿐더러, 그런 대홍수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으면서도 꾸준히 유지되며 역사를 이어내려 왔다. 이들은 노아의 방주사건과 별기로 아담보다 더 오랜 과거에도 살았었고, 노아가 방주를 타고 대홍수를 버텨내는 기간에도 지상에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면서 잘 살아왔던 것이다. 여기저기 오래된 민족마다 대홍수 설화나 전설은 많이 있지만, 그것이 온 인류의 소멸에까지 이르는 사건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유대민족 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늘 그랬던 것처럼 꾸준히 살아내려 왔다. 그들은 자신 교유의 민족 후손들 이었지, 유대민족이나 노아라는 사람을 전혀 알지도 못했다.
너무나 상반된 두 개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어느 것이 진짜 역사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진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 어떤 종교는 거짓이어도 신성하고 거룩한 진실로 포장되어야 하고, 그들과 다른 종교인들은 영원히 미개한 야만인에 머물러야만 하는 것일까?
노아는 유럽의 백인이 아니었을 것이며, 아프리카의 흑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와 닮은 몽골리안도 아니었을 것이고........ 노아는 당연히 서아시아의 아랍계 유목민의 모습과 혈통을 가졌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로 모든 생명들이 바다에 수장되어 소멸되었고, 아랍계 혈통의 노아와 역시나 아랍계 혈통의 아내와 그들 사이에서 아들과 딸들만이 살아남은 인류의 전부였다. 이후로 인류의 번식은 근친상간에 의해서 확장되고 퍼져나갔다. 그런 근친상간의 결과 때문이었을까? 아랍인 남녀 사이에서 백인이 나오고, 흑인이 나오고, 황인종이 태어났으니 말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노아가 흑인이고 아내가 아랍인인 상태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면 서구의 기독교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대라고 하면 순순히 넘어가줄까?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있지 않은가?
일단, 성경은 절대 진리이며 손톱만큼도 오류나 실수가 거짓이 없다고 목숨을 걸고 사수하던 유럽 기독교의 수장(교황을 비롯한 로마 가톨릭 초기 지도자)들은 이쯤 되자 일단은 사태를 수습하여야 하겠다고, 실로 기상천외한 내지는 해괴망측한 해석을 덧붙여 거룩한 종교적 불문율에 붙여 버렸다. 의문 불가능, 무조건 승복을 강요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아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셈이 황인종의 조상이 되었고, 함이 흑인의 조상이 되었으며, 야벳이 백인의 조상이 되었으며, 이 세 아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대홍수 사건으로 완전 소멸한 인류가 새롭게 다시 시작되었다’라고 말이다.
노아 부부가 어쩌고 저쩌고 해서....... 백인과 흑인과 황인 아들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노아나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나 이와 같은 해석을 갖다 붙인 사람들은 먼 훗날 의학과 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유전자학문이 등장할 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저렇게 쌔빨간 거짓말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마구 남발하고 저질러 버린 것이다. 아니면, 노아가 유전자 변이학이나 유전인자 조작 능력을 갖춘 생명공학자이던가 말이다. 오늘날에도 아직 성공하지 못한 유전자 공학부분을 노아가 일상에서 맘먹은 대로 쉽게 저질렀다면.......... 지금쯤 인류의 누군가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연구를 성공시키지 않았을까? 그럼 우리 모두가 신(神)이 되는 것일까?
함의 후손들이 북아프리카 일대의 베르베르족이나 투아레그족이라고 하는 주장이 종교적 해석이라면....... 사하라 이남의 전형적인 완전 흑인들은 베르베르족에서 나왔을까? 아니면 투아레그족에서 나왔을까?
초기 성경을 집대성 시킨 기독교의 그 양반들은 무슨 근거로 야벳을 특별히 어여삐 여겨서 유럽 백인들의 조상으로 승격 시켰을까? 무슨 근거나 이유가 있어야 할 터인데, 나는 도무지 그 속내를 알지 못하겠다.
셈과 함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선택받지 못하고, 유럽의 백인들이 멸시해 마지않는 구역으로 떠밀려 난 것일까?
구약 성경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기록한 것일까?
