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르모에 숙소를 정하던 날, 열쇠를 건네주며 나가던 (파비오)가 다시 들어와서는 벽장안에서 작은병에 든 바디샴푸를 선물이라면서 주고 나갔다. 바디샴푸에서는 진한 코코넛 향이 풍겨나왔다. 비누나 샴푸에서 코코넛 향을 맡아보기는 생전 처음있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샤워를 하고 시칠리아를 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면 온 몸에 가득 진한 코코넛 향기가 가득했다. 온종일 걷느라 땀에 젖은채 파김치가 된 몸을 겨우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4층을 오르는 계단에서도 여전히 그 은은한 코코넛 향기는 내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어느새 나는 그 코코넛 향기에 깊게 취해 있었다.
정녕 그 향기가 바디 샴푸에서 나는 냄새가 이니라, '60년 가까이 인생을 살고있는 내 삶의 향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 삶 속에 그런 진한 코코넛 향기 하나쯤 가득 배어있으면 참 좋겠다. (2018년 1월. 팔레르모에서. 피안재)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의 주도(州都) 이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를 이루고 있는 20개의 주(州) 중에서 가장 크며, 남한 면적의 의 약 1/3 정도이고, 제주도의 13배 정도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아주 큰 섬이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유적지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예술과 지중해 특유의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곳이 바로 시칠리아다. 기원전부터 시작하여 약 150년 전에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기까지 수많은 나라들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기에 다양한 문화와 풍속이 섞여서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와 풍속을 낳았기에 시칠리아를 가만히 살펴보면........ 분명 이탈리아 본토와는 어딘가 모르게 상당히 다르다. '여기가 유럽속의 이탈리아야? 아니면 이슬람 문화권이야?' 하는 의구심을 여행자의 가슴에 거듭거듭 속삭여 준다.
1년 365일 중 300일 정도의 화창한 날씨를 자랑하는 시칠리아는 한마디로 자연의 축복을 받은 풍요의 땅이다. 섬의 북쪽에 위치한 에트나화산(3.350m)은 수차례의 화산활동으로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커다란 아품을 선사하기도 하였지만, 그 자연의 대재앙 뒤에는 또다른 선물인 풍요로움이 뒤따라 아픔들을 잊게하고 자연친화적인 환경속에서 여유롭고 낭만적인 삶을 누리도록 허락하였다. 이집트 나일강의 범람이 재앙이자 축복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팔레르모(Palermo)는 AD.9세기 경에 사라센(이슬람)에 의해서 건설된 도시이다.
하지만 시칠리아(Sicily)는 이미 BC.3세기 말엽부터 이미 역사에 등장했다. 팔레르모가 등장하기까지 1.100여년의 시간 동안에도 시칠리아는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해 왔다는 말이다.
하여 (시칠리아)를 본격적으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팔레르모가 등장하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넘어가야 하겠다.
'페니키아' '페니키아人'
유럽의 역사와 지중해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필수사항으로 반듯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페니키아' 이다.
역사에서 '페니키아' '페니키아인'을 같이 사용하는 것은 이들을 하나의 (국가)로 보기 보담은 그냥 하나의 (민족)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서양문명사에서 이들의 역활이 아주 크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삭제하면 그리스. 로마 문명, 나아가 유럽의 문화가 성립되지를 못한다.
페니키아인들은 아프리카지역 튀니지와 모로코 지역의 바닷가를 거점으로 생겨난 해양민족이었다. 고기를 잡던 어업민족에서 벗어나 배를 건조(선박기술)하는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점차 대양을 항해하는 항해술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물물교역으로 영역을 넓혀가 인류최초로 본격적인 해상무역의 새로운 장을 연 사람들이 바로 페니키아인 이었다. 그리오래지 않아 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 지구상의 그 어느 민족이나 국가보다도 커다란 부를 누리게 되었다.
그들의 영역은 터키를 포함한 소아시아에서 대서양 연안의 리베리아반도(스페인. 포루투갈) 지역까지 지중해 연안 전부를 차지했다. 프랑스. 이태리.그리스 남부는 물론 여기 시칠리아와 몰타까지 모두가 페티키아인들의 무역 거점이자 지배하에 있었다. 식민지라도 해도 무방하였을 것이다.
기원전 4.000년 경.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번창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이집트에 전파되었다. 이 결과로 기원전 3.000년 경에 마침내 (이집트문명)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것이다. 이 이집트를 상대로 교역을 벌이던 '페니키아인'들이 '새로운 시대사조인 새문명'을 부지런히 퍼다가 교역 대상지역인 지중해 연안으로 열심히 퍼날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유독 이 새로운 문명에 관심을 쏟았던 그리이스인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유럽의 영토안에 보다 더 엎그레이드 된 (그리스 문명)이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니키아인들은 아무런 중계수수료도 챙기지 못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돈(金)의 맛'을 제대로 본 민족이었고, 또 인류 최초로 '돈(金)의 노예'가 되어서 몰락한 민족이 되었다.
