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도바(Cordoba).
어쩌면 이번 한달간의 스페인. 포루투갈. 모로코 여행에서 가장 아쉽고 가장 안타까운 여행지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직접 다녀 본 스페인의 모든 여행지는 꼭 다시 찾아가보고 싶을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똑 같은 일정을 다시 소화한다해도 별 불만이 없을.......
여행 버킷 리스트 중에 한 곳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위해서라도 언젠가 다시 한 번 스페인을 찾아가지 않을까?
혹여, 다음 여행이 산티아고 순례이던 아니면 그 어떤 곳을 찾아가는 여행이던....... 반듯이 그 여행에 (코르도바)는 꼭 다시 챙겨 넣을 것이다.
코르도바는 그만큼 나에게 어떤 여행 휴유증 처럼 가슴이 아팠을만큼 아쉽고도 아쉬운 그런 여행지였다. 시간이 부족했다. 스케줄을 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 포루투갈 리스본을 떠나올 때....... 그냥 모로코 카사블랑카를 향했던가, 아니면 세비야로 직접 들어갔다면....... 코르도바에서 이틀 삼일의 일정이 가능했었다. 그것이 본래의 스케줄이었다.
그런데 마드리드를 그냥 빼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마드리드에서 나흘을 보냈다.
그리고 세비야로 떠나는 일정 속에서........ 코르도바가 세비야로 가는 길목 중간에 놓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 코르도바를 세비야로 이동하는 일정 중에서 한나절을 할애해서 둘러보고 지나치는 정도로 스케줄을 확 바꾸었던 것이다.
코르도바 알카라스 성문을 마주하고 섰을 때 비로소........ 아차 싶었다. 후회막급이었다.
코르도바는 결코 한나절에 맛만보듯이 스쳐지나칠 수 있는 그런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애초에 알고 있었것만........ 이미 스케줄은 오늘 저녁에 세비야에 도착하는 것까지 모두 준비가 마쳐진 상태였다.
코르도바는 이 순간까지도 나에게 있어서 '스페인에 대한 그리움'의 근본적인 이유로 짙게 남아있다.
'코르도바(Cordopba0'는 페니키아어로 '풍요롭고 귀한 도시'라는 말에서 유래된 아름다운 도시이다.
기원전 2세기경에 처음 건설된 코르도바는 '유럽의 콘스탄티노플' 혹은 '유럽 속의 동양' 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로마가 리베리아 반도에 등장하면서부터 '코르도바'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물류의 중심지로 눈부시게 발전을 거듭했다.
서로마가 멸망하고 등장한 서고트(게르만의 한부족)는 톨레도를 수도로 삼고 한동안 리베리아 반도를 다스렸다. 하지만 서고트의 지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고 내분을 겪으면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이 혼란을 틈타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에 있던 아랍족(무어인)이 바다를 건너와 서고트를 멸망시키고 짧은 시간에 리베이라 반도의 2/3를 차지해 버렸다. 그와 동시에 이슬람 왕국을 세웠으니 바로 유럽에 건설된 최초의 이슬람 왕국인 '우마이야 왕조'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리 서고트족의 내분이 거셌다고는 하지만, 아랍인들이 어떻게 지중해를 건너 올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랍민족의 이동이나 확장이라기 보다는 그 내막을 기피게 살펴본다면 '이슬람 교의 분열과 대립'때문이라 하는것이 타당하겠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마호멧)은 제국으로 가는 기틀을 거의 이루어 놓은 상태에서 후계자를 남겨놓지 못하고 갑자기 사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와 함께했던 측근들 사이에서 이슬람의 통치자 자리를 놓고 참혹한 대결이 벌어졌다. 절반이 넘는 (수니파)가 두번째 계파인 (시아파)를 비롯해 여타의 다른 소수 계파들을 척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분히 '종교적 내란'이 일어난 것이다. 수니파는 시아파를 미롯한 소수 계파의 씨를 말리기로 작정했다.
이러다 보니 수니파에 굴복하거나, 아니면 멀리멀리 아프리카나 세상의 끝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수 밖에 없었다.
모로코의 이슬람 또한 이 당시에 부족을 이끌고 도망쳐온 시아파에 의해서 세워진 왕국이다. 알제리 튀니지 등 지중해 일대의 해안가지 수니파가 추격을 해 오자, 그들은 아주 척박한 내륙의 산간오지로 달아나야만 했다. 다시 처참한 유목민의 생활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중에 지중해를 오가는 상인들에게서 서고트의 사정을 전해 듣고는......... 그들은 온 부족의 목숨을 담보로 과감하게 지중해를 건넜던 것이다.
몰락해가는 서고트족은 '로만 카톨릭'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들은 엄연한 기독교인(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 정교회 한 분파)이었다. 세상을 주도하고 있는 두 개의 종교가 리베리아 반도에서 한판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무어인)의 이슬람과 서고트족(그리스 정교회) 외에도 원주민인 리베리아인(카톨릭)들이 합세하여 거세게 대항하였다. 이슬람이 우위를 확실하게 차지하고는 있었느나 카톨릭의 저항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원주민의 항전은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근동의 시리아 지역에서 또 한무리의 이슬람인들이 수니파에 쫓겨 같은 이동 경로를 거쳐 스페인에 상륙했다. 그들은 이미 앞서서 지중해를 건너 온 무어인(우마이야 왕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신문물과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삽시간에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자신들의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였으니 이들을 '후기 우마이야 왕조'라 부른다.
이들이 751년 부터 1.031년 까지 코르도바를 수도로 정하고 거대한 이슬람 왕국을 건설했다.
그릉은 진정으로 유럽의 영토 깊숙한 곳에서 영원한 이슬람 왕국을 꿈꾸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유럽 어디에서도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도시를 건설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코르도바'였다.
당시 코르도바의 인구가 일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11세기 경에 말이다.
코르도바 시내 안에 300개 이상의 모스크와 600백 이상의 공중목욕탕이 당시에 존재했었다고 한다.
천년 전에 인구 일백만 명이 밀집해 생활하는 도시는 유럽은 아예 없었고........ 중동의 소아시아 지역에는 3개의 도시가 더 있었다.
다마스쿠스.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가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벗어나 유일하게 리베리아 반도의 유럽땅에 '코르도바'가 있었다.
이 때로부터 이백년 삼백년이 지나서 비로소 세계사속에 인구 일백만의 도시가 다시 등장한다.
태국의 아유타이 왕국이 영원한 앙숙인 크메르 왕국으로 쳐들어가서 그들의 수도 '앙코르 톰'을 정복했을 때, 앙코르의 거주인이 일백만명을 넘어서 있었다.('앙코르 왓'은 크메르 왕국의 수도 앙코르 톰에 있는 하나의 사원일 뿐이다) 그리고 꼭 1년 후, 아유타이가 다시 쳐들어 갔을 때 앙코르 톰은 텅 빈 죽음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일년만에 일백만명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혹 동남아 밀림속에 인구 일백만의 숨겨진 도시가 어딘가 있을지.........