의구심이 생기는 기록들은 누가 왜 무엇을 위해 어떤 근거에 의해 어느 정도의 보탬이나 조작을 통해 꾸며다 붙인 것일까?
또, 그 후로 번역의 과정을 겪거나 새로운 성경의 완성될 때마다, 시대와 필요에 따라 의도성을 가지고 엉뚱하게 번역을 하거나, 없던 이야기를 꾸며서 추가로 삽입하는 일들을 왜 벌였을까?
그런 오류와 허점을 따지고 들자.......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과 같으며, 어떤 오류나 잘못이 있을 수 없는 거룩한 말씀의 기록이다(성서의 무오류성)’라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경고문을 떡하니 붙여 놓았던 것이다.
‘깨닫고 나서 믿는 것은 하책이요, 무조건 믿다 보면 차차 깨달음이 생길 것이니 그것이 상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책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을 갸륵하게 여기신다.’
헐!!!!! 교회가 2천년 동안 써 먹은 이 말을 지금도 믿어야하나?
대홍수로 인하여 발생한 물난리를 피해서 노아의 방주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바다 유랑을 해야만 했다. 그 기간이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위의 만화에서처럼 대충 1년은 넘지 않았을까 하고 성서학자들은 추정했다.
바다는 잠잠해졌는데 도무지 사방 어디에서도 육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여 노아는 육지를 찾기 위하여 까마귀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이번엔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한참을 지나 돌아온 비둘기의 입에 물려있는 것은 올리브 나무 잎새였다. 어딘가에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증거였다. 노아는 비둘기를 다시 날려 보내고 그 뒤를 쫓아갔다. 마침내 거대한 산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라라트 산(Ararat, 5137m)이 바로 노아가 도착한 새로운 육지였던 것이다. 터키와 아르메니아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터키의 영토 안에 놓여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때 터키가 빼앗은 영토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백두산처럼 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산으로 추앙되며 일년 내내 만년설에 뒤덮여있다.
노아의 방주는 여기 아라라트 산 중턱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 아라라트 산의 만년설이 녹으면서 계곡 골짜기에서 거대한 선박의 흔적을 닮은 터가 발견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노아의 방주가 썩어서 암석으로 변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현재까지도 발굴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 성서가 허구의 창작물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재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특이한 자연 현상이었을 뿐, 그것이 방주의 잔해라는 주장에 대해 고개를 저의며 허튼 웃음들을 짓고 있다. 성서에도 분명하게 적혀있다. 노아의 방주는 항해를 위한 선박이 아니라 많은 것을 담기 위한 나무 상자처럼 만든 방주라고 말이다. 그냥 흔하게 보는 사과상자 모양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아라라트의 잔해는 항해를 위한 타원형의....... 오늘날의 항공모함 같은 유선형의 골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노아가 생명 공학자에다가 최첨단 일류 선박 공학자였다는 말이다. 아울러 그럴 거라면 왜 겨우 그딴 배를 만들어 험난한 바다 위에서 멀리를 해야만 했을까? 거기에다 슬쩍 우주 공학을 더해서 우주선을 만들어 하늘에 올라가 바다가 잠잠하기를 기다리면 훨씬 쉬웠을 것을 말이다. 아니지....... 하늘에 올라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생고생을 감수해야만 했을까?
이런 걸 불경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진실이 드러나는 날, 어쩌면 저런 허구를 만들어 내느라고 수없이 많은 날밤을 새웠을...... 그리고 그 결과나 여파에 전혀 무책임했던 그 누군가의 책임을 적어도 한없이 미천한 나 보다는 먼저 묻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사실은 비둘기만 해도 그렇다.