상상도 못할 만큼의 부를 이룬 '페니키아인'들은 특이하게 (국가)에 대한 관념조차도 가지지 못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국가)나 (문화) (역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아주 특이하고, 인류역사에서 유일무이한 민족이었다. 이 세상에서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었다. 또 이미 이 세상의 모든 돈은 자신(페니키아인)들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다. 하다보니 허구헌날 그냥 먹고 자고 노는 일이 전부가 되었다. 심심하면 지중해의 모든 연안에 도시를 건설했다. 심심해서 항구도 만들고 심심해서 더 큰배도 만들었다. 심심해서 보석 가공을 해서 여기저기 내다 걸었다. 귀찮고 힘든일은 직접 할 이유가 없었다. 돈 주고 시키면 모든게 해결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이들의 부(金)를 노리는 민족과 국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도적이 출몰했으며 무역선을 탈취하는 사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도 마침내 군대(호위무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체계화된 '자주국방' 의미의 (군대)나 (국가)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하여 그들이 택한 것은 (용병)이었다. 돈으로 사는 (군대)를 택했다. 그들의 바램대로 (용병)들이 곧 모든 사태를 안정 시켰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굶주린 사람들과 민족들은 목숨을 걸고 더욱 용감하게 덤벼들었던 것이다. 굶어죽느니 페니키아의 용병을 쳐부수기로 작당들을 했던 것이다. 분쟁사태는 점점 늘어만 갔고, 용병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비용은 점점 늘어만 갔다. 나중엔 한번 무역원정에서 거둬들인 수익금으로도 용병들의 월급을 충당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놀고 먹기만 하는 페니키아인들에게는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가 하루아침에 필요에 의해서 갑자기 생겨날리가없었다.(재벌가 2세가 죽어도 군대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이미 고대때 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결국 '페니키아'는 '용병'들에 의해서 몰락했다.
전투에 직면해서 용병들은 항상 성과급을 요구했다. 두배 세배로 몸값이 늘어갔고,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는 달라는대로 돈을 더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용병의 특성인 '먹고 살려고 전쟁터에 나온 용병이지' '정말로 죽기를 각오한 용병은 있을수가 없다'는 지론처럼 상대하기 벅찬 적을 만나면 먼저 도망을 치기 일수였다. 도망치는 용병을 나무라기라도 하면 아예 마음을 돌려먹고 도적떼에 앞서서 용병이 먼저 주인을 죽이고 재산을 털었다.
페니키아는 멸망했다.
전성기의 로마제국에 버금갈 정도로 지중해 연안 곳곳의 지역을 차지하고 실제 지배했었음에도 역사는 페니키아를 (한 국가)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냥 지중해 지역에서 유랑민족처럼 돈이나 만지작 거리다 어느날 사라져간 소수의 부족쯤으로 전락시켜버리고 말았다. 왜? 뭐든 제대로 남겨놓은게 없어서.........(짜식들...... 우리나라 삼국유사라도 가져다 흉내라도 냈으면 역사속에 국가로 남았을것을.)
이 페니키아의 은혜를 가장 크게 입은 그리스가 새로운 왕좌에 올랐다. 페니키아가 소유했던 지중해 유역의 모든 거점을 무상으로 차지했다. 본격적으로 시칠리아에 상륙해서 식민도시를 세우고 실질적인 지배를 한 사람들이 바로 (그리이스人)이었던 것이다.
찬란한 그리이스의 문명은 여기 시칠리아와 터키의 남서해안지방에 더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시칠리아의 어디를 가도(팔레르모만 제외하고)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의 자취를 그리스 본토보다도 더 생생하게 접할 수가 있다.
한편, 튀니지 지역에서 페니키아인들의 심부름이나 하고 물품 운송이나 하던 하인 부류의 작은 민족이 있었는데, 이 부족의 리더가 페니키아가 망해가는 꼴을 살펴보면서 (자주국방) (부국강병) 같은 분야로 점차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부족민들 설득해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훈련을 거듭한 끝에 명실상부한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하루아침에 몰락한 페니키아인들의 지분(재산)을 하나씩 하나씩 야금야금 확보해 나갔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최강도시국가 그리이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찬란한 위상을 떨치더니, 그 전쟁에 힘을 너무 쏟았음인지 그리 오래지 않아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페니키아인들의 머슴노릇을 하던 민족이 들고 일어나 모든 지중해 유역을 하루아침에 싸그리 차지해 버렸다. 재주는 페니키아가 피우고 재산은 모두 (카르타고)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카르타고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의 흥망을 모두 지켜보았다. 하여 곧 그들은 (카르타고)라는 국가를 건설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세금을 바치며, 그 댓가로 자신의 영토와 재산과 생명을 보장받는 시민(국민)이 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신흥강국 (카르타고)는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대륙에서 튀어나온 또 하나의 거대한 용 (로마)와 맞딱뜨려서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루게 되었고. 전쟁에 패하여 그 즉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던 것이다.
