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말 마당에도 햇살이 살랑거리는 계절이 찾아왔다.
온갖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지천으로 돋아 나오기 시작했다. 열 서넛 새악시들 가슴에도 살랑대는 바람결이 아지랑이 처럼 피어오를 시기였다.
- 아니 이년이? 방댕이가 말 궁뎅이만해졌으면 머시든 지 밥벌이 할 생각을 해야지, 남의 담장에 기대서 뭔 궁상을 떠는거여 떠는것이? 콧구멍에 봄바람 들였다 났다가 한다고 보리가 나올거여? 땔감이 생길거여? 어여 지 동생을 업어주던지 어디가서 나물을 뜯어오든지 퍼뜩 안나서? 시방 이 에미한테 한번 맞아볼텨?
한 성질 하는 어미가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다가오자 헐레벌떡 꽃같은 새악시는 싸리담장 밖으로 냅다 도망을 친다.
- 예진아 너도 엄마한테 쫓겨나왔구나?
- 엄마는 지뿔도 모르면서 나만 보면 무조건 역정부터 내고 그래....... 씨..... 확 집 나가버릴까부다........
- 나가면? 갈데는 있구? 아예 이참에 시집이나 확 가버릴까부다.
- 누구한테? 용설이한테?
- 미쳤니? 내가 개한테 시집가게? 아무리 봐도 용설이는 지분하게 한여자만 지켜볼 그런 놈이 아니여. 딱 보면 알어.
- 그럼 누구? 주회?
- 주회는 아니라니깐? 개는 그냥 어려서부터 옆집에서 함께자란 그냥 친구여 친구.
- 아닌것 같던데.... 지난번에 네가 담장넘어로 힐끗 힐끗 넘겨보는 눈초리가 보통이 아니었어.
- 넘보긴 뭘 넘봐. 너 어디가서 절대 그런 애기 함부로 하면 안된다. 누구 혼사길 막힐 일 있어? 절대 아니야.
- 아님 다행이구........ 우리밭 좀 갈아달라고 부탁하러 내가 주회에게 들려도 너 괜찮은거지?
- 상관 없다니까? 너희 둘이 따로 만나도 난 상관 안해.
강하게 부정을 하는 예진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고있음을 느끼더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예진아 호미랑 소쿠리는 가져가야지? 손으로 캘거야?
예진이 부연이 일옥이 셋이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며 나릇한 봄기운에 흠뻑 취하고 있었다. 염바다들에 나물 캐러 가는 중이었다.
- 부연아. 너 이야기 들었어? 장미 개 말이야. 얼굴에 핀 여드름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더니 아 글쎄...... 범바위 아래 찬샘에 한동안 다니면서 세수하고 물을 떠다 마셨더니 여드름이 싹 떨어졌다네. 신통하지. 내가 직접 만나봤는데 정말이더라. 볼에 조금만 남았어. 그래서 요즘도 죽자사자 새벽마다 범바위를 찾아다닌다하네? 너도 찬샘에 세수해봐. 정말 효험이 있대.
- 그래? 하지만 좋으면 뭐해? 우리집에선 너무 멀어. 우리 옆동네 귀미실(연수동)에도 약수가 있는데...... 난 죽으면 죽었지 새벽에 못 일어나. 그나저나 저기 재 기훈이 아니야?
- 나무지게 지고 가는 사람? 맞네. 싱겁이가 맞네. 또 마니산으로 땔깜 훔치러 가는가보다.
- 남의 말림 들어갔다가 껄리면 뒈지게 얻어터지는걸 알면서도 가는걸 보면 재는 참 깡다구도 좋아.
- 재가 잘 뛴대. 남의 말림에서 나무하다가 주인이 보고 쫓아왔는데..... 벌써 지게 둘러메고 논배미 저만치 잽싸게 도망치드래.
남의 말림에 몰래 들어가는 처지로 오히려 아랑곳 하지않고 흥타령까지 입에 올리고 있었다.