아라라트 산은 해발 5137m나 되는 만년설에 뒤덮인 엄청나게 높은 산이다. 거기에 절반 조금 넘는 해발 2744m의 백두산만 해도 상부에 오르면 나무가 전혀 자랄 수 없는 암반지대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아라라트 산의 절반 정도가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암반지대다. 대홍수로 1년 이상을 세상 모두가 잠겼으니 아라라트 산의 만년설도 모두 녹아내려 바위덩어리만 남았을 것이다. 그 산 중턱에 노아의 방주가 도착했다. 그런데 비둘기가 올리브 나무 잎을 입에 물고 와서 육지가 나타났음을 알아챘다고 기록되었다. 비둘기가 왔을 때는 방주의 흔적 터 위쪽이면 한참 위쪽이지(방주의 높이만큼) 아래쪽일 수는 없다. 배를 강제로 끌어올려 놓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지금........ 방주 잔해 흔적의 높이 어디에도 올리브 나무는 없다. 혹, 지금은 없어도 구약 시대에는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타임머신이 없으니 확인해 볼 길이 없어서 아쉽다. 그렇다면...... 그 비둘기가 아라라트가 아닌 엉뚱한 다른 산에서 우연히 지나가다 발견한 올리브 가지를 물고 왔는데, 요란한 성서학자들이 진짜 사정도 모르면서 아라라트 산을 기독교 성지화 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한다. 그런 풍문이 있지 않은가? 로마 테르미니 역 근처에서 피자만 먹다가 돌아온 날라리 여행자가 바티칸 방문 썰을 누구보다도 더 그럴싸하게 잘 풀어내더라고 말이다. 혹 성서라는 것이 기존 골격은 분명히 있겠지만, 그 위에 대부분의 이야기들을 잘 지어내고 풀어서 입맛에 맞게 끼워 넣은 것은 아닐까? 그런 부분들이 내 생각에는 너무나 많다,
현대의 기독교 목회자들에 의해서 그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수만 또는 수 억 개의 보편타당한 실제의 가르침으로 개별적인 설교에 의해서 재창작되고 전파되면서....... 시나리오는 참으로 엉성하기 그지없어 보이는데 아무튼 영화는 멋스럽게 만들어 지는 경우처럼 된 것은 혹시나 아닐까? 이런 생각이나 의구심도 불경일까? 혹시나 말이다. 노아의 방주 사건만 해도 그 해석을 달리하고 설교의 소재로 삼은 설교집을 늘어 놓으면 달나라를 다녀오고도 남을 테니까 말이다. 교회는 그런 목회자의 소신과 필요성에 의해서 성경의 사건들을 하고들고 재해석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코란의 개별적 해석이나 설교를 절대로 금한다. 코란의 내용은 불변의 진리이며 있는 그대로 받들고 따라야 한다. 그래서 암송으로 족하다며 개별적 해석을 절대로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의 경우...... 같은 신학대학에서 같은 교수에게 배우고 같은 종단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초고 정치가가 속한 교회에서의 목회자와 시골이나 광산이나 노사현장에서 활동하는 목회자 사이에서 <모세의 애굽 탈출 사건> 하나만을 두고서도 천차만별 극과 극으로 상반되는 설교가 나온다. 누군가는 정치권력의 조찬 기도회에서 하나님을 부르짓고, 누군가는 그 권력에 강제로 끌려가 고문당하는 현장을 찾아가 또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짓는다. 성경의 모든 내용들에 대한 해석과 정당성 부여와 설교의 목표가 판이하게 다르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중세시대 첫 이단판명으로 로마 가톨릭에 의해 몰살당해야만 했던 카타리파는 그런 이유로 기독교의 중간 관리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더불어 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모든것을 직접 행했고 늘 같은 자리와 시선으로 함께했다. 성 삼위일체라는 위대한 존재이면서도 말이다. 그랬음에도 세월이 지나자 일부 무리들(?)이 중간 관리자를 자청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쉽게 말하면 성직자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서 어디에도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별도의 성직자를 인정하지도 두지도 않았다. 그들 무리 스스로가 자리를 만들어 차지하고 들어앉은 것이다. 점차 권력과 호사생활의 맛과 멋에 취해서 중간 관리자의 자리를 정당한 것으로 포장해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이며 교황제도인 것이다. 그들은 고해 성사라는 족쇄로 인간들을 옭아맸으며, 자신들의 거처를 다시오실 하나님을 예비하기 위한 미래의 집이라 선전하며 호화롭게 꾸며서 거기에서 살았다. 십일조를 만들었고 종교세를 거두고 면죄부를 팔아서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추구했다. 카다리파는 이러한 모든 행위가 거짓위선이며 초대교회에는 분명히 없는 것으로, 교황(교회)은 거짓 선지라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결국 그들은 교황이 파견한 7만의 튜턴 기사단에 의해서 2만 오천명의 신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추살되었다. 카타리파뿐만이 아니라, 그들과 교류하던 유대인과 가톨릭 교도와 이슬람인과 무신론자들 까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 또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누가 무엇이 이단인가?