15세기 말엽. 스페인 원정대장 피사로가 철갑기병 200명을 이끌고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점령했다. 당시 잉카제국의 총 인구가 일천오백만명이었고, 쿠스코의 인구가 일백만명을 넘었다. 왕궁 근위대만 6만명이나 되었는데........ 피사로의 군대 200명에게 패해서 항복했다. 고산지대에 적응하지 못했던 스페인군은 갖은 온갖 약탈 끝에 철수했다. 일년 뒤 재차 약탈을 위해 쿠스코를 쳐들어 갔을 때, 쿠스코 또한 텅빈 죽음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일백만명의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스페인군이 가져온 전염병 천연두를 의심하였으나 시신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다. 정글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아마존 강 밀림속 어딘가에 인구 일백만명의 숨겨진 도시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20세기 말(현대) 안데스 산 정상부근에서 사라진 잉카인들의 후손이 남긴 유적이 발견되었으니 바로 (마추피추)다. 하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마추피추에는 실제로 약 2.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일백만명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오백년 전에 말이다.
이렇게 따져볼 때........ 거의 천년전에 인구 일백만의 도시를 네개나 가진 이슬람 문명의 앞선 문물과 위대성을 조금은 엿볼수가 있는 것이다.
코르도바는 이제 여타의 모든 이름난 도시들을 제치고 명실상부하게 '유럽의 꽃'으로 피어났다.
그러자 '코르도바 러시'가 생겨났다.
런던. 로마. 파리. 빈. 프라하........ 거의 유럽의 모든 나라와 도시에서 귀족. 학자. 예술가. 정치가들이 코르도바로 대거 몰려 들었다. 젊은 영재들이 대학을 찾아 공부를 하고 신문물을 경험허기 위하여 코르도바를 찾았다.
그만큼 당시의 이스람은 '최첨단 문물을 보유한 신지식인 집단' 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훗날 코르도바를 비롯한 유럽에 정착한 이슬람인들을 통해서 종이와 인쇄술. 비단 직조법. 화약. 천문학. 의학 등의 최신문물이 유럽에 전해지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벌어지는 '십자군 전쟁' 당시 유럽의 연합군은 이슬람군을 향해 '극동의 야만인 집단'이라고 폄하 했지만....... 기실은 이슬람에 비하자면 유럽 전체가 '극도의 야만인 집단'에 불과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예루살렘 탈환전에서 식수도 모자라 헐떡이는 기독교 군대에게(예루사라렘 왕 보두엥 4세) 살라딘은 만년설에 뒤덮인 설산에서 캐온 얼음을 선물로 내밀었다고 역사서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오늘날의 휴대용 냉장고를 이미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울러 이미 실제 뇌수술을 했었다.
정확히 새벽 5시. 우리는 에스트라 마두라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숙소를 나섰다.
여행 9일차인 오늘은 코르도바를 거쳐서 세비야로 이동하는 날이기 때문에 조금 일찍 서둘러야만 했다. 마드리드에서 코르도바가 버스로 4시간반 걸리고, 코르도바에서 세비야 까지가 버스로 2시간 반이나 걸리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이용해 남부 터미널로 향한다.
'굿바이 마드리드. 반갑고 고마웠어...........'
하이엔 지방을 지나면서는 가도가도 끝없이 지평선을 펼치며 늘어서 있는 올리브 농장과 포도밭을 보았다. 가로 세로로 보기 좋게 정렬된 채 심겨져 자라고 있는 푸른 유실수들을 보자니....... 어찌 부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일부 지역 평야는 평야도 아니다. 그저 손바닥만한 들판일 뿐이다. 아무데나 평야나 평원이라 부르는것이 아니다. 적어도 스페인의 들판 정도는 되어야지 평야지대니 평원이니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것이지....... 부럽다. 내 소유의 부동산이 아님을 안타까워 하는것이 아니라........ 내 조국 대한민국의 영토가 너무도 협소하여 한국사람 하면 우선 '부동산 소유욕과 투기'부터 떠오르는 현실이 안타까워 하는 말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이 정도 땅덩어리쯤 뚝 떼어서 한반도에 가져다 붙여놓으면 부동산 투기바람은 없앨 수 있을텐데.........
라만차 지방을 지나고 있음은 누구에게 설명을 따로 듣지 않아도 쉽게 알겠다.
스쳐 지나가는 마을 어귀며 저만치 산언덕 위에 거대한 돈키호테 상징물들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치장없이 그저 녹슨 철판으로 만든 거대한 돈키호테 이미지만 살린 조형물들이 간간히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에다 풍차도 나타나고 사방으로 수확을 앞둔 잘 여문 밀밭이 드넓은 평원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들판 저만치서 뽀얀 먼지를 내뿜으며 로시난테가 달려오려나 했더니만........
중간에 아주 작은 마을의 휴계소에서 잠시 들러 쉬었다가 간다.
버스 기사도 교체된다. 경험으로 보아 스페인의 버스 교통은 운전기사의 장시간 운전을 금지하고 있는것으로 보여진다. 보통 2시간반에서 3시간 정도 사이에 중간에 운전자가 교대된다. 휴계소에서 새로운 운전 기사가 올라온다. 터키의 경우는 주운전자와 보조운전자와 버스 도우미 등 3명이 함께 이동하면서 수시로 교대를 했었는데 말이다.
간이 휴계소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요란한 경적소리와 폭죽소리가 어디 난리통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울려 퍼진다.
그래서 소리나는 큰길가로 나가 봤다.
매 앞에 선 피캅 짐칸 위로 엉성하게 만든 누군지 확인 못한 성인(?)의 형상을 온갖 방법을 이용해 치장을 하고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의 차량 행렬이 길게 뒤를 따르며 경적을 울리고 폭죽을 쏘아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이곳 시골마을의 축제 카페레이드 행사중인 모습이었다.
하나 둘 마을 사람들이 쫓아나와 성호를 긋고 박수를 보낸다.
5월의 스페인은 도시나 시골이나 어디를 가든 온통 축제다.
벌써 저만치 앞서 지나간 피캅 위의 성인 형상을 기억하건데....... 아마도 '농부와 서민들의 수호성인 성 이시도르'가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아무일도 없었다. 그저 준비했던 바 대로 순탄하고 즐거운 여행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느닺없이 깊고 깊은 수렁속으로 푹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삽시간에........ (그리고 그 사단으로 인하여 나는 언젠가 꼭 코르도바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챠밍여사의 자세가 갑자기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식은 땀을 흘리고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많이 힘들어.....' 하소연을 해왔다.
코르도바를 그리 많이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중간의 작은 경유지 소도시를 거치면서 다행스럽게 10분 정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화장실에서 챠밍여사가 계속 토했다.
그제 톨레도에서 돌아오면서 부터 복통을 호소하고 밤새 설사를 했었는데....... 집에서 가져간 상비약의 효험인지 다음날 아침에는 컨디션을 거의 되찾았었다. 그래서 나섰던 세고비아 여행에서도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만 마시면서 여행을 강행했는데, 오후가 넘어서면서 점차 힘들어 하더니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서는 녹초가 되어 떨어졌다. 병원이나 약국을 생각했는데........ 상비약을 또 먹고 휴식을 취하면 좋아질것이라 해서 또 그냥 넘겼다. 어제 본래의 계획은 소도시 '쿠엔카'를 방문할 생각이었는데....... 컨디션 회복이 늦어져 쿠엔카를 포기하고 쉬다가 점심때가 되어서야 회복되었다고 해서 '프라도 미술관'을 다녀왔다. 전혀 음식을 먹지 못하는것 외에는 어느정도 회복이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다시 가져가 약을 복용하고 쉬다가 오늘 코르도바를 거쳐 세비야로 이동하는 중이었는데 그만 버스안에서 부터............ 비상 사태다.