- 십리의 절반이니 오리나무, 열아홉 다음이라 스므나무, 가자가자 해서 감나무, 오자마자 되돌아가래서 가래나무, 춤이나 추자해서 추자나무, 삐까뻔쩍 반짝여서 광나무, 입었어도 벗었다 해서 벚나무, 대낮인데도 깜깜하다 우겨서 밤나무.......
개울을 건너다 말고 익히 잘 알고있는 소꿉동무 새악시 셋을 보고는 기어코 또 싱거운 타령을 읊어댄다.
- 옛날에 옛날에...... 서울에서 시집온 어떤 새댁이..... 밭도랑 옆에서 급한 볼일을 보고나서.........깨금나무(개암나무) 이파리가 넓어서 골라 따서 쓰윽 했는데....... 풀쐐기에 쏘여서 뭐라고 뭐라고 했다네........
- 아휴? 기훈이 너 정말 그렇게 까불꺼야? 너네 삼촌한테 다 일러준다? 일옥이가 집에가는 길에 너네 삼촌 가계에 들린다?
- 내가 뭘? 남에게 들었던 타령을 고대로 따라했을 뿐인데? 그런데 시방 너희들은 어디가냐?
- 황새모랭이로 해서 염바다들에 냉이캐러 간다?
- 사방 지천에 깔린게 냉인데 그 먼데까지 뭐하러 가냐? 너희들 바보냐? 아님.......너희들 봄바람 났구나?
- 바람 나긴 누가 바람이 나? 우린 그런 애들이 아니야? 염바다들께 깨끗하다고 해서 가는거란 말이야?
-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구. 누가 뭐래? 가보면 주회가 있을거야. 주회한테 캐달라고 하든가......
- 나 있는데 주회 애길 왜 꺼내? 그건 너 오해하는거야.........
- 기훈아. 주회가 염바다들에 있어? 왜?
- 가 봐. 가보면 알아.
계면쩍었는지 기훈이 잽싸게 개울둑을 타고 넘어 사라져갔다.
봄 들판은 그 자체로 먹을거리 그득한 밥상이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봄들판의 나물은 한마디로 또다른 식량이었다. 봄들판에서 캐고 뜯어온 나물들이 조물락조물락 어머니의 손길을 거치고나면 덩그러니 푸짐한 밤상으로 변했다.
얼어붙었던 흙이 풀릴 무렵이면 양지바른 언덕 비탈의 이름모를 풀숲 사이로 하얀꽃을 피우는 냉이와 노란꽃을 다닥다닥 붙인 꽃다지가 파릇한 잎을 뻗어내면서 봄이 시작된다. 그리고나면 자주꽃을 동그랗게 층층이 붙이고 키가 큰 광대나물이 뒤질세라 방긋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꽃을 자랑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야생초들이지만, 겨우내 꽃을 구경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꽃들이 아닐 수 없다. 가만히 살펴보노라면 어디선가 벌과 나비가 날아들기도 한다. 헐벗고 굶주림에 지친채로 긴 겨울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자연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냉이와 꽃다지가 쇠어져서 밥상에서 물러날 즈음이면 벼룩나물과 장대나물, 황새냉이, 미나리냉이,광대나물과 말냉이기 등장한다. 이 모두가 어린잎을 뜯어다가 국거리로 사용하거나 삶아서 나물로 무쳐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쑥을 뜯어다 쑥버무리라도 해먹는 날은 가히 잔치집이 부럽지 않다. 이어서 지칭개와 씀바귀와 돌나물(돋나물) 등장하고 나면 어느새 봄은 완연하게 무르익어가고, 마침내는 드릅나무 가죽나무 옻나무 새순들이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탁빼기 한사발에 드릅순 하나를 어질겅어질겅 씹다보면은 봄나물의 귀족이랄 수 있는 고사리와 취나물이 우리곁을 찾아온다.