기독교의 등장은 처음부터 유대인들에겐 이단이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에 의해 신성모독, 즉 이단의 죄로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 그렇게 이단으로 출발한 것이 로마 가톨릭이다. 이어서 로마 황권에 의해 나뉘어진 비잔틴 교회(동방 정교회)와 서로를 이단으로 처형을 수도없이 반복하는 희대의 코메디 상황을 교회가 연출한다. 무엇이 왜 누구 만대로 이단인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나 제시 없이 툭하면 이단, 이단, 또 이단을 남발했다. 그런 꼴들에 참을 수 없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개신교가 등장하자 이번엔 한 목소리로 개신교를 이단이라고 몰아부치고 파문 시켜 버렸다. 그러다 세력이 커지자 파문을 거두고 같은 기독교 아래 합법으로 뭉쳤다. 어디에도 종교적 신성이나 거룩함은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순전히 이해득실에 다른 기득권 싸움이었을 뿐이니까 말이다. 그후로도 부지런히 새로운 종파가 등장하면 이단으로 파문 시키고 핍박을 가했고, 세력이 커지면 언제나처럼 또 쑨순히 기성 종교 안에 합류시켜 짬잠이를 계속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이단이 무슨 애들 장난인가?
어쨌거나, 노아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장소가 아라라트 산이 틀림없다고 성서학자들은 열심히 주장을 한다. 사도 베드로가 로마의 바티칸 광장 언저리서 순교했다는 주장과 노아의 방주가 아라라트 산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로마 가톨릭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야만 다음 스토리가 이어지게 되고, 이제까지의 종교적으로 행동해 온 모든 것에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은 아라라트 산이 맞다 치자. 그럼 출발지는 어디였을까? 일 년쯤 아주 먼 항해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근처에서 겨우 떠올라 있다가 도착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방주의 출발지를 찾으면, 혹시나 아담과 하와가 쫓겨나온 낙원을 찾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어지기 때문이다.
노아의 방주를 만든 전나무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의 왕으로 여겨지던 백향목을 가리킨다. 백향목은 최고의 나무로 주요 수출 거래 물품에 들기도 한다. 백향목은 선박 건조에 최고로 치는 아주 고급 목재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최고급 백향목의 주산지가 바로 레바논지역이다. 노아가 아주 먼 곳에서 백향목을 수급하거나 사다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비교적 쉽게 수급이 가능했어야만 방주 건조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의 방주 출발지는 레바논 인근 어딘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에덴 동산도 거기 어딘가에 있지가 않을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데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아라라트 산의 방주 잔해 터에서 선박 건조에 사용되었던 백향목의 잔해나 못이나 아무튼....... 그것이 진짜 노아의 방주 잔해라는 사실에만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왜???? 도대체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사랑’과 ‘평화(샬롬)’을 최고 덕목으로 무장하고, 당장 가자지구의 전쟁을 멈추게 하고, 트럼프의 해괴망측한 폭거를 멈추게 하고, 푸틴과 네타냐후를 국제재판소 법정에 만 듯이 세워서 정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후대에 교훈이 되게끔 일벌백계의 책임을 끝까지 물어야 하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로’노력하며, 누간가든 ‘자신이 행한 결과에 대한 엄한 책임은 반듯이 끝까지 지게끔 만들어야만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쳤거나 타인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질을 쳤다면 절대로 선처나 감형이나 가석방이나 사면은 불허되어야 한다. 공평한 법 집행과 엄격한 적용이 재발을 막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네타냐후와 푸틴은 가석방이나 감형이 없는 징역 110 년쯤에 처해야 하고, 트럼프는 40년 우주정거장 유배형에 처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다 정말로 트럼프 재임 중의 미국 방문이나 네타냐후 재임 중의 이스라엘 방문이 물 건너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미국은 몰라도 이스라엘이나 레반트 지역은 꼭 가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아르메니아는 어떻게 예루살렘에 자신들의 구역을 가지게 되었을까?