이건 여행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가문의 재난인 것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저 멀리서 우리 아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빠를 째려보고 있는 상상이 든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건 모두 아빠 책임이예요?'
어휴........ 알지. 잘 알고 말고........... 아빠는 죽어라 아들바라기지만........ 녀석의 시선과 생각은 언제나 엄마뿐인걸.........
식은 땀이 흐르는 내 얼굴을 보며 챠밍여사가 웃는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것처럼.......
'너무 걱정하지마. 약을 다시 먹었으니까 나아질거야. 갑자기 장시간 버스를 타니까 그런가봐.........'
'코르도바에 도착하면 무조건 병원부터 간다. 무조건이야.......... 정히 상태가 않좋다거나 당신이 힘들거나 심하면 곧바로 귀국 비행기 탈거야. 알았지? 스페인은 겨울에 다시 오면 되지. 조금이라도 무리하면서 여행을 계속할 생각은 없어. 알았지? 조금만 참아. 곧 코르도바야.........'
'계획 취소는 무슨? 그러다가 평생 나 때문에 스페인 여행 망쳤다고 원망할려고? 조금 진정되면 곧 괜찮아질거야. 무리없이 우리 여행은 계속하거구...... 겨울엔 이탈리아 가야한다니까?'
코르도바에 도착했다.
서둘러 유인 코인락커에 배낭과 캐리어를 맡겼다.
인포메이션이 닫혀 있었다. 터미널 주변을 뛰어다니며 살펴 보았는데...... 병원이나 약국이 보이질 않는다. 길건너 코르도바 역사를 찾아보아도 약국이나 병원이 없다.
마침 지나가는 경찰차가 있어서 손을 들어 세웠다. 두 사람이 다 영어 소통이 가능했다.
나는 당면한 상황에 대해서 짧게 짧게 설명을 했다. 혹시나 태워다 주려나 했는데........ 행사장에 거리 통제하러 출동하는 중이란다.
큰 병원은 시내 중심가로 10분 정도 택시를 타고가면 되겠고 병원 두 세곳이 같이 있으니 아무곳이나 들어가 사정을 이야기하면 될것이란다.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조수석에 있던 젊은 순경이 새로운 정보를 전해준다.
'외국 여행자라면 시내의 병원보다는 올드 시티에 있는 적십자 병원이 더 편리할 것'이라는 이야기 였다. 지신도 그 주변에 살고있는데 아이들 때문에 적십자 병원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친절하고 환자에 대한 배려가 뛰어나 항상 감사하고 있단다.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다.
복지 선진국인 서유럽에서 의료보험 적용이 안되는 외국 여행자 처지이고........ 만약 그 이상의 어떤 도움을 기대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난다면........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청소년 적십자 단원으로서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적십자의 이념과 목적과 가치관을 어느정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젊은 경찰에게 적십자 병원의 위치와 거리에 대해 물어보았다.
옛도시 부근이라 도로가 좁고 구불구불하여 택시 외에는 다른 교통편이 마땅치 않다고 했다. 5분에서 7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라고......
고맙다는 인사로 경찰을 보내고 나는 챠밍여사에게 지금 나누었던 이야기들과 현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적십자 병원이네. 우리에겐 지금 너무도 당연한거 아니야? 그리고 택시는 무슨 택시야? 애초 우리가 여행할려고 했던 올드시티로 간다는 이야기잖아. 괜찮아 졌어. 버스에서 내리고 잠시 쉬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구경하면서.......... 빨간 적십자 마크가 보이겠지 뭐.'
헐........ 방금 전 버스 안에서 죽어가던 사람 맞나?
젊은 순경이 가리켰던 방향으로 서스럼없이 앞서 걸어나간다.
'어? 말짱하네?'
가다가 쉬다가 하면서 20여분을 걸었을까?
올드 시티의 알카사르 성벽이 보이는 앞에서 마침내 노란색 건물에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병원 건물을 찾아냈다.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분에게........ 댕큐유.'
'코르도바 적십자 병원(Cruz Roja Espanola Hospital de Cordoba)'
이 병원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크게 의미가 있고 유래가 깊은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위 사진 중에 있는 금발의 5십대 초반 의사선생님이 그렇게 유명한 능력자이신줄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병원은 스페인은 물론 온 유럽에서도 아주 유명한 병원이다.
중세시대 온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종교 기관의 도움을 받아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헌신적으로 적극 참여하여 페스트 퇴치에 크게 공헌한 병원으로 너무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 병원 응급실로 다짜고짜 찾아가서 여권을 꺼내들고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안절부절 접수를 해야했던 내 심정도 챠밍여사는 잘 알지 못할것이다.
응급실 접수창고의 여직원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자 잠시 뒤에 사무실에서 남자 직원이 나와서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 접수를 마쳤다. 그리고 그 남자 직원은 우리가 병원을 나설때까지 창구를 지켜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주 커다란 감사한 배려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훤칠한 키에 하얀 가운을 걸치 오십대 초반쯤의 금발 여성이 나타나서는 담당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괜찮다는데도 굳이 남자 간호사를 딸려 휠체어에 태워서는 자신의 진료실로 안내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의사 선생님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유창하신데....... 영어를 거의 못하신단다.
헐!!!!!!!!!!!!!!!!!!!!!!!!!!!!!!!!!!!!!
로밍 서비스가 되는 챠밍여사의 핸디폰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장문의 증상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리고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어로 번역을 한 뒤 의사선생님 앞에 내밀었다. 그녀가 어찌나 집중을 하고 세세하게 살펴보는지 앞에선 나도 놀랐다. 중간에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되물어 보는것은 아마도......... 번역기라는 것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 마주보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만큼은......... 통역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읽기를 마친 그녀가 챠밍여사를 진찰대에 눞히고는 청진기와 손을 이요해 진료를 하기 시작했다. 진료 시간은 의외로 짧았다.
진료를 마치고 컴퓨터 앞 책상에 앉은 의사가 나를 바라보며 뭐라고 뭐라고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서툰 영어로 이런저런 우선 급한것부터 질문을 해본다. 그러다가 우린 마주보고 웃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아주 짧게 되물었다.
'아내의 증상이 큰 트러블인지 작은 트러블인가요? 그것이 우선 제일 궁금해요?'
그녀가 나의 이 말은 이해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과 인지손가락으로 작은 틈새를 만들어 보여준다.
휴~~~~~~~ 별거 아니라는 재스쳐가 아닌가? 그제서야 나도 챠밍여사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 우아하고 친절한 여자 의사선생님의 이름은 '소니아(Sonia)'다.
소니아가 자신의 컴퓨터에 아까 나만큼 장문의 글을 스페인어로 작성하더니 번역기를 통해 영어로 나에게 모니터를 돌려 보여준다.
짤막짤막한 단문으로 된 번역문은 대충 이해하겠는데...... 전문적인 의학용어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한국어 번역기가 없다면서 또 웃는다)
그래도 문장 중에..... Norovirus. Campylobacter. Salmonella 등등의 내가 알만한 단어들이 들어가 있었다.
'아하. 이사람 지금 식중독에 걸렸구나........ ㅎㅎㅎㅎ'
소니아는 그 중에 캠필로박터를 계속 가리키면서 이야기를 했다. 역시 톨레도의 오징어먹물 빠에야에 문제가 있었던것 같다.
소니아는 챠밍여사가 좀 쉬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중이고 오늘 안으로 세비야에 가야만 한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1시간에서 1시간반이면 되겠다고 한다. 그건 충분하다고 답했다.