한동안 쪼그리고 앉아서 나물을 캐느라 허리가 아팠음인지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켜던 일옥이 말했다.
- 부연아. 우리 바구니 넘치는것 아니야?
- 그러네. 이제 어디든 가서 나물을 다듬고 물에 싯어서 가져가야 할것 아니야?
- 그렇다면 섬말(동촌)로 가면 되잖아. 섬말 넓적바위 위에 걸터앉아 다듬어서 씻기로 하지 뭐.
- 에게게.... 에진어 너 또 주회보러 가려고 그러는거지? 다 알어.
- 아니야. 아니라니깐? 섬말 빨래터 옆이 공터처럼 널르니까 그러는거지.......
- 얼레 얼레 너 얼굴 빨개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부연이가 코를 움켜잡고 얼굴을 잔뜩 찌프렸다.
-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냄새야? 누가 똥 치나봐.
- 그러네? 냄새 드럽다. 어디야 어디? 얼른 피해서 달아나자.
세 처녀가 호들갑스럽게 부산을 떨면서 밭뚝을 타고 달려나가는데...... 저만치서 지게를 지고 다가오는 사람은 다름아닌 주회였다.
주회 또한 가까이 다가오던 처녀들을 발견하고는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듯 그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듯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오랫동안 함께 자란 동무들일 뿐만 아니라 하필이면 예진이가 거기에 함께 있지 않은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자고...... '
어쩐지 새벽부터 아부지가 닥달하실 때 부터 뭔가 조짐이 이상했었다.
주회에게 있어서 일 년중에 가장 싫은날이 바로 이날 이었다.
뒷.간.치.는.날.
건강이 나빠지신 아부지를 대신해서 집안의 모든 일을 벌써 수년전부터 대신해온 효자 주회였지만, 다른것은 어느 하나도 마다하지 않고 해내면서도 이 뒷간치는 일만은 께름칙한게 영 내키지가 않았던 것이다. 냄새가 지독하고 더러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딱히 뭐라고 딱 꼬집어 이야기 할 수는 없어도 이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럴때마다 아부지는 이미 네 속내를 다 안다는 표정으로 젊잖게 타이르곤 하셨다.
'똥두간이라고 하찮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이 농사꾼이여. 냄새 심하고 구더기가 들끓어도 그것은 쉽게 돈 주고 살 수 없는 거름인 것이여. 자고로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삼십대에 처하고, 제 똥을 버리는 자는 곤장 오십대에 처한다고 조선시대부터 형법으로 정하지 않았냐? 사람이 제 똥을 삼년동안 먹지 못하면 금방 죽는다고 했어. 그러니께 뒷간 치는 일이 사람으로 결코 못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지.'
아부지의 말씀이 아무리 나랏님 말씀처럼 숭고하고 존엄하다 쳐도 주회에게 있어서는 '이것만은 정말로 싫어' 였다.
새벽부터 설치시는 아부지의 성화에 못이겨 주회는 미야까(리어카)에 똥장군과 오줌통을 싣고서 뒷간 뒤의 작은 숨구명으로 끌고간다. 연실 코를 움;켜쥐면서 자루바가지를 숨구멍에 들이밀어 인분을 퍼낸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두가지를 따로 구분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연실 나오게 된다.
일전에 노성이네 집에 가보니깐 잿간을 함께 써서 냄새도 적고 구더기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되면 뒷간치기도 훨씬 수월할텐데 아부지는 기어코 농사짓는데는 지금의 이 방법이 최고라고 우기셨다. 언젠가는 꼭 잿간이 있는 집에서 살고야 말겠다고 주회는 뒷간치는날 마다 하늘에 맹세를 거듭했다.