예루살렘은 바위의 돔 사원(솔로몬 신전 터)이 있는 성전산을 제외하고 (유대인 구역) (기독교인 구역) (무슬림 구역)과 (아르메니아인 구역)의 네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사실을 따져 본다면 이 구역의 구분이 딱히 어느 시대에 누구에 의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루살렘 구도시라는 좁은 영역 안에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서로 얽혀서 살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생활방식이나 풍습이나 쉽게 상호 교류가 가능한 사람들끼리 따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때론 인위적으로 구역을 정해놓은 것처럼, 때론 평소의 방식대로 쉽게 지내기 위하여 무형의 구역 경계가 그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고대 이래로 수많은 민족들이 종교를 초월하여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고 섞여 살았는데, 아마도 그 중의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가진 무리 순으로 네 부류가 돋보인 결과가 아닐까 싶다. 실례로 기독교인이 유대구역이나 무슬림 구역에 들어가 생활하자면 당연히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고, 반대로 무슬림이 기독교 구역에서 기거하자면 무슬림 구역보다 훨씬 불편하고 때론 종교적 마찰이나 위험이 동반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살아가기 편한 구역으로 끼리끼리 모여서 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굳이 언제부터 딱히 그렇게 되었다거나, 어디서 어디까지가 분명한 무슨 구역이라고 규정짓는 것 또한 아무 소용이 없는 헛지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말이다. 소위 기독교 3대장이라고 일컷는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대등하게 느닷없이 끼어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아르메니아가 당당하게 4대장의 반열에 올랐단 말인가?
유럽의 동쪽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는 발칸반도에는 가장 남서쪽으로 해발 5천 미터급의 아라라트 산이 우뚝 솟아있고, 좀 더 북쪽의 깊은 곳에 더 높은 5천 미터를 훌쩍 뛰어넘는 웅장한 산봉우리들이 여럿 모여들어 있다. 하여 유사 이래로 이 지역을 유서 깊은 코카서스 산맥이라고 불러왔다. 고대 그리스사람들은 남쪽으로 세상의 끝이 바로 이 지역이라고 생각했다. 이 코카서스 산맥 주변으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3국이 흩어져 자신들만의 역사를 써내려왔던 것이다.
낙원에서 추방을 당하고도 못된 성질을 버리지 못하고 환락과 방탕으로 썩은 냄새를 진동시키고 있는 초대의 인류를 모두 말살시키고 새롭게 리부팅(Rebooting) 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물난리를 벌이셨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노아의 방주 사건>이다.
올리브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온 비둘기를 보고 대홍수가 끝이 났음을 알아차린 노아 일가족은 비둘기를 쫓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첫 육지에 상륙하였다. 그곳이 바로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국경에 위치한 아라라트 산이다.
몇 날을 더 기다려 물이 모두 빠지자 노아 일가족은 방주에서 나와 아라라트 산자락을 따라 저 아래 드넓게 펼쳐져 있는 평원으로 내려갔다. 방주에 싣고 온 모든 동식물을 방출(?) 시키고는 햇볕이 잘 드는 평원 언덕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아라라트 산자락 아래에 처음으로 마을이 생겨났고 시간이 지나 도시로 발전해 갔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아르메니아인 것이다.