간호사가 들어와 휠체어를 글고는 침대와 안락의자가 있는 장소로 데려갔다. 챠밍여사가 안락의자를 택했다. 링게르 주사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링게르에 주사기를 통해 약이 처방되었고 간호가가 옆에 서 있는데도 치료를 안하고 마냥 기다린다.(참 특이했다)
잠시 지나 소니아가 와서는 직접 챠밍여사의 팔뚝에 주사바늘을 꼽고는 수액이 나오도록 조치를 해준다. 다시 오겠다면 소니아가 사라졌다. 간호사는 수시로 드나들고 40분쯤 지나 소니아가 와서는 뻐근하거나 이사없느냐고 묻고는 수액의 량을 조절해 주고는 다시 사라진다. 한시간이 좀 지나서 링겔 주사가 긑나갔다. 내가 간호사를 불러왔는데 멀둥히 쳐다보기만 할 뿐 주사가 끝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내가 바늘을 빼야하지 않느냐고 물어도.....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한다. 잠시 뒤에 소니아가 나타나서는 직접 바늘을 뺀다.(스페인에서는 간호사는 보조자일 뿐, 모든 직접적 치료 행위는 의사가 직접한다)
좀 더 앉아서 이대로 안정을 취하라고 하고는 소니아가 또 사라진다.(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너무 다르다. 사뭇 신기할 정도이다)
한참을 기다리다 접수창구로 가서 기다려주던 남자 직원에서 치료비 계산을 하겠다고 했는데........ 이 병원에서는 진료나 치료비 수납도 의사 선생님이 직접한단다.(세상에 이럴수가........ 의대 나와서 치료만 하는게 아니라 치료비 징수도 직접한다고?)
좀 더 앉아서 기다리니 아니나 다를까? 소니아 닥터가 직접 나와서 지금의 커디션을 물어보고는 다시 자신의 치료실로 데리고 간다.
'치료는 제대로 된것으로 판단된다. 처방전을 써 줄테이니 스페인의 아무 약국에나 가면 5일치 분의 약을 줄것이다. 그 약은 1일분을 약 1리터 이상의 물에 타서 흔들어 수시로 마시면 된다. 물은 많이 마실수록 좋다. 오늘이 지나면 어느정도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지만 약을 혼합한 물은 적어도 이삼일은 꼭 복용하도록 주의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니아가 그녀의 컴퓨터 모니터에 어떤 영수증 화면을 켜더니 거기에 적힌 아라비아 숫자를 나에게 보여준다.
'54.50유로.' 당시 환율로 우리나라 화페로 환산하면 약 6만8천원 정도 되는 진료비와 치료비 합계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느냐?' 고 내게 물어 온다.
'아무런 문제 없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답했다.
이게 아마도 스페인 적십자 병원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마도 진료나 치료를 받으러 오는 서민이나 소외계층을 배려해서 의사의 재량으로 어느정도 그 비용을 차등적용하는 권한을 담당의사가 가진것으로 보여졌다.
복지선진국인 스페인에서 의료보험 적용이 안되는 여행자의 신분으로........ 진료와 치료와 처방전을 받아들고 7만원 정도라면(약값이 약 4천원).......
여행자에겐 지옥이나 다름없는 몇몇 서유럽의 선진국이 있다. 응급상황의 간단한 응급조치와 치료로 수십만원에서 백만원을 훨 초과하는 청구서를 발행하는, 실로 자유여행자들이 감당하기 뻐거운........ 알면 죽어도 병원행을 피하고 민간요법으로 참고 버텨야 하는 몇몇 나라가 인근에 있다.
이곳으로 안내해 준 젊은 경찰과, 접수를 편하게 해 준 남자 직원과 뭐니뭐니 해도 닥터 소니아에게 한없이 감사할 따름이다.
이날 이곳에서의 지극히 감사한 치료가 아니었으면........ 우리의 여행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응급실을 나와 병원의 후문을 나설때 까지 소니아와 병원 직원들이 우리 두사람을 배웅해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날 우리가 격었던 일은...... 아마도 평생 잊지못할것 같다. 언젠가 코르도바에 다시 간다면 꼭 찾아가 감사인사를 다시 드리리라.
코르도바 적십자 병원을 나서면 그 앞이 바로 알카사르(궁전. 성채)의 정문앞이다.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가 벌어졌을 때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이 머물면서 군대를 진두지휘하던 장소이다. 그런가하면 레콩키스타 이후 이단자로 낙인찍힌 반카톨릭분자들을 체포해서 심문한던 감옥이었다. 혹독한 심문이 끝나면 광장에 끌어내 종교재판의 형식으로 사형에 처하거나 화형에 처했다.
분수가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너무도 유명하지만 기실 그 내막에는 참혹한 종교적 인종청소의 아픔이 서려있는 장소이다.
그 알카사르의 정문 광장에 거다란 청동상이 하나 서 있다.
코르도바 출신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최고 정치권력자의 한사람이었던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동상이다.
폭군 네로의 스승이기도 했으며, 로마 최고의 권력 서열 최고위에 머물렀던 세네카는 결국 민중 혁명을 통해 네로 일파를 몰아내고 새롭게 등극한 신진 권력들에게 밀려나 은연자중하던 중, 종국엔 정적들에게 자살을 종용받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기케로.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로마를 대표하는 스토아파 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코르도바가 자랑하는 문학가인 것이다.
그는 생전에 여러 작품을 통해 많은 명언을 남긴것으로도 유명하다.
어쩜 이렇게 구구절절 멋진 말씀을 그토록 많이 남기셨는지.........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하며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는 무엇을 말하는 것보다 무엇을 말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진실은 진실된 행위를 통해 전달된다.'
'민중을 따르기만 하면 민중과 함께 망할 것이고 민중을 거스르면 민중에게 망할 것이다.'
'가난하다는 말은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생은 짧은 이야기와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가 아니라, 가치다.'
'설사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고 해도 가치 있는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세네카 동상을 올려다 보면서 벤치에 앉아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 챠밍여사가 작심한듯 명언을 한마디 남겼다.
'일단 집을 떠나왔으면 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중도에 멈추면 아예 집을 떠나오지 않안던것만도 못하다. 그러니 나를 따라라.ㅎ
헐
크크.
병원을 나오자마자 우선 약국을 찾았다.
처방전을 제시하니 나오는것이 영 한국과는 딴판이다. 느낀대로 표현하자면...... 24시간 편의점에서 얼음에 혹은 뜨거운 물에 타먹게끔 만들어놓은 다양한 커피 분말봉지 처럼 생긴것을 다섯봉지 내어준다. 커다란 물병에다 타서 흔들어 자주 마시면 된단다.(이게 다야? 서너가지 알약 같은 진짜 약을 빼먹으면 어떻게해? 착오 생긴거 아냐?)
근데 착오가 아니다. 정말로 그게 다다.
스페인에서는 항생제를 비롯한 실질적 처방은 오직 병원에서 의사의 주도하에만 가능하다. 약국 어디에서도 우리나라에 흔한 알약 같이 직접 효과를 내는 처방이나 치료는 전혀 없다. 모든 처방은 이렇게 분말가루처럼 생겨서 대부분 물에 타서 마시는것이 전부다.
이제 쬐끔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 사람 외국가서 감기약 처방 받으면 전혀 기별인 안간다던 이야기가....... 반면 서양의 거대한 격투기 선수도 한국에 와서 감기약 한봉지 먹고나면 그방 쓰러져 기절한다던 그 이야기가 이제사 실감이 난다.