똥장군과 오줌통이 가득차고나면 이제부터는 미야까를 끌고 멀리 염바다들까지 가야만 한다. 비록 우리밭은 아니지만 먼친척의 말랑을 서너마지기 얻어서 농사를 짖기 때문이었다. 한떼기에서는 이제 제법 봄보리가 파릇파릇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 거름을 날라서 뿌려야 하는 밭떼기에는 수수와 조를 심을 생각이었다.
동촌에서 염바다들까지는 마차가 수시로 드나들어 길은 나름 어느정도 닦여있다고 하겠지만, 울퉁불퉁한 길은 혼자 미야까를 끌고 다니기에는 그리 호락호락한 길이나 거리가 아니었다. 또 밭 근처에 까지 미야가를 끌고 가기는 했지만, 높은 둔덕과 밭고랑을 미야까를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그쯤되면 어쩔 수 없이 거름지게를 꺼내 물통자리에 매달린 귀때동이에 퍼가지고 온 거름을 옮겨 나누어 담아 밭고랑까지 지고가서는 다시 자루바가지로 퍼서는 사방으로 흩뿌리는 것이었다.
동촌에서 염바다들 까지 세번을 오고가면서 뒷간을 치다보니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하필...... 하필 이런 상황에서 소꿉동무들을 만날것이 무어란 말인가. 더군다나 예진이까지.........
주회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 숨고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작업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튀고 묻고........ 지독한 냄새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멀리서도 빨갛게 달아오른 에진의 모습이 한 눈에 가득 들어왔다. 다른 두 소꿉친구도 놀란 눈치는 마찬가지였다.
여자애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저만큼 비켜 돌아 줄행랑치듯이 멀어져 갔다.
갑자기 주회의 눈시울이 젖어만 갔다.
해질녁에야 겨우 퍼나르기를 마친 주회는 이제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냄새나는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씻고 싶지만....... 혹시나 섬말 빨래터에서 나물을 씻고 있을 동무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주회는 미야까를 끌고 염바다들을 가로질러 나갔다. 집으로 가는 반대방향 이었다.
그리고 가다보면 염바다들 남쪽 끝언저리에 제법 커다란 둠벙이 있기 때문이다. 거의 인적도 없는 곳이다.
(둠벙)이 거기에 있었다.
주변을 한번 둘러다 보던 주회는 옷을 홀라당 벗어서 둠벙 안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서서히 둠벙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은 차가웠다. 눈이 쌓인 산언덕에 맨몸으로 서 있는것 처럼 살을 에이듯 차가웠다. 그러나 주회는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이 더러움과 냄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벗어서 내던진 옷가지를 잡아당겨 둠벙물에 담구어 흔들어 빨았다. 그리고는 둠벙 물속으로 머리를 쳐막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 수면이 잠잠해 지자 둠벙 속에서 놀고있는 물고기가 보였다.
붕어다. 그것도 한 두마리가 아니다. 씨알도 제법 굵다.
'수일내로 짬을 내서 여기 둠벙을 한번 퍼야겠다.'
아담한 연못이 하나 생겼네
해와 구름의 그림자가 수면 위를 오가네
어찌 이리도 깨끗할꼬
연못의 상류에서 맑은 물이 흘러들기 때문이라네
주자(朱子)의 싯구 중에 있는 구절이다.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들고 잠시 머물다 흘러가니 고여서 썪지 않는 것에 대한 어떤 가르침의 의미를 담고있는 글이라 하겠다.
이 서정적인 장면을 가마나히 생가가해 보노라면 그것은 영락없는 (옹달샘)이다. 달밤에 노루가 살며시 내려와 물한모금 마시고 간다는 바로 그 (옹달샘)이다.
옹달샘도 (둠벙)의 하나이다.
(둠벙)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名詞. 움푹하게 패어 물이 괴어 있는 웅덩이(湫). 웅뎅이.웅당이.웅댕이라고도 부름' 이렇게 써있다.
이렇게 보자면 옹달샘도 둠벙이요 저수지 또한 하나의 둠벙이다.