(포에니 전쟁)의 '포에니'는 바로 '페니키아인'을 낮춰서(폄하해서) 부르는 라틴어(이탈리아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페니키아가 역사에서 사라진 후 시칠리아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딛고 식민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은 바로 그리이스人 이었다.
기원전 8세기경 그리이스인들은 시칠리아의 가장 남쪽에 항구도시 (사라쿠사)를 건설하였다. 사라쿠사를 거점으로 북쪽으로는 (타오르미나)까지 진출하여 바위벼랑위에 아름다운 천상의 도시를 건설하였고, 다시 서쪽으로 진출하여서는 (아그리젠토)라는 그리이스 본토의 아테네에 맘먹는 거대한 신전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그리이스가 몰락한 이후에는 카르타고가 진출하였고, 이탈리아 본토를 정복한 로마가 남쪽으로 메시나해협을 건너오면서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서기 3세경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사라쿠사를 더욱 번영시켰으며, 인근에 (카타니아)라는 새로운 중심도시를 건설하였으며, 이 카타니아는 훗날 이슬람이 쳐들어와서 (팔레르모)를 새로 건설할 때까지 시칠리아의 가장 큰 중심도시로 발전한다. 서로마가 멸망하고 등장한 비잔틴제국(콘스탄티노풀) 시대에도 카타니아를 중심으로 사라쿠사 등은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던 서기 652년에 처음으로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를 침공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비잔틴 제국이 굳건하게 버티던 시기였다. 하지만 점차 비잔틴 제국이 쇠락의 길을 걷게되자 서기 827년 부터 이슬람(사라센)은 꾸준하게 시칠리아를 재차 침공하기에 이르른다. 이에 비잔틴제국은 사라쿠사를 거점으로 격렬하게 저항을 했다. 그러자 이슬람 세력은 시칠리아의 남부를 그대로 놔두고 북쪽으로 건너 뛰어서 오늘날의 팔레르모 지역을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즉시 이슬람 방식의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할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슬람의 작전은 주효해서 결국 832년 시칠리아 전역을 이슬람 세력권에 편입시키고, 868년에는 몰타섬까지를 영역에 편입시킨다. 정복해서 차지했다는 이야기다.
이슬람의 복수는 집요했다. 비잔틴의 시칠리아가 근 200년 이상을 이슬람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하여 사라쿠사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하루아침에 번영을 누리던 사라쿠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 카타니아 역시 파괴를 명령하였으나, 갑자기 폭발한 에트나 화산으로 인해서 카타니아가 완전히 화산재 속에 파뭍히고 말았다. 이슬람은 신이 대신해서 정죄한 카타니아를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버렸고, 새로 건설된 도시 팔레르모가 명실상부하게 이때부터 시칠리아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실제 팔레르모 도시 모습을 재건한 사람들은 바로 노르만人들이었다.
1071년 루게로 1세가 마침내 이슬람으로 부터 시칠리아를 되찾고 시칠리아 공국을 세우게 된다. 다시 기독교 국가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 시칠리아 공국은 곧 다시 노르만 용병들에 의해 귀속되고, 다음으로는 신성로마제국에 흡수합병되고 말았다.(이 부분의 역사는 대단히 복잡하고 긴 설명을 필요로 한다.)
항구도시로 건설된 팔레르모의 성벽에서 바라보는 항구 뷰는 정말로 무척이나 아름답다.
대단히 커다란 규모의 항구는 에트나 화산활동의 결과로 지각변동에 힘 입어 항구의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해변을 따라 넓은 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 항구 초입에서부터 팔레르모 도심은 시작된다.
팔레르모로 들어가는 관문은 포르타 펠리스(Porta Felice)로 두개의 거대한 쌍둥이 건물이 마주보고 성문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은 도로가 뚫리고 성문이 사라졌다. 이 포르타 펠리스를 시작으로 도시를 방어하는 요새인 (까스텔로)가 팔레르모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싸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성문이 만들어 졌는데, 정문이 바로 포르타 펠리스 이며 북쪽의 끝을 지키던 성문이 바로 팔레르모 관광명소 중 하나인 포르타 누오바(Forta Nuova) 이다. 동쪽과 서쪽의 문은 소실되었는데. 동쪽 문이 있던 자리부분에 (마시모 오페라하우스)가 들어섰고, 서쪽문 자리에 (팔레르모 역)이 들어섰다고 하면, 오늘날 흔히 '구도시'라고 부르는 옛 역사속의 (팔레르모) 도시 규모와 당시의 모습이나 생활상이 어땠을지 가히 짐작이 되리라 생각한다.