노아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기록에 남는 대표적 농사가 바로 포도주 농사였다. 포도주를 너무 마셔댔다가 노아가 사로를 친 기록이 성경에 그대로 남아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에 의거하여 디오니소스 신(Dionysos)이 포도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포도주의 발상지는 그리스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하여,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노아의 포도주 사건을 바탕으로 아르메니아에서 처음 포도주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혹시 이 원조 포도주에 대한 다툼 때문에 헤브라이즘(유대교)이 헬레니즘(그리스)을 죽여 없애고자 한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하나님에 의해서 리부팅된 새로운 인류의 첫 정착지가 바로 아르메니아였다는 이야기는........ ‘성경은 오류가 하나도 없는 순도 100%의 진리 그 자체다’ 라는 정설을 전제로 한다면 이는 틀림없는...... 역시나 순도 100% 사실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노아의 후손들이 이곳 아르메니아에서 자손을 낳고 낳고 또 낳으면서 번성하다가 무리가 너무 커지자 노아가 분가를 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위 지도에서 보는 바처럼 야벳은 서쪽으로 가서 유럽지역의 백인들 조상이 되었고, 셈은 동쪽으로 가서 황인종들의 조상이 되었고, 함은 남쪽으로 내려가 흑인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를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데서 파생된 문제가 실제로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서구의 한 대학에서 말이다.
아르메니아의 한 대학생이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유대민족 장자 가문의 후손이라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러자 이스라엘 유학생들이 덤벼들었다. 이스라엘의 후손인 자신들만이 유대인인데 아르메니아 촌뜨기들이 어떻게 유대인이냐고 따지고 들은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만이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다툼은 곧 폭력사태로 번지고 말았다. 그러자 아르메니아 대학생이 달려가 구약 성경을 가지고 왔다. 창세기를 펼치고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꺼내 가리키면서....... ‘이 내용이 진실이냐 아니면 거짓이냐’고 따져 물었다.
성경 내용을 거짓이라고 하면....... 유대인이라는 존재 자체도 부정당할 것이고, 진실로 인정하자니......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그 지역에서 번성하다가 민족 대이동을 단행한 것이 인정됨으로, 아르메니아 인들이 유대인 장자 가문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과연 누구에게 전통적 오리지널 유대인 핏줄 증표가 있는 것일까?
더불어, 성경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지구상에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할 수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인류가 노아에서 뻗어 나왔을 테니까 말이다.
이걸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목사님? 신부님? 교황님은 아실까? 최소한 노아까지는 가서 물어봐야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긴, 지금의 현실 속에서 어떤 목사님께서 ‘한국인은 모두 노아의 아들인 셈의 후손으로, 셈의 증손자인 욕단의 핏줄에서 나온 직계 후손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엄청 놀랐다. 이게 지금 현실성이 있다고 펼치는 주장일까? 한반도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겨우 140년 남짓인 상황에서 이젠 그 뿌리가 시공을 타고 넘어서 한국인이 모두 유대인의 후손이라니........ 이완용이도 그 정도 까지는 아니지 않았는가? 한민족이 노아의 후손이 되면 무슨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하늘나라 임대주택 분양권이라도 무상제공 된다는 말일까?
내가 유대인 핏줄일 수 있다는 표현이 감격스럽기는커녕 왜 이리도 속으로 거북하고 짜증이 나는 것일까? 참 가지가지 한다.
‘이보세요. 나는요. 그냥 단군의 자손으로 살아갈래요. 천국 임대주택 분양권도 필요 없구요. 부탁드리는데...... 제발 정도껏 하고 삽시다. 그러니 욕먹지요. 젊은 기독교인이 팍팍 줄어들지요. 신앙 디아스포라가 벌어지고 나면 엄청난 종교 실업자가 마구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생겼다구요. 제발 정도껏 만 하시지요.’
‘이단을 허구한 날 입에 달고 살던 종교 재판소는 시방 다 어디로 갔지? 이럴 때 본격적으로 활동 안하고 말이다.’
이 정도면 아무래도 대홍수를 한 번 더 해서 싹쓸이 대청소를 다시 할 때가 되었지 싶다.
아르메니아 인이 구약 성경을 예로 들며 자신이야 말로 어쩔 수 없는 태생적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참, 뭐라고 간섭하기가 참 애매모호 하다.
하지만, 단군의 후손이라고(개천절을 국가 기념일이라고 휴일로 찾아먹는 한국인) 오천년을 살아 온 처지에, 뜬금없이 바다건너 들어온 외래종교(?)였던 기독교의 근원에 해당하는 노아의 후손인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좀......... 솔직히 말하자면 ‘이 양반. 도대체 개념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하는 쌍소리가 튀어 나올 것 만 같다.