그런데 이렇게 넓은 의미로 보자면 무엇인가 영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마치 둠벙은 둠벙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와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 말이다. 둠벙은 옹달샘을 닮지도 않았고 결단코 저수지를 닮지도 않았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둠벙)은 이런 모습이었다.
말이 좋아서 <農者天下之大本>이지, 그 옛날 상당부분의 농업은 그저 하늘이나 올려다 보면서 조물주께서 베푸시는 만큼만 수확을 할 수 있는 천수답(天水畓) 농업이 대부분 이었다. 물론 삼한시대인 고대부터 저수지를 만든 역사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그러다보니 산자락에 일구어 놓은 밭골의 언덕아래 땅이 축축한 곳에는 웅덩이를 파서 물을 모아놓곤 했다. 그런가 하면 들판의 논배미 어귀에는 항시 찬물이나와 농사가 안되는 (쉬)라는 것이 있었다. 옛조상들의 지혜는 이런환경에서 빛을 발해, 산자락 끝의 밭 아래 습지나, 논배미 구석의 (쉬)를 파면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泉)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밭두렁과 논배미에 만든 물웅덩이로는 항시 메마른 농토에 물을 대주어 곡식을 자라게 했고, 같은 방식으로 민가 주변에 만든 물웅덩이는 옹달샘(박샘: 바가지 샘)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하게 되고 남아서 흘러내리는 물은 빨래터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정도까지의 물웅덩이가 바로 (둠벙)이 아닐까 하는 느낌은 오로지 나만의 생각일까?
들녁에 나가보면 사방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 (둠벙) 이었다. 동네마다 서너개씩은 다 있었던 둠벙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비가 내리던 어제 <유병태님>의 (사라져 가는 둠벙) 이라는 글을 읽다가 문득 궁금해 져서 충주 인근의 시골을 사방으로 찾아다녀보았다. 반나절을 찾아다녔음에도 끝내 둠벙을 발견하지 못했다. 저수지와 농수로 확장공사가 원만하게 정착되어서인지 이제는 그 어디에서도 둠벙을 볼 수가 없었다. 어디 깊은 오지라도 찾아가야만 볼 수 있을것 같다.
동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둠벙들을 사람의 힘으로 일부러 없애고자 해도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을 것인데 콤바인과 포크레인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점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둠벙쯤 메꾸어 없애기는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추수가 끝나고 버려지다시피 한 논두렁 사이로 제법 물이 고여있는 자리에서 그 엣날 둠벙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든 정도가 전부였다.
사방으로 우뚝 솟아있던 산등성이에서 눈이 녹아내리고 얼음장 속으로 쫄쫄거리며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개울물은 아직 손끝이 시릴정도로 차가운데, 밭자락 끝이나 논두렁 아래의 둠벙은 어느새 긴 겨울동안 잠궈놓았던 문을 일찍 열고 봄을 맞이한다. 넓디넓은 들녁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둠벙의 가장자리나 방죽에는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일찍 기지개를 켜고 모습을 드러낸다. 냉이. 씀바귀. 쑥 등이 서로 앞을 다투며 올라온다.
둠벙 속에는 가장 먼저 도롱뇽이 몰래 나와 알을 낳고, 이에 뒤질세라 개구리들이 부산스레 사랑을 나누면서 가래침과 같은 알을 지프라기 같은 풀줄기에 더덕더덕 붙인다. 두꺼비도 긴 잠에서 깨어나 느릿느릿 멀리서 찾아드는 곳이 바로 둠벙이다. 긴 겨울이 막 지나간 둠벙에서 아직 물은 차기만 한데, 그래도 그 속에서 이미 새생명이 잉태하고 새 삶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점차 땅이 풀리고 얼음이 녹아 둠벙의 물이 넘쳐 도랑을 따라 흐르기 시작하면, 농부들이 물길을 정비하고 가래질로 논두렁을 보수한 후에 논의 묵었던 흙을 쟁기로 갈아 엎는다.