여기 포르타 펠리스엔 군인들이 머물고 훈련하던 광장이랑 건물들이랑 총독의 집무실 등이 있다. 그리고 북쪽의 포르타 누오바엔 당시 처음엔 총독의 관저로 쓰였으나,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관저를 왕궁으로 증축하여 역대 왕들이 머무는 (노르만 궁전)으로 변모하게 된다. 또한 포르타 펠리스와 포르타 누오바 사이엔 일직선 상의 포장된 도로가 건설되었다. 팔레르모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이다. 팔레르모의 한복판이자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의 한복판에 콰트로 간티(Quattro Ganti)가 있다. 이 간티의 뒷편에 아름다운 분수로 더욱 유명한 (프레토리아 광장)이 있다. 간티는 팔레르모의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길이 나뉘어지는 중심 교차로인 셈이다. 그리고 바로 인근 대로상에 (팔레르모 대성당)인 두오모가 자리하고 있다.
이슬람이 점령한 약 200년이 안되는 시기에 팔레르모는 철저하게 이슬람식 도시로 건설되었다. 이 당시에는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로 팔레르모가 꼽혔다. 필레르모는 이슬람 양식의 건축으로 가득한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를 차지한 노르만족들은 이슬람 방식의 건물과 유적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대신 그 위에 비잔틴 양식을 비롯한 노르만 양식의 새로운 건축들로 대신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과정중에 실제 건설에 참여한 시칠리아 사람들은 각개의 장소에 각개의 문화가 그대로 살아있는 이슬람식. 비잔틴식. 노르만식 건물들을 재건했던 것이다. 이 내면에는 노르만족(훗날의 신성 로마제국)이 온 유럽과 소아시아를 떠돌면서 유랑생활과 같은 용병생활을 겪으면서 (종교)가 인간을 얼마나 잔혹하고 또는 파멸로 이끄는지를 여실히 경험한 바로, 나름 그들의 왕국 안에서 종교의 다양성과 자유를 상당부분 그대로 허용한 때문이었다.
그들의 종교는 비잔틴 제국의 종교를 받아들였고, 비잔틴의 종교는 다름아닌 (그리스 정교회)로서 (로마의 바티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지금 여기 팔레르모에 남아있는 혼재된 독특한 문화는 바로 그 '종교적 관용'에서 탄생한 전혀 새롭고 또 다른....... 유럽인가 하면 이슬람이요, 이슬람인가 하면 또 기독교 방식인 독특한 문화 구조를 그대로 여실히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시대적 역사의 아픔이 전혀 새롭고 독특한 뜻밖의 아름다운 문화를 선물처럼 후손에게 남겨주게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성문 (포르타 펠리스)다.
팔레르모 항구에 내려서면 이 장엄한 성문위로 찬연한 두마리의 독수리 (신성로마제국의 휘장)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이 성문 사이로 난 일직선상의 도로를 직진하면 팔레르모 북쪽의 끝 (포르타 누오보)가 있다. 황제가 머문 (노르만 궁전)과 함께.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현상범 포스터'와 함께.
이 양쪽 성문에서 시작된 도시 방어성벽(가스텔로)는 어마어마한 높이와 두께로 팔레르모를 휘감아 돈 뒤에 포르타 누오보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포르타 펠리스의 왼편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휘장이 선명한 마치 제단처럼 꾸며진 연단이 있다.
황제가 군대를 사열하거나 국빈을 맞아들이던 장소였던듯 하다.
제국의 위상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 육중한 위압감을 충분하리만치 여행자에게 선사해 해준다.
옆으로는 총독의 집무실과 교회가 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장업하고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누구라도 바다를 통해 이곳에 도착하면....... 시칠리아라는 작은 섬의 작은 도시 (팔레르모)가 아니라 온 유럽대륙을 지배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위상을 충분히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압도적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인 (팔레르모) 방문을 시작해 보자.
팔레르모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곳 (포르타 펠리스)를 통과 했을 것이다.
우선 여권을 꺼내 신분 확인을 받아야 했다.
당시 이 지역의 신분을 나타내는 증명서가 아니라면, 초대장이나 신용장등이 필요 했겠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입국 신청서에 신분과 방문 목적 등을 상세히 적어서 제출하고 허락이 떨어지기까지 인근의 주막이나 시장에서 마냥 기다렸을 것이다. 슬쩍 월담을 하기엔 가스텔로의 방어벽이 너무도 높아서, 차라리 좀 부패한 경비병에게 은전 몇닢을 슬쩍 집어주고 새벽에 몰래 들어가야 하지 않았을까?
암튼 성문을 통과했다 치고...... 몇 발작 안으로 들어가 뒤를 돌아보면 프르타 펠리스 사이로 내비치는 아름답고도 매혹적인 지중해를 잠시 감상할 수 있다.
사방으로 공원과 분수대가 놓여있고, 시원하게 뻥 뻥 뚫린 도로는 철저하게 사전 계획된 첨단 도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오늘의 현재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천년이 훨씬 지난 시대의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뚫린 도로를 따라 길다랗게 늘어서 있다.
이것이 진정한 도시다.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하던 위대한 도시가 바로 이곳 팔레르모 였다. 그 모습 그대로가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뉴욕의 맨하탄이나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나 런던의 중심가에 비교하기는 좀 그렇겠으나, 지금의 이 모습이 천년 전의 모습 그래로 였다고 생각해 보자.