약국을 나오자 마자 바르에서 생수를 한병 샀다. 1리터가 안되기에 물에다 처방된 약을 절반 넣고 흔들었다. 노랑과 주황의 중간정도 색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챠밍여사가 약을 먹어볼 차례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병원의 처방전에 의한 스페인식 식중독 약을 입에 한모금 물었는데.......
아. 글쎄 그것이..........
그 처방약이라는 것이...........
'에게게게. 완전히 환타야. 환타........... 세상에 이런 일이..........'
그래서 나도 한모금 먹어 봤다. 레몬과 오렌지를 섞어 놓은 영락없는 환타였다.
이후로 우리는 갈증이 나면 차가운 생수를 사서는 처방약을 타고는 환타로 제조해서는 같이 나누어 마시면서 다녔다.
오.마.이.갓.
'어디간다고 했지? 코르도바에서는?'
'여기부터가 옛날 왕궁이 있던 알카사르야. 주변의 좁은 골목길에 하얀 벽들과 꽃화분이 주렁주렁 매달린 유대인 마을이 유명하고........'
'그러니까 어디로 가야 하는거냐고? 시방.'
'저기 저 아래쪽 성문이 유대인 거리로 가는 성문일껄? 아마도........'
한낮의 더위가 시작되었는데........ 챠밍여사가 전혀 망설임 없이 세네카 동상을 지나서 아래쪽의 알카사르 문을 향해 걸어간다.
마치 언제 아팠었느냐는 듯 쌩생하게 걸어간다.
'병원에서 나온지 얼마 되었다고? 쉬면서 우선 뭘 좀 먹든가 해야지?'
'다 나았어.'
챠밍여사가 이처럼 발걸음을 서두는 이유를 나는 충분히 알고 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스페인에는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세비야 대성당' 그리고 '코르도바 메스키타'에 대해서 귀가 따갑도록 열심히 설명을 해왔던 때문이다. 그런데 부득이 하게 코르도바를 세비야로 가는 여정 중에 한나절 들리기로만 계획을 조정했던 것이다. 코르도바에 볼 것이 많이 있고 적어도 한 이틀을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을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식중독으로 인하여 그나마 겨우 할애했던 한나절의 시간중에 세시간 이상을 병원에서 소요해 버렸던 때문이다.
남은 시간에 최대한 코르도바의 한가지라도 더 보고 떠나야하겠다는 그녀의 속마음이 그대로 들러나고 있었다.
'이러다 식중독에서 겨우 벗어나니까 다시 몸살로 쓰러지는거 아냐?'
그래도 유대인 거리의 좁은 골목길을 잘도 빠져나간다.
메스키타가 건너다 보이는 대로에 나와서 모녀가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바이얼린 버스킹을 잠시 감상하면서 쉬었다. 코르도바의 핵심인 '메스키타'에 다왔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가 보다.
이쯤에서 나는 나의 여행기를 통해 '코르도바'를 돌아보시는 분들에게 한가지 꼭 알려드리고픈 이야기가 있다.
게재된 코르도바의 사진들을 살펴보자면 여기저기 골목골목에 아무렇게나 사방으로 내걸려 있는 가로등 모습이 눈에 띄실것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가로등 중에서 그래도 여기 코르도바의 가로등은 나름 아주 소중한 재산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꼭 기억하셔서 마음에 담아주시고, 언제고 직접 코르도바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곳의 가로등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져주십사하고 이야기 드리고 싶다.
신도시의 넓은 광장이나 공원, 아니면 길가의 높은 가로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올드 시티의 꾸불꾸불 좁은 골목길에 내걸린 볼품없어 보이는 소박한 가로등을 말한다. 전봇대에 내걸린 가로등이 아니다. 누군가의 담벼락과 누군가의 건물 창문 옆에 매달듯 겨우 내걸린 가로등이다.
대도시의 도로변이나 동네 공터 전봇대 위에 휘앙찬란하게 내걸린 가로등은 도시계획의 일부이다.
하지만 코르도바의 가로등은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유대 경전 '탈무드'에 나오는 '어두운 밤길에 호롱불을 밝히고 길을 가는 소경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으실 것이다. 그것은 숭고한 배려의 산물이다.
내가 가는 밤길을 위해서는 작은 막대에 내걸린 호롱불이나 손전등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코르도바의 좁은 골목에 담벼락 주인이나 창문의 주인이 해가 지면 의례이 나와서 촛불에 불을 붙여 호롱(가로등)에 넣어 두고 아침이면 나와서 촛불을 껐다. 자기집 식구가 이미 모두 돌아왔어도 골목에 불을 밝혀 두었다. 유럽에 처음으로 가로등이 생긴 것이다. 이곳 코르도바에서.
이는 유럽의 여타 대도시들인 런던. 파리. 로마. 프라하. 부다페스트. 비인 등을 포함한 모든 유럽의 도시들보다 700년이나 앞서서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사랑', 그리고 이슬람교의 '평화'. 그 내면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더 소중하게 깊이 새겨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건 정말로 아니다. 종교와 신앙을 떠나서 이것은 정말로 옳지 못한것 같아. 설혹 기독교가 지금의 이 훼손시킨 부분을 보다 휘앙찬란하고 아름답고 멋지게 꾸며 놓았다고 쳐도........ 이것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어. 적어도 지금은. 과도하게 치장된 기독교식 유산 보다는 단순하고도 우아한........ 아니 그런 표현 이전에 애초의 모습대로 그게 이슬람 식이었던 아니던간에 있는 그대로 두었어야 한다고 봐. 제대로 상상 할 수도 없겠지만........ 세월의 때가 묻었다고는 쳐도 애초의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거듭 말하지만 이건 종교나 산앙심에 관계없이........ 기독교(스페인 카톨릭)가 크게 잘못한거야.'
일상의 생활속에서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표현이 챠밍여사의 입에서 마구 튀어 나왔다.
순수신앙적 성경 원리주의자인 챠밍여사에게 내가 저런 표현을 쓴다면 벌써 '불경' 또는 '오만함' 이라는 지적이 벌써 여러번 튀어 나왔을 것이다.
애통함을 넘어서 어느정도 분통이 터지는 모습이다.
'코르도바 메스키타'의 외부 성벽을 따라 돌다가.......... 스페인의 카톨릭이 이슬람 사원이었던 메스키타를 성당으로 개조하면서 본래에 네군데에 설치되었던 커다란 출입문을 안쪽에서 벽돌로 막아버리고 일부를 기독교식으로 치장해 버린 현장을 바라보면서 내뱉은 표현들이다.
나의 조언을 통해 메스키타에 대해서, 또는 톨레도 여행에서 이미 겅혐했듯이 레콩키스타 이후에 대부분의 이슬람 사원을 교회로 개축하면서 저지른 만행하며, 그 여파를 곳곳에서 느끼며 여기까지 왔던 때문이기도 했다.
어디 이곳 메스키타 뿐인가?
안달루시아 지방의 교회 대부분이 그런 악행의 결과물들이 아니었던가?
교회 뿐인가? 안달루시아 지방의 옛도시들이 대부분 그런 불합리한 어긋난 역사의 부산물일테니까 말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분에게 여쭙고 싶다.
'저들이 그 숱한 파행과 만행속에 당신에게 바친 찬양과 영광을......... 기쁘게 받으셨습니까?'