둠벙을 찾아온 봄이 이쯤이면 모내기 철을 맞이하고 서서히 여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가 되면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던 보릿고개처럼, 어김없이 늦봄마다 찾아오는 심한 봄가믐에 시달리게 되는것이다.
진정으로 둠벙이 자신의 가치를 입중하는 시가가 바로 이때이다.
새벽부터 농부들은 둠벙을 찾아와 두레질로 둠벙이 가득 품고있던 물을 퍼내기 시작한다.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거나, 가끔은 보름달이 둥실 떠오른 밤중까지 둠벙의 물을 퍼내고 또 퍼낸다. 긴 겨울동안 눈이 서서히 녹으며 찾아들었던 물을 고스란히 내어놓고도 모자란 부분을 둠벙은 끊임없이 스스로 내어 놓아야만 하는 때가 바로 이때인 것이다. 둠벙은 자신의 깊은 속에까지 가두어 놓았던 물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둠벙이 내어놓은 물은 농부드ㅡㄹ이 손질해 놓은 물꼬를 따라 이곳저곳 사방으로 흘러내려 간다.
그리고 가끔은 이 물꼬를 따라 벌어지는 농부들의 사소한 말다툼과 실갱이를 둠벙은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함임을 알고있기에 말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내어줄 물이 고갈되었음을 알게도면 농부들은, 둠벙의 바닦을 더 긁어 올리고 나무를 가져다 말뚝을 박거나 돌들을 날라다 방죽을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손질을 한다. 이제껏 희생한 둠벙에 대한 보상이자 감사와 위로이다.
그러나 이 날...... 이제껏 둠벙 안에서 여유로운 삶을 누리던 물고기들에게는 매년 찾아오는 일생일대의 수난일이다.
붕어. 잉어. 미꾸라지. 논우렁이. 가재. 송사리. 갈겨니. 피라미. 민물새우. 납자루. 버들치 등........ 그동안 둠벙의 주인행세를 하던 물고기들이 바닥의 흙과함께 퍼올려져서 동네 꼬맹이들이 들고 늘어선 바구니와 세숫대야 안으로 꼼짝없지 잡혀들어간다.
이날 해가지면 마을은 잔치집이 된다. 그동안 마주보면 함께 땀흘린 사람들에 대한 수고를 위로하고, 물꼬때문에 벌어졌던 다툼에 대한 화해의 잔치가 크게 한판 벌어진다. 그러면서 농부들은 어서 이 긴 가뭄이 끝나고 비가 내려주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장마가 찾아들면 때는 이미 여름이다.
둠벙가의 풀들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멀리 가아이나 큰 개울에서부터 가득 차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새로운 물고기들이 올라와 둠벙안에 새롭게 둥지를 튼다. 뜸브기며 온갖 새드르이 둠벙 주위를 찾아들고 밤이면 바딧불이 둠벙가를 밝혀준다. 뭇짐승들이 물을 축이러 둠벙가를 드나들기도 한다.
마을 주위의 둠벙으론 하루에도 너댓번식 아이들이 찾아와 훌러덩 벗고 텀부덩거리고, 밤엔 아낙네들이 남의 시선을 피해 찾아와 등목을 한다.
가끔식은 큰비가 내리는 날 방죽이라도 터질세라 밭주인 논주인들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바탕 삽을 들고 낫을 들고 소란을 벌이기도 한다.
바람결이 차가워질 때면 들녁은 풍요로움 가득한 누런 색으로 변해 갈 터이고, 이내 세찬 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 퍼붙는 겨울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둠벙은 이제나 그제나 그자리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놓여있을 것이다.