완벽하게 포장된 현대식 도시.
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는 포장된 도로..........(우리 도심의 매년 가을이면 걷어내는 보도 불록을 치우고 이런 영원한 도로를 나는 가지고 싶다.)
그야말로 꿈 같은 도시가 바로 여기 팔레르모였던 것이다.
이곳을 방문한 괴테가 말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바로 여기 팔레르모' 라고........
포르타 펠리스를 자났으니 이제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를 따라 도심 안으로 들어가면 팔레르모의 중심부인 콰트로 간티에 이르게 된다.
팔레르모는 여기 항구주변의 '칼사 지역'과 콰트로 간티 주변의 중심가인 '부치리아'로 나뉘게 되는데, 부치리아 인근으로 교회(성당)이 많은반면 칼사지역에는 수많은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마리나 공원. 마지오네 공원. 플로리오 공원. 글라체리 공원. 그리고 칼사 공원 등이다. 무척 많다.
항구를 둘러보다가 (칼사 공원)에 잠시 들렸는데 규모가 좀 작은 박물관과(휴관일) 시민들이 많이 모여있는 조각공원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생각하기에는 오래전에 왕실의 궁전이었거나 아카데미 같은 고대의 학술원이나 학교(칼리지)가 있었던 장소로 짐작이 갔다. 기념비와 조각상들이 많았다. 그리고 정확한 설명은 없었지만, 짐작하기로 내가 팔레르모에서, 아니 시칠리아에서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분의 아주 커다란 조각상이 정말로 살아있는 모습처럼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틀림없는 그분이었다. 뒤로는 페허로 변한 수풀림 속에 거대한 유적처럼 대리석 건물이 페허로 남아있었다. 그리스의 수학자 조각상이 높은 성문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고대의 수학과 의학을 공부하던 학교라 짐작했다.
** 위의 미술관 안에 소장된 작자 미상의 유명작품 (죽음의 승리). 휴관 관계로 싸이트에서 퍼 옮겼음.
지중해 연안으로 고대 식민도시를 건설하던 그리스인들은 신전건축과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서 처음에는 그리스 본토에서 대리석들을 캐다가 실어 날랐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여기 시칠리아 였다.
'시칠리아'란 바로 '하얀 대리석'이란 뜻이다.
시칠리아의 어디를 가건 새하얀 품질 좋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조각상과 분수대와 계단과 건물들이 넘쳐난다.
그렇게 시원하게 뚫린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오늘날의 현대에도 전혀 뒤지지않는 천년 전의 건물들을 살피며 걷노라면 이내 (비넬라 광장)에 이르게 된다. 본래의 지명인 비넬라 광장 보다는 콰트로 간티(Quatro Ganti)로 대변되는 팔레르모 구시가지의 심장 지역이다.
이곳에서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시작되는 4개의 길을 따라 포르타(성문)를 통해 팔레르모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이 길을 따라 나누어지는 4개의 지역에 각기 다른 도시의 기능 지구가 형성되었다. 항구지역. 상점지역. 공장(생산)지역. 그리고 이슬람지역 이었다. 팔레르모는 이렇게 처음부터 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목적성을 가지고 형성된 고대의 계획도시였다.
(팔레르모)란 본시 '네개의 모서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줄리 오라소)가 이 네거리의 모퉁이마다 똑 같은 크기에 똑 같은 모양을 한 4개의 건축물을 만들고 분수대를 설치했다. 1608년에 시작해 12년의 공사기간을 거쳐서 완공했다. 각기 4개의 건물 1층에는 이곳 시칠리아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한 4명의 성녀 '산타 크리스티나' '산타 닌파' '산타 올리바' '산타 아가타'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다. 2층에는 시칠리아를 빛낸 왕들, '카를로스 5세' ' 필리 2세' '필리 3세' ' 필리 4세'의 모습이 서로 위용을 뽐내듯이 장식되어있고, 3층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장식하는 4명의 여신들이 자리하고 있다.
17세가 시칠리아를 대표하던 바로코 양식의 정수를 느껴볼 수 있는 장소이자 팔레르모를 찾는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다.
팔레르모에 발을 내 딛은지 꼭 열흘째 되는 날에 바로 여기 콰트로 간티에 서서 (괴테)는 이렇게 말했다.
'시칠리아를 빼 놓고는 이탈리아를 다 보았노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이탈리아를 아는 열쇠가 바로 여기 시칠리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이곳, 팔레르모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다' 라고 말했다.
1년 365일 중에서 300일 이상이 쾌청한 시칠리아 여행에서 콰토르 간티를 찾아간 두 번의 날 모두 비가 내렸다.
'거 참........'
다행히 떠나오는 날 잠시 인사차(?) 들렸을때는 날씨가 쾌청했다. 역으로 걸어 가는 길목이었기에........
작은 팁을 드린다면........