'이제라도 분명하게 대답을 해 주셔야 합니다. 제발요..........'
메스키타 중에서 처음 이슬람 사람들에 의해서 지어진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자 유일한 출입 통로인 '종려의 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간다.
이 얼마나 간절하게 고대했던 순간이었던가.
유럽의 영토에 피어난 영원한 이슬람의 꽃이여!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첫 이슬람 왕국을 세웠던 '야브드 알 라흐만 1세'는 자신의 왕국에 '알 안달루스(Al- Andalus)'란 이름을 선물했다.
알 - 안달루스란 '기후는 시리아 처럼 온화하고 땅은 예맨처럼 비옥하며, 꽃이나 향신료는 인도처럼 풍부하고 보석은 중국처럼 넘쳐나며, 해안은 아덴(예맨의 항구도시)만큼 닺을 내리기에 편리하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느냐'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마침내....... 메스키타가 내 가슴속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850개나 되는 발발굽 모양의 아치형 기둥은 웅장한 사원에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중량을 분산시키고 천장을 더욱 높게 보이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이곳만의 아주 독창적인 이중의(2층) 아치에 새겨진 적색과 백색의 문양은 얼핏 채색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배색과 적색의 벽돌을 교차적으로 짜맞춘 것이다.
한쪽 구석으로는 이슬람교드들의 기도실인 '미랍(Mihrab)'이 화려하고 정교한 무데히르 양식의 전형적인 미를 뽐내면서 버젖이 자리를 차지하고 '코란' 복사본도 놓여져 있다. 하지만 이 미랍은 원형이 아니다. 이슬람의 전통 미랍은 메카를 향해서 정방향으로 서 있고, 죄우 대칭을 이루어야 하는 원칙에서 어느정도 벗어나 있다. 교회로 개축한 이후에 마지못해 옛모습을 복원해 놓은 다분히 상징적인 모습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전형적인 모스크(이슬람 사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메스키타'란 바로 이슬람 사원을 가리키는 '모스크'를 스페인 식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특이하게도 이 거대한 메스키타(모스크) 중앙에는 카데드랄(카톨릭 대성당)이 웅장한 자태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좀처럼 보기드문...... 아니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과 카톨릭이 한 건물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다.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양대 종교의 거룩한 행위의 발로일까?
어처구니 없는 역사의 해프닝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1523년 코르도바의 대주교가 스페인 왕이었던 정복자 카알 5세(카를로스 1세)에게 서신을 띄어 허락을 구했다.
'코르도바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대한 이슬람 사원(모스크)이 있습니다. 이 건물이 그대로 온전한 이상 사방에서 이 건물을 바라보는 이슬람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알라신에 대한 믿음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역사적인 도시에는 아직 변변한 카데르랄(대성당)이 없사옵니다. 왕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이슬람 사원을 교회로 재건축 하여서 레콩키스타를 통해 이룩한 위대한 카톨릭의 승리를 기념하는 대성당을 짓겠습니다.'
카톨릭에 의한 국토회복운동의 승리를 기념하는 대성당을 짓기 위하여 이슬람 사원 하나를 허물겠다는 대주교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카알 5세에게는 없었다. 그는 허락했다.
카테드랄(대성당)이 완공되고 기념 축성식 행사에 초대된 왕(카알 5세)은 그만 땅을 치며 후회하고 말았다.
그는 이미 이탈리아 전쟁에 참여하면서 모든 유럽의 이름난 교회와 위대한 건축물들을 대부분 둘러보고 난 왕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메스키타 한복판에 휘앙찬란하도록 요란하게 치장된 교회 보다도 주변에 남겨져 있는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에 더 눈길이 쏠렸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탄식 가득찬 음성으로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고 말았다.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이로고........ 진즉이 내가 이곳을 다녀가 본적이 없어서 윤허를 했으니 내 불찰 또한 없다하지 못하겠으나........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그 흔한것 하나(교회)를 만들자고, 이 세상 어디에도 다시는 없을 귀한것(모스크)를 훼손한단 말인가? 모든것이 다 부질없음이렸다............'
내 시선에도 이곳은 엄연하고도 완전한 이슬람 사원이다. 이슬람 사원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과도하게 치장되고 억지로 끄며 넣은듯한 기독교식 교회가 당연히 불합리하고 거치장 스럽게 느껴질 뿐..........
혹여, 많은 기독교인 시각에서는 이곳이 교회로 느껴지고 주변의 이슬람 양식이 눈에 거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니여. 심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의 수치이고 기독교의 오만함에 상징이여. 여기는 누가 보아도 이슬람 사원이여. 종교가 어떻고 당장의 신앙이 어떻고가 문제가 아니여. 이건 종교인 이전에 인간 본연의 양심과 가치관에 관한 문제여. 만약에 이곳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의미들을 모두 철거하고 초기의 본래 이슬람 건축물로 되돌리면 어떻겠냐고 누가 물어오면 나는 쌍수를 들고 뛰쳐나가 찬성할거여. 공사비도 능력껏 부담할것이여.'
'태리 할망구야. 당신 그러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거 아니니?'
'그런 종교적 이유때문이 아니라니까? 딱히 찝어서 설명할 수 없는........ 그런거 있잖아?'
챠밍여사. 이 사람....... 반쯤 여행에 미친넘하고 오래 살다보니까......... 많이 변했다........... 헐..........
'코르도바 메스키타'의 진정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느껴보려면 사전에 어느정도의 소양(교양)이 필요하다고 본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전문적인 용어들이 다소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리를 이끌고 길을 안내하면서 학습식으로 열거하는 가이드들의 설명만으로는 세세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그냥 본래는 이슬람 사원이었는데, 스페인이 국토를 회복한 후 교회로 개축하는 과정에서 모두 때려부수지 못하고 중심부에 커다란 교회를 지었대. 그 결과로 카톨릭과 이슬람이라는 양대 종교가 공생하는 아주 특별한 곳이라네' 라는 정도가 충분하다면, 그 이상은 나로서도 당연하게 권하지 않겠다.
하지만 함께 알함브라 궁전에 가보기 전에 과연 '이슬람 건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슬람 양식이 도대체 무엇인지'가 궁금하다면 비교적 간단하고 간략하게 용어를 설명하면서(나도 다시 한번 더 공부를 해보는 생각으로) 나름 요약을 해보고자 함이다. 최대한 아주 간략하게 말이다.
<코르도바 메스키타>
대부분 이슬람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자 특징 처럼 코르도바 메스키타(이후 모스크) 또한 '측랑은 모두 키블라 쪽'으로 정해져 있다.
여기에서 '측랑'은 길게 늘어선 열주(기둥)들로 인해서 생겨나는 '길고 너른 공간'을 뜻하며, '키블라'는 이슬람 신자들이 엎드려 기도하는 방향을 의미하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우디 아라비아의 수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780년 아브드 알라흐만 1세에 의해서 처음 착공 완공된 코르도바 모스크는 서기 961년 부터 5년에 걸친 공사로 다시 축랑을 연장하였다. 20년 후, 다시 모스크의 확장을 필요로 하게되자, 남쪽 벽면이 강기슭에 닿게되어 정사각형의 확장이 불가능하게 되자 동쪽으로 8개의 측랑을 추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부득이 좌우 대칭의 기본 원칙은 무너졌으나, 모든 측랑의 방향이 메카를 향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은 지켜지게 되었다.