호반의 도시 라는 수식어가 전혀 부끄럽지 않은 (충주)는 옛날부터 수없이 많은 둠벙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고 이름난 둠벙은 바로 함지(함지못)였다. '시내에서 남족으로 8리인 남변면에 있고 주위가 1.908 자 이며 수심은 3 자이다.' 라고 (여지도서)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모습 같은 저수지(연못)가 아니라 들녁 한복판에 덩그렇게 놓인 카다란 둠벙이었던 것이다. 고을 인근에서 가장 큰 둠벙이었기에 이름이 대제(大堤)라고 했다. 인근에서 가장 큰 둠벙이었기에 대제라 불렀고, 그곳이 바로 함지못인 것이다.
'시내에서 남쪽으로 5리인 남변면에 있고, 주위가 2.068 자이며 수심은 3 자이다.' 라고 호암지를 소개하고 있다. 본 이름은 소제(小堤) 이다. 여기 둠벙 주위로 연꽃이 많이 피었다고 해서 연지(蓮池)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 보자면 분명 호암지가 함지 보다도 훨씬 컷음에도 소제(小)라고 적혀있다. 작은것에 대(大)를 붙이고 큰 것에 소(小)를 붙인 뜻은, 아마도 초기의 둠벙의 크기로는 분명 함지못이 크기에 대제라 불렀는데, 필요에 따라 사람의 손길이 가해져서 점차 소제인 호암지의 둠벙 크기가 확장되었을 것이라 추론된다.
함지나 호암지가 모두 모시래들의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매우 중요한 둠벙이었는데, 함지로 들어오는 수량에 비해 호암지로 들어오는 수량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여러차례에 걸쳐 호암지의 둠벙을 증축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대제와 소제라 이름으로 둠벙의 구실에 충실하던 둠벙들은 일제치하였던 1932년에 새로운 모습과 신분을 맞이하게 되었다.
둠벙에서 연못(저수지)로 처지가 바뀌게 된것이다. 충주에 부임한 일본인 수리조합장 스즈끼 세이찌는 인부들을 강제동원하여 11년이라는 오랜기간동안 강제 부역을 시켰고, 결과로 1932년 마침내 호암지(소제). 함지못(대제)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준공하였던 것이다.
함지못의 경관이나 이용 가치나 현재모습은 실로 안타깝기가 그지없으나, 호암지(소제)의 경우는 호수공원으로 탈바꿈 하여 시민들로 부터 크게 사랑을 받고 있다.
가히 충주의 자랑할 만한 명소중의 하나라 하겠다.
다음으로는 이제는 사라진 대가미제(大加味堤)를 꼽을 수 있겠다. 시내의 북쪽에 있으며 충주농업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너른 어정이들(漁汀坪)의 관개를 담당하던 둠벙으로 몽리면적은 62정보에 달하였으나, 충주도심이 그쪽으로 발전 확장되어가면서 논밭이 사라지자 저수지로서의 이용가치가 떨어져 마침내는 흙으로 메꾸어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현재의 법원 앞 대가미 공원이 그곳이다.
그 외에도 충주고을 인근에 이름난 둠벙들이 많이 있었다.
하방지(下方池)가 있는데, 2가지의 나뉘어 있는 유래에 대하여 확실한 고증은 어렵다. 다만 대단히 유명한 둠벙으로 하방지가 있었던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의 전신전화국 자리에 커다란 둠벙이 있는데 이름이 하방지였다. 붕어를 비롯한 어류가 매우 풍부하였다.
다른 하나는 충주 향교의 서쪽으로 대단히 큰 둠벙이 하나 있는데, 어종이 풍부하여 고을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낚시를 즐겼으며 겨울이면 동네 꼬마들이 몰려와 얼음지치기 놀이를 즐겼다. 조선조 고종화아제 광무20년(1906)에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교)를 짓기위해 메웠다 라는 기록이 있다.