비위가 약하신분들은 가급적이면 늦은 시간에 야간촬영을 한답시고 (콰토르 간티)를 찾아가시는 것을 삼가하시는 것이 좋을것 같다.
왜냐하면........ 야간에 콰토르 간티는 '무허가 노상 방뇨 센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찌린내가 장난이 아니다.
치안 시스템이 부족한 때문인지...... 아니면 성녀들이 지켜보시는 분수 아래서 방뇨를 하면 특별한 은총(?)이 고추(?)에 내려진다는 속설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쫌......... 그렇다. ㅎㅎㅎ
콰토르 간티에서 마쿠에다 거리를 따라 10분 정도면 팔레르모 중앙역이자 팔레르모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간티에서 같은 방향으로 열 걸음만 옮기면 왼편으로 그 유명한 여행지이자 연인들에게 크게 사랑받고 있는 (프레토리아 광장)이 나타난다. 팔레르모의 관청지역이다. 시청 청사가 광장을 내려다 보고 있으며 주변으로 모든 관공서가 늘어서 있다. 시청 건물을 포함하여 둘러선 관청건물과 교회(성당) 등은 본시 팔레르모의 유명한 귀족집안인 (돈 루이지 가문)의 개인 저택이었던 '프레토리아 궁전' 이었다. 도로에서 계단을 약간 오르게 되어있는 광장엔 바로 그 유명한 프레토리아 분수(Fontana Pretoria)가 있다.
아주 간혹 '피렌체의 유명한 조각가를 모셔다가 만든 부수'라 하는 이들이 있는 데 그건 아니다. 그릇된 정보이자 잘못 된 지식이다.
(프레토리아 분수)로 불려지는 이 분수대는 본래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의 (산 클레멘토 궁전)에 있던 분수였다. 1554년 피렌체의 조각가 '프란체스코 카밀라니'가 만든 당시 피렌체에서도 화려하고 왕성도 높기로 아주 유명한 분수였다. 산 클레멘토 가문에 환란이 덥쳐 일가족이 맨몸으로 나폴리로 겨우 피신을 하였는데, 당시 나폴리를 여행하던 먼 친척 일가였던 '돈 루이자' 가문의 수장이 '산 클레멘토' 가문이 무사히 피난 생활을 영위하게끔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훗날 피렌체로 복귀한 '산 클레멘토'가 이때은 구은을 보답하고자 하였는데 거듭 사양을 하자, 이 분수대를 644개의 조각으로 분해하여 마차에 싣고 배로 실어날라 마침내 팔레르모의 프레토리아 궁전 앞마당에 선물하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여신상에서 부터 삶에 지친 할아버지 상까지 48개의 다양한 조각상이 옮겨지는 장장 10년에 걸친 대공사였다. 시대의 흐름에 '돈 루이지 가문'이 몰락하자 팔레르모 시가 광장을 포함한 궁전을 사들여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프레토리아 분수는 이탈리아 우표에도 등장 할 만큼 로마의 (트레비 분수)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 저거 단테 아니야?'
'단테가 여기 팔레르모엔 웬일이래?'
나는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켜 본다. 그런데 나의 기억세포 어디에도 단테가 시칠리아와, 그리고 단테와 팔레르모가 어떤식으로든 연관이 있다는 단서를 찾아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단테)였다.
프레토리아 광장에서 두오모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이번 시칠리아 여행에서 꼭 가장 만나보고 싶었던 (프리드리히 2세)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를 걸어가면서 중간 중간에 있는 골목들을 기웃기웃하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찰라 같이 짧은 순간에 기적처럼 길 건너편의 건물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에서 스쳐지나듯 마당 가운데 서있는 조각상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순간처럼 뇌리에 번뜩이는 '어? 단테가?' 하는 어떤 느낌.........
피렌체에서 잠시 스쳐가듯 만났던 단테를 여기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서 다시 만나다니.......... 세상에.......... 이런 인연이.........
나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도로를 건너갔다. 그리고 그 건물의 계단을 올라갔다. 문 안쪽으로 나보다 연상인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의자에 둘러앉아 커피를 나누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전혀 망설이거나 주저함 없이 제복 차림의 경비에게 다가갔다.
'저 조각상이 단테 맞나요?'
그러자 경비는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턱수염이 근사한 노신사가 대신 '단테가 맞다고' 영어로 대답을 건네온다.
'단테를 만나보려고 피렌체를 갔었는데 제대로 만나지 못해 몹시 아쉬웠다. 지금 뜻밖에 팔레르모에서 단테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잠시 안쪽을 둘러보아도 되겠느냐?' 고 물었다. 노신사가 혼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상황을 눈치 챈 경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라는 시늉을 손짓으로 내게 해 보인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단테 알리기에리.
그가 분명했다. 그의 저서인 '신곡'이 조각상 아래의 기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궁금한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어떻게든 끝장을 보고야 마는 학구적 욕심에 대해서는 집요한 면을 가지고 있는 '나' 라는 인간.