이처럼 이슬람의 건축에는 꼭 지켜야 하는 원형적인 틀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코르도바처럼 부득히 한 경우에는 이를 타개하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약간의 융통성을 통해서 모스크는 처음에 비해서 4배나 큰 성소를 가질 수 있게 된것이다.
모스크의 안쪽으로 들어가서 처음 느껴지는 감정은 끝이 보이지 않는 기둥들의 숲에 가로막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이내 그 기둥들이 길게 도열해서 우리들의 시선을 길게 늘어선 측랑을 따라 (메카가 어디 방향에 있는지를) 친절하게 안내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될 것이다.
말발굽의 편자 같은 모양을 띤 아래쪽의 아치는 당시의 이슬람 건축에서는 좀처럼 드문, 앞서 이곳을 지배한 서고트 양식의 독특한 특징이었으나, 이제 이 모스크에서 비로소 이슬람 건축에 당당하게 쓰여졌던 것이다. 로마 건축에서 처음 등장한 아아치는 이곳에서도 역시 짧고 가는 원주위에 놓여져 있다. 하지만 이곳의 아치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2층의 아치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떠 안고 있는 형상인것이다.
그동안 보아왔던 단층 아치의 기둥들이 전해주는 느낌보다 훨씬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보는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준다.
미랍 북쪽의 온통 빼곡히 기둥들이 늘어선 가운데로 커다란 궁륭(아아치의 지붕이나 천장형태)으로 덮인 공간이 나오는데 (카필라 데 빌라비시오사)라고 한다. 모스크의 2차 증축 과정에서 만든 것인데, 복잡한 기교로 장식된 마치 스크린을 짜듯이 맞추어진 3층의 오옆(五葉) 모양의 아치는 극한의 아름다움을 선사해 준다. 천장을 마치 벌집 모양의 여러 작은 공간으로 미묘하게 분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장소(카필라 데 빌라비시오)를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 무어인들만의 너무도 독특한 건축양식이 곧 리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영토였던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보다 원숙해진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슬람만의 독특한 양식 위에서 또는 그 연장 선상에서 조금은 탐구하듯이, 조금은 연구하듯이 가만히 살펴보노라면 그 아름다움은 배가 되리라.
이제, 모스크 한복판에 만들어진 카테드랄(대성당)을 둘러 볼 차례이다.
하지만, 카알 5세의 말씀을 예로 들어서....... 이곳에서 코르도바 대성당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을 사양하고 싶다.
대신 카테드랄(대성당)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세비야의 대성당' 이야기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로 하겠다.
누가 뭐라해도 이곳은 신성했어야 할 이슬람 사원이다.
참으로 많은것이...... 너무도 아쉬운 시간이었다. 코르도바에 피어난 영원한 이슬람의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여..........
그들은 아무런 장식이나 치장 없이도....... 기호와 도형의 문양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아주 오래된........ 대학때 끄적이던 습작노트에 적어 놓았던 우리말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한참을 찾아보았다.
(끄렁)과 (끌텅).
아마도 티비에 방송되는 (우리말 겨루기) 프로에 나오는 분들 정도는 되어야 이 낱말의 속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실까......
그래서 요즘의 국어 사전을 찾아 보았다.
끄렁 : 그루터기(풀이나 나무 따위의 아랫동아리)를 가리키는 충북지방의 방언.
끌텅 : 나무의 그루터기나 배추의 뿌리 따위에 깊이 밖여 있는 부분을 이르는 말. 경기 전남 지방의 방언.(옹이)
하지만 옛 어른들은 실제로 이 말을 자주 사용했었다고 한다.
위 사전의 해설과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습작 노트에 적혀있는 주석과 옛 어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현재의 사전에 언급된 내용과는 그 의미나 사용처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고급스런 옛 맛이 모두 사라진 느낌이랄까?)
베인 후 쉬 썩고 말라 버리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베이고도 몇년 동안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나무나 나무 뿌리가 있다. 이 차이를 바로 '끄렁'과 '끌텅'이라 달리 부른다.
대분의 활엽수는 쉽게 썩어서 '끄렁'이 되며 주로 땔감으로 쓰인다.
하지만 소나무는 '끌텅'이 되어서 복령을 키우고 호박(琥珀)을 낳는다.
소나무의 진기가 땅속에서 천년을 묵으면 복령이 되고, 복령이 또 천년을 묵으면 그제서야 호박이 된다고 했다. 결국 '글텅'이 있어야 빛나는 보석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와 카테드랄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메스키타를 만든 숭고한 정신이 바로 끌텅 이라고..............'
메스키타를 나와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스케줄을 점검해야만 했다.
아직 돌아보고 싶은 곳은 많이 남아 있는데, 우리에겐 코르도바에서의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그리이스 신전 터를 보고 로마의 신전이 있던 자리를 지나 우선 '로마 다리(Puente Romano)'로 갔다.
로마 아우쿠스투스 황제 재위 시절인 제국의 최전성기에 만들어진 다리였지만,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전쟁때마다 파괴와 복구가 뒤따랐던 코르도바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이자 얼룩진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다리를 건너며 로마의 향기가 바람결에 전해져 온다.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이 로마 다리를 지키기 위하여 건너편에 세워진 '칼라오라 탑'에 올라서 명성이 자자한 일몰을 보았으련만....... 다리 건너편에서 발레를 공부하는 천진난만한 햇병아리 발레리나들을 한참동안 바라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을 받은 기분이다. 우리 손녀 태리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다리를 다시 건너와 유대인 거리에서 아주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는 다시 기운을 내서 골목길을 한바퀴 돌아서 돈키호테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코르도바의 중심 포트로 광장으로 향했다.
유대인 거리를 나와 코르도바의 번화가를 거닐다보면 금방 포트로 광장에 이르게 된다.
'망아지'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광장은 그 이름에서 연상되듯이 '세르반테스'로 인해서 유명해진 장소이다.
이 광장의 한쪽에 바로 '세르반테가 자주 묵어서 유명해진 '포트로 여관'이 현재에도 운영중이다. 세르반테스는 이 여관을 이용하던 시기에 '돈키호테'를 집필했고, 실제로 소설 속에서 돈키호테와 판초가 머물렀던 여인숙으로 등장한다.
그런만큼 이 광장 주변의 몇몇 최신식 고층건물을 제외하면, 마을의 전체 분위기는 여전히 고즈넉한 17세기 풍의 분위기가 가득하다.
하지만 시원하게 분수가 뿜어져 올라오고 있는 이 광장을 내가 찾은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엘 시드랑 쌍벽)
스페인 기사도의 상징.
코르도바의 진정한 영웅을 만나고자 함 이었다. 스페인 역사를 어느 정도 잘 알지 않고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산탄젤로와 테라노바의 공작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Don 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 Duke of Terranova and Santangelo)'는 모든 스페인 사람들, 특히 남성들로 부터 영원한 추앙을 받고있는 스페인의 진정한 영웅이다.
스페인의 기사이자 장군인 그를 역사서는 대장군(엘 그란 카피탄, El Gran Capitán ("The Great Captain"))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세 이후의 전투 기술 중에서 적은 병사로 절대 다수의 군대를 상대로 최적의 화력으로 무찌르는 '참호전'을 최초 개발한 전략 전술가 이기도 하다.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힘들게 성장한 그는 한때 성직자의 길을 걷기도 하였으나 끝내는 군인의 길을 택했다.