충주 교현초등학교의 경우는 초기 전신이 충주읍성의 관할부서의 하나로 있던 (충청북도 관찰부 공립소학교)가 전신이다. 충주읍성 동헌의 남동쪽(현 관아공원 담장을 벗어나 동남쪽으로 성벽의 끝자락)에 있던 객사를 빌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것이 1905년 (공립충주보통학교)로 정식 설립허가가 나면서 개울건너 현 충주향교 내의 건물인 명륜당에서 정식 설립되었다. 그러다가 여러가지 사정으로 다시 관아 동헌의 객사인 본래의 자리로 한동안 이전하였다. 그러다가 1911년 마침내 현재의 자리로 학교건물을 지어 이전하였는데, 그 부지에 대단히 큰 둠벙이 있었던 것을 메꾸고 학교를 지었다고 알려져 왔다.
여기에 덧붙여서, 전해오는 엣기록에는 충주읍성의 성 안에는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전해져 왔는데, 1869년 충주목사로 있던 조병로가 충주읍성을 개축하면서 써내려간 기록에 의하면 읍성 동헌의 뒷쪽으로 2개의 연못이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치는 지금은 문화회관과 교육청 자리라고 분명하게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록 조금 떨어진 인근이긴 하지만 전신전화국 자라애 있었다는 하방지는 엣기록의 위치표기상의 오류이거나 또 다른 이름이 혼동된 오류로서, 아마도 현 교현초등학교 운동장 자리에 있던 커다란 둠벙이 하방지가 아니였을까 하고 추론해 본다.
그런가 하면 소지(小池)가 있었는데, 읍성의 동문밖 개을건너였다고 하니 아마도 지금의 경찰서장관사 자리를 일컷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곳에 커다란 둠벙이 있었던 것이다. 충주가 시로 승격하여 시가지를 재건하던때 까지 말이다.
그런가 하면 남산아파트가 들어선 염바다들에 커다란 둠벙이 있어 (염바다 못)이라 했고, 남산 응골 약수터, 문화동 숲골 못터, 범바위의 찬샘, 상단리의 박샘. 뱀 웅덩이. 사발 웅덩이, 탄금대의 옷샘, 삼원초교 옆의 봉방 박샘, 현 시청 서쪽의 금제지, 쇠지울 못, 연수동 동수마을의 귀미실 못, 동수마을 못, 금골 못, 배나무실 못, 서흥마을 산중턱의 산우물 등등이 이곳 충주고을의 둠벙들이었다.
들녁을 거닐다 논두렁에 마른 억새줄기가 빼곡하고 그 아래로 질펀한 물구덩이가 엿보이면 그곳은 영락없는 지난날 둠벙이 있던 자리이다. 그 옆의 밭둑이나 논둑에 왕버들이나 고리버들 두 세구루 남아있다면 더욱 틀림없는 사실이다.
파란 하늘에 떠가는 뭉게구름이 비치는 잔잔한 수면 옆으로 개구리밥이 물 위에 떠있고 미나리 소복하게 자라던 둠벙말이다.
물장군이 수면 아래로 숨고 이슬 떨어지는 소리에 소금쟁이 줄행랑을 치던 그 둠벙말이다.
개구장이 병구가 둠벙에서 물방개 한 마리 잡아다가 세숫대야에 놓고서 , 학교앞에 불쑥 나타나던 물방개 뽑기장수 흉내를 내면서 어줍짢게 사기(?)가 아닌 장난(?)으로 노성이 몽당연필 하나를 뺏을 심사를 부리던 그 옛날 옛적에 말이다.
둠벙은 이제 사라진 이름이 되었다.
아스라해져가는 우리네의 추억처럼 말이다.
우리의 어린시절 기억속의 그 둠벙이 새삼 그립다.
둠.벙.
둠벙둠벙툼벙텀벙텀벙..........
세상엔 사라져야만 하고 사라져서 좋은것도 있겠지만........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도 참으로 많이 있다.
나는 앞으로도 사라져서 허전한 것들에 대한 관심과 담긴 옛 이야기들을 찾아내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려 한다.
---- 둠벙을 찾아 나섰다가 허탕치고 돌아오던 날에...........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