'단테가 왜 여기에?"
'단테와 시칠리아가, 단테와 팔레르모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길래 저렇게 마당 가운데 조각상이 모셔져 있단 말인가?'
숙소로 돌아오자 마자 저녁도 잊은 채 숙소안에서만 터지는 와이파이를 이용해 모든 싸이트에 죽어라 검색을 해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한국의 싸이트나, 구글이나, 이탈리아의 싸이트에서도 확실하게 답을 해 주는 곳이 없었다. 낮에 찍어온 사진들을 들여다 보고 살펴 보고 또 분석해가면서 새로운 단어와 표현으로 연실 검색창을 두드려 보지만 (단테)와 (팔레르모) 라는 주제에 합당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첩을 꺼내 놓고 지금 당면한 궁금증에 대한 내 나름의 갖가지 추론들을 메모를 해 나갔다. 열심히 서너 페이지를 메모했다.
여행이 끝나고 나서(귀국한 후) 그 물음은 여전히 나에게 하나의 미스테리 처럼 남아있었다.
편안한 시간에 죽어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그러나 역시 어느곳에서도 분명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끝내 답을 찾아냈다. 내가 수첩에 여러가지로 추론해 보았던 내용중에 답이 있었다. '단테가 왜 팔레르모의 그 건물에 놓여 있었을까?'
나는 이제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건물의 이름을 살펴보면 '1586년에 설립된 제수이트 단체에서 후원하는 팔레르모 주립 도서관'이 공식 명칭이다.
그리고 이 도서관 건물과 뒷편의 교회 건물이 하나로 붙어 있었는데 묘하게 입구에 '로마 카톨릭'를 상징하는 휘장이 조각되어 걸려 있었다.
나는 이 두가지 '로마 카톨릭'과 '제수이트'라는 단어의 상관관계에서 모든 해답을 찾아냈다.
'단테는 제수이트회의 회원'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시대였던 당시의 시칠리아 종교는 정교회(그리스 정교회) 였다. (로마 카톨릭)과는 적대적 갈등관계 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끊임없이 교황의 (교권)에 갈등을 빚었고 대결을 벌이던 시기였다. 이 갈들의 골은 깊을대로 깊어져서 심지어 (로마 카톨릭)은 (비잔틴의 정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의 정교회)를 '이단으로 파문' 시키는 사태를 야기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런데 이 도서관이 속한 교회건물은 분명 로마 카톨릭(바티칸)의 소유지였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제수이트(Gesuiti)라는 단체가 등장한다.
제수이트는 흔히 (예수회)라고 불리는 카톨릭 단체로, 남자 수도회를 일컬으며 이 수도회의 회원을 제수이트라고 부른다. 하여 (예수회)라고 부르기도 하고 (제수이트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회로 통칭(제수이트회)는 분명 로마카톨릭(바티칸)에 소속된 단체 중 하나이다.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고자 만든 표어에는 'Ad majorem Dei gloriam(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라고 표현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들이 결성되고 행동으로 실천한 내용적인 면으로 보자면 아름답게 치장된 표어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야만적이며 파렴치한 행위를 일삼았다. 결코 성(聖)스러워야 할 기독교의 이념과는 판이하게 그 근본부터가 달랐다.(어디까지나 초창기에 그러했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전혀 다른 실체를 하고 있다.)
예수회가 설립 초기와는 전혀 다른 집단이 되었다는 점은 이렇게 한마디 말로 정의 할 수가 있겠다.
'현 교황이신 (프란체스코 교황)이 예수회 출신의 첫번째 교황이다.'
하지만 예수회의 실제 설립 목적이나 초장기의 모습은 절대 표어에 그려진 그런 성스럽거나 종교적 이상향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 집단이었다.
예수회(Gesuiti).
1534년 성 야나시오 데 로욜라가 프란시스코 하비에라(Francisco Xavier) 등을 섭외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한 종교적 모임을 그 기원으로 하며, 1540년 로마 의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16세기의 유럽에서는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마르틴 루터와 캘빈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후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활동과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어 갔던 반면, 그만큼 카톨릭의 위상은 급격하게 하락해 겨우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급격한 카톨릭의 교세 위축을 위기로 생각한 교황(로마 카톨릭)은 이 위기의 타개책으로 (예수회)를 탄생 시켰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카톨릭의 위기를 타개하려고 만들어진 (예수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를......... 교황에 의해 탄생된 예수회가 '부패와 타락을 종용한 장본인 교황'을 징벌할 수가 있었겠는가? 아니면 교황 자격을 박탈해 파문시킬수가 있었겠는가? 아니면 교화에 대해서 제반적인 사항에 '사무감사'를 실시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들(예수회)은 교황의 필요에 의해서 차출된 조직폭력배와 같은 행동대 였다. 재개발 지역에 툭하면 출몰하는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깡패집단이 바로 (예수회)였다.