남다른 용맹함과 군인적 기질을 타고났지만 주위의 누구도 그를 지지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운명처럼 그는 평생 그가 섬겨야 할 위대한 군주를 만나게 되었다.
스페인은 한참 레콩키스타(카톨릭에 의한 국토 회복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여기저기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연이어 올라오는 보고서에서 위대한 군주 이사벨 여왕은 한 장교의 무용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계급은 장교였지만 탁월한 식견과 기지로 장군들을 능가하는 활약상을 보이고 있는 곤살로 페르난데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 누구도 곤살로를 칭찬하거나 천거하지 않았다. 심지어 남편 페르디난도 왕 마저도 일개 젊은 병사의 치기로 폄하하기도 하였다.
그라나다 탈환 전쟁이 시작되었다.
페르디난도 왕이 최전선에서 분투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지극히 열악했다. 여왕은 친히 최전선으로 출병을 준비했다.
그때 여왕이 곤살로를 불러 들였다. 파격적인 승진을 해서 여왕의 호위 대장이 된것이다. 주변으로 부터 시기와 질투의 화살이 날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묵묵히 침묵속에 여왕을 호위하며 따랐다. 그라나다 최전에 도착한 여왕이 직접 전황을 살피러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나갔다가 그만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갔던 이유로 매복하고 있던 절대다수의 이슬람 군대가 여왕의 소수 군대를 기습해 왔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스페인에 불어닥친 것이다. 레콩키스타는 이사벨에 의해서 시작되고 끝을 맺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중도에 빗나갈 수 있는 상황을 맞딱뜨린 것이다. 포위망을 좁혀 오다가 일제히 돌진해 오는 이슬람 군대의 정면으로 한 기사가 맹렬히 돌진해 갔다. 단칼에 앞장서던 적장을 베어버린 기사는 종힝무진 적진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며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삼국지의 조자룡이 오십만의 위나라 군대를 상대로 종횡무진 휩쓸고 다닐 때 이를 보고 놀란 조조가 누구냐고 묻자 모두가 단번에 상산의 조자룡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후로 엄청난 무용담에는 항상 '조자룡이 헌창 쓰듯 한다'는 비유가 따라 다닌다. 만약 그가 새창을 썼더라면 조조는 어쩌면......
그랬다. 곤살로가 조자룡 못지않은 엄청난 무용을 기적처럼 펼쳐내고 이사벨 여왕을 무사히 구출해 냈던 것이다. 그러자 그제서야 모든 사람들이 곤살로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이후로........ 이사벨 여왕의 모든 기록에........ 모든 그림에....... 모든 조각상에....... 이사벨 여왕이 등장하는 곳에는 언제나..... 항상 곤살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군인이나 당당한 기사로...... 아니면 여왕의 말고삐를 잡고 있는 안내자이자 호위 무사로......... 여왕이 있는곳에 곤살로가 있고....... 곤살로가 있는 근처에는 여왕이 있다.
곤살로에 대한 여왕의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여왕에 대한 그의 충성도 절대적이었다.
초기 이탈리아 전쟁이 벌어지자 여왕은 처음 그를 멀리 떠나 보낸다. 이탈리아 원정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사이자 영원한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원정에서도 크게 공을 세운다.
곤살로가 나이가 들자...... 여왕은 그를 기후가 좋은 이탈리아 나폴리 총독에 임명한다. 그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었다.
한동안 그는 나폴리에서 비교적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이사벨 여왕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던 정적들이 온갖 모함을 걸어왔다. 심지어 여왕의 남편이었던 페르디난도 왕 마저도 '아내인 이사벨 여왕과 곤살로의 사이를 의심(?)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만다. 페르디난도 왕은 곤살로의 직위를 박탈하고...... 이후로 단 한번도 그를 다시 불러주지 않았다.
평생을 군주를 위한 충절과 기사도로써 살아왔던 곤살로는 한적한 시골에서 적막하게 살다가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아사벨 여왕에게 곤살로는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하면 곤살로에게 이사벨 여왕은 또 어떤 존재였을까?
그들은 현세에서는 연인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더 뜨겁게 사랑하던 사이는 아니었을까?
왜냐면?
기사도 라는 것이 애초 그런 관계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벨 여왕의 기록화나 전해지는 이야기나 조각상 가지 보고 있자니......... 내가 페르디난도라도 속이 메스껍고 눈이 확 뒤집힐만 하겠구만..........
부랴부랴 터미널로 되돌아 갔다.
서둘러 배낭과 캐리어를 되찾았다. 코인 락커가 막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다.
구내 매점에서 나는 빵과 생맥주를....... 챠밍여사는 빵 반조각에 스페인산 특수 환타를 들고 허기진 배를 겨우 달래본다.
노곤노곤 피;로가 엄습해올 즈음에 정확하게 세비야로 가는 막차가 당도했다.
예정시간 2시간 반인 세비야 노선을 오늘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3시간을 넘겨서야 겨우 세비야 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주변은 이미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의 저녁 무렵을 연상하면 절대로...... 절대로 오산이다.
스페인에서는 아홉시 반은 되어야 해가 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니 해가 완전히 졌다고 하면....... 거의 열시 반이 가까운 시간이 되는 것이다.
세비야에 예약한 숙소는 사실은 버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챠밍 여사에게 온통 신경이 쏠렸음인가? 오늘 일정을 다소 무리했음인가?
깜빡 핸디폰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 나의 여행 이력서에서 처음있는 분실 사태)
죽어라 되쫓아 가니 막 청소를 끝내고 버스가 차고지로 출발하려는 순간........ 휴. 십년 감수 했다.
그리고 나서 온통 고불고불 골목길 연속인 숙소를 찾아 가는 길......... 로밍 서비스는 챠밍여사 핸디폰이 되어 있는데....... 스페인 핸디폰 연결망과, 로밍되는 한국 핸디폰의 연결망이 차원이 확 다르게 나타난다. 대한민국이 IT 최첨단 국가가 아닌가?
내비를 켜고 잘 가고 있는데....... 계속 줄어들던 시간이 확 늘어난다. 왼쪽 오른쪽 잘도 안내하던 내비가 갑자기 미쳤는지 한참 전에 지났던 곳으로 되돌아 가라고 알려 온다. 미친다. 분통이 치밀어 오른다. '느그들 내 승질 머리 몰라서 이러는 거야? 시방?'
안되겠다 싶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주소를 보여주고 도움을 청한다.
역시 그도 핸디폰을 꺼내서 구글 맾을 불러냈는데....... 아뿔싸........ 나를 화나게 한 바로 그 사이트랑 똑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 작동에서 차이가 난다. 스페인 녀석은 척 척 말도 잘 알아듣고 잽싸게 해결책을 내어 놓는데........ 한국산 핸디폰은 완전히 멍텅구리다.(도대체 이유가 뭐여?)
나의 오랜 여행 이력에도 이렇게 길을 찾느라 힘들게 헤매본 기억이 없다. 이날...... 안 믿자니 최첨단 기술력이고, 믿고 움직이면 완전 멍텅구리고.......
자정을 코 앞에 두고서야 겨우 예약한 숙소에 체크 인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무리 속이 상해도........
탈이난 짱구 모친을 병원 신세까지 지면서도 무사히 세비야의 숙소에 도착하게 해주신 높은 분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하루를 갈무리 할 수 밖에........
'그저 모든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멘.'
이제 내일부터는 새롭게 '세비야'다.
--- 다음 여행기는 안달루시아의 중심 세비야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