유대인들은 오천년 이상 동안 올곧게 히브리 민족의 민족성과 종교성과 문화적 생활방식을 받들고 유지해 내려오는 오리지널 유대인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노아의 후손임이 분명하지만, 인류 최초의 기독교 국가(사도교회)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민족이다. 여기에서의 (사도교회)는 중세시대 내내 극한 대립과 마찰을 빗은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의 사이에서 다소 어색한 처지로 교리는 물론 기독교적 전통까지도 중간노선을 걷는 듯한, 실로 보기에 따라서 사뭇 달라 보이는 그런 기독교의 한 종파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왜 그들이 그런 선택을 했을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 종교적 선택은 하나님이 골라준(?) 것이 결코 아니다. 살아남기 위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이 스스로 선택해야만 과제였을 뿐이다.
환웅의 후예로 쑥과 마늘을 먹어 인간으로 환생한 어머니에게서 낳은 단군의 후손인 한반도 인들의 역사는 오천년에 이른다. 그런 고대사를 허구라 내치고 우상숭배라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느닷없이 한반도 인들을 노아의 후손이라고 내세우기 시작했다. ‘참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다.’이유야 어떻든 근거가 무엇이든...... 차라리 노아가 날려 보내 돌아오지 않았던 까마귀가 생명수를 입에 머물고 멀리 날아 도착한 곳이 태백산이고, 그 생명수를 여우에게 뿌렸더니 여인으로 환생하였고, 그 여인에게서 남자 접촉 없이 거룩한 생명의 말씀으로 잉태하니....... 바로 그 개념 없는 양반의 조상이었다고 하는 편이 훨씬 가능성 있는 거룩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나는 어설픈 프로테스탄트 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족하고 감사한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유대인 감투를 씌워주고 싶다고? 그 감투 진짜야? 브랜드가 있는 거야? 그렇게 좋으면 너나 쓰고 다녀. 난 그냥 웅녀의 자손으로 살아갈래. 웅녀의 자손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난 유대인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구원을 포기하고라도 한반도산(産) 웅녀의 후손으로 살아갈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토록 유대인을 흠모하는 너에게 이말 만은 마지막으로 꼭 해주고 싶어.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참 불쌍했어. 저절로 눈물이 나왔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기도했어. 그런데 지금은 어떠니? 그들이 홀로코스트 가해자로 변해 버렸어. 극우파 유대인들은 하는 짓을 보면 히틀러의 나찌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못하지 않아. 이젠 그들에 대한 걱정과 기도를 거두어들이고, 그들에게 과거보다 더 혹독한 벌을 내래달라고 새로운 기도를 드려야 할까봐. 그게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민족이 저지를 일인가를 똑똑히 지켜보라고. 유대인? 어쩜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사탄의 자식들일지도 몰라. 이게 내 생각이야. 부디..... 개념부터 되찾기 바래.’
근자에, 중국의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 한 분이........ ‘베들레헴을 방문한 세 명의 동방박사 중에 한 사람이 중국인 현자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한동안 시끌시끌했던 사건이 있었다. 성서에 기록된 바대로 동방박사가 동쪽에서 온 훌륭한 학자들이었다면, 당연히 동쪽 세상의 중심인 중국에서 갔을 것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중국에서 별자리를 관찰하는 사람 중에 기독교인이 이미 존재했다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서쪽으로 먼 길을 떠난 중국인 동방박사라고 그는 주장했다.
중국 사람들....... 참 가지가지 갖다 붙이고, 우기고, 일단 차지하는데 선수다. 축구도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골프도 중국이 종주국이고, 한복도 김치도 중국이 시초고........ 그럼 인간사에 부정적이고 안 좋은 사례들도 모조리 다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양보를 해줘도 되는 것일까? 어딜가든 시끄럽고 떼를 쓰는 무개념 무원칙 무매너 같은것도 다 가져가라. 그렇게 제 것으로 만들고 나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일까? 생활에 좀 보탬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렇게 염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옆에 살다보니 이제 무개념의 인간이 한반도에도 생겨나는 것일까? 그런 걸 오염이라고 하는 것일까?
--- 너무 길어져서 다음이야기에서 이어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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