'종교 개혁파(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카톨릭(교황)측 반격의 무장 특공대(Shock-troops of Counterreformation)' 라고 유럽의 지성사는 짧게 (예수회)를 정의 내렸다. 개신교 중심을 이루는 인사들을 테러하고 납치하고 의문의 죽음으로 암살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임무였다. 더하여 교황의 비호 아래 개신교 탄압을 목적으로 하는 사제들을 비밀리에 양성하기 까지 했왔다.
점차 세월이 지나 18.19세기에 이르자 이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개신교(프로테스탄트)를 그렇게 개별적으로 탄압해서 해결될 시기가 이미 오래전에 지났던 때문이다. 하여 카톨릭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세상에 파고들어 교세를 확장하기로 나섰고, 그 전면에 (예수회)가 재편되었다. 주로 남미와 아시아에 주력을 펼쳤다. 하지만 이 선교 과정에서 각 지역마다 너무도 편이하게 다른 종교성과 신앙성에 대해서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유럽의 카톨릭과 남미의 카톨릭과 아시아의 카톨릭은 같으면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남미지역에선 에수회 소속의 신부들에 의해 해방신학이 급속도로 확산되어 로마 교황청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아프리카도 그랬다.
아르헨티나 관구장 당시 해방신학에 반대하는 견해를 피력한 바가 있던 현재의 프란체스코 교황은 당시 실제로 에수회에 의해서 카톨릭으로 부터 파문당한 뻔 한 일도 있었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명확히 구분이 안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로마와 기타 유럽의 대결로 압축되던 교황권 다툼에 남미와 아프리카까지 가세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거기에 현재까지의 카톨릭 안의 두 계파의 다툼은 은연중에 계속되고 있다.
카톨릭의 부와 명예는 프란치스코회가 독차지하고, 예수회는 맨날 몸으로 때운다는 속설이 현존한다. 하지만 예수회는 자신들이야말로 카톨릭의 진정한 기둥이자, 카톨릭의 두뇌 역활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 예수회의 회원 명단에 (단테)와 (마태오 리치)와 (아담 샬)과 그리고...... 현 (프란체스코 교황)이 있다.
예수회는 완전 새롭게 거듭났다.
정해진 수도복으로 복장 통일을 하고 철저한 위계질서 아래 점조직 형태로 운영하던 것에서 벗어났고 형식적인 찬미기도 등을 페지하고 일대 전환을 꾀하면서 세상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도적 봉사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학교 교육과 학문 연구 분야에 박차를 가해 신이 창조하고 사랑한 세상에 공헌하기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여기 팔레르모의 도서관이 바로 그 일환이었다.
예수회는 사도가 파견된 교회에 도서관과 학교를 세우고 지원했다. 예수회의 지원으로 문학. 철학. 과학에 업적을 이룬 학자들을 파견이나 순회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교육활동을 펼치게 지원을 했다. 예수회의 회원이었던 단테는 여기 도서관을 후원했거나, 후학들에게 편지로 가르침을 주었거나 무엇인가 공을 세웠었던 것 같다. 또 위의 사진에 기재된 기계와 기재들은 이 도서관에서 실시한 교육프로그램의 결실로 여기에서 배움을 얻은 젊은이들에 의해 발명된 것들로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에 일조를 했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서강대학교'와 '카톨릭대학' 이 바로 (예수회)의 선교사업과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단테는 바로 이 사업을 열성적으로 실천하던 예수회의 회원 이었다.
하자만 여전히 로마 카톨릭은 상당부분을 검은 빌로드 커튼 안에 성스러움만을 전면에 내세우고 꼭 꼭 숨어있다.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은 없다.
진실을 거부하는 그들이 말하는 신은 언제나 깊게 침묵중이다.
신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그것을 입증하라고 로마 카톨릭을 닥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들이 '신의 후예 답게 신실한 모습을 보이고 실천할 때에.........' 기꺼이 나는 '바티칸은 내 형제'라고 칭송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은 시간을 '제수이트 도서관'에서 머물렀다.
그만큼 (단테)와 함께한 시간들이 나로하여금 깊은 상념에 젖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도서관을 나와 근처의 제법 유명하다는 가계에서 젤라또를 하나 사서 먹고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또 만나야만 할 사람이 있어서 였다.
길을 가면서 두리번 두리번 거려 본다. 팔레르모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다.
여기 빗토리오 에마뉴엘 거리라면 아침 저녁으로 산책 삼아 돌아다녀도 절대 질리지 않을 것만 같다. 한 달쯤 그냥 이곳에 머물렀으면.........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라임 칼라로 장식된 어마무시 웅장한 건물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팔레르모 대성당) 두오모 였다.
와!!!!
나 태어나서 이제껏 보았던 수 많았던 교회당(성당) 중에 단연 압권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내 앞에 있었다.
와!!!1
이런게 바로 ( 비잔틴 + 이슬람 + 노르만 양식의 결정체) 라고 하는 것이구나.
----- 감사 합니다. 다음에는....... (십자군 전쟁과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