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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영화 오디세이(Odyssey) 논란(論難)에 대한 소고(小考)'

by 피안재 2026. 9. 18.

 

마침내 10년이 걸렸던 트로이 전쟁(Trojan War)이 모두 끝나고 고향 이타카(Ithaca)로 돌아가게 된 오디세우스(Odysseus)는 전설의 섬 아이아이에(Aiaie)에 들리게 되었는데, 하필 그 섬이 신화에 등장하는 마녀 키르케(Circe)가 사는 섬이었다. 키르케는 마법을 사용해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모두 늑대. 사자. 돼지 등의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행히 외할아버지뻘인 헤르메스(Hermes)의 도움으로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들지 않았고, 키르케를 제압하여 항복을 받아내고 부하들을 다시되찾았다.

하지만 당당하게 여신에 반열에 올라있는 키르케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다. 항복의 조건으로 오디세우스와의 동침을 요구하였으며, 이 동침은 이후로 1년여간의 기나긴 동거로 이어진다.

이쯤에서 사전에 분명하게 한가지 짚고 넘어갈 사안이 생기는데, 바로 그리스 신화의 열두 신에 들어가는 헤르메스와 오디세우스의 관련성이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의 주인공 아킬레스(Achilles)는 제우스의 증손자이자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로 (용맹한 영웅)의 상징이 되었다. 영원한 삶보다 위대한 영웅의 명성을 택했고 전쟁 중에 비명횡사했다.

반면에 <오디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용맹스런 영웅과는 상당히 거리감이 좀 생기는 대신 남다른 지혜를 가진 영리한 영웅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후대에 서사시를 연구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수의 안티팬이 생겨났다. 이제까지는 오디세우스를 지혜와 총명을 갖춘 새로운 유형의 영웅으로 보아주었지만, 진실은 일단 저지르고 보는 얄팍한 잔머리 대왕에다가 야비하고 비열한 무늬뿐인 영웅이라는 평가가 내려진 것이다.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에서는 눈물의 회한으로 과거를 통렬하게 반성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서사시에 분명하게 적혀 있는 내용에 따르면 눈물의 반성만으로는 결코 씻을 수 없는 악행을 이미 여러 번 저질렀던 때문이다. 자신의 꼼수가 들통이 나거나 대중 앞에서 수치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끝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거나, 심지어 타인의 손을 빌리는 방법으로 죽음의 복수를 끝내 저질렀던 비열한 영웅이 바로 오디세우스였다. 그것은 영화에서처럼 회한 가득한 눈물의 반성만으로는 결코 씻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결국, 최후에 그는 그에 걸맞는 죄값을 치루게 된다.

바로 그런 잔머리와 비열함을 모두 외할아버지에게서 받았다.

헤르메스는 흔히 좋은 의미로 전령, 나그네, 상업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이면에서 헤르메스는 도둑들의 신으로 절대적 추앙을 받았다. 그런 헤르메스가 외손자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뛰어난 말재주와 탁월한 거짓말 능력을 선물로 주었으니, 오디세우스의 탁월함은 모두 거기에서 기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팔라메데스(Palamedes)의 죽음이나,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 사이에 벌어진 헤라클레스의 갑옷을 놓고 벌인 언쟁에서 오디세우스의 비열함이 적나라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겠다.

호머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라는 서사시를 창작해낸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되자 이에 대한 질투와 시기였을까, <일리아드>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어설픈 <오디세이>에 대해 비판을 넘어 감히 도전해 보고 싶었음일지, 그것도 아니면 호머가 멋스럽게 치장해 놓은 무늬뿐인 영웅 오디세우스의 가면을 벗겨버리고 싶었는지, 호머 사후 200년쯤이 지나서 에우가몬이라는 후배 시인이 나타나 2부작 <텔레고네이아>를 발표했다.

주인공 텔레고노스는 오디세우스가 키르케와 1년 동거하는 동안에 태어난 아들이다. 오디세우스는 아들의 탄생을 알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이복동생이 하나 더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키르케는 성장한 아들에게 이타카로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알려주었다. 이타카에 도착해서 자신을 훈계하는 노인을 만나 넘치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결투를 벌여 살인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죽임을 당한 노인이 바로 아버지인 오디세우스였다. 결투 도중에 오디세우스는 텔레고노스가 자신과 키르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에 의하면 바다에서 온 존재에게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바다에서 온 텔레고노스의 가오리 독가시 창에 죽게 된다는 것이 모두 신탁의 계시에 따른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어쨌거나 죽었다.

그러자 어김없이 이번에도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벌어진 사태를 수습한다.

텔레고노스는 아테나의 가르침대로 과부가 된 큰엄마 펠레로페와 이복형 텔레마코스를 데리고 키르케가 있는 아이아이에(Aiaie) 섬으로 돌아와 성대하게 오디세우스의 장례를 치뤘다.

영웅 오디세우스의 유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리스 신화>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전쟁 장면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가 (19금 막장 드라마)라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결국, 나머지 이야기도 당연하게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고 막장의 맥을 기어코 이어나간다.

오디세우스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유족 네 명이 한집에서 모여살다보니 오순도순이 아니라 묘한 기류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키르케가 그만 오디세우스를 꼭 빼닮은 텔레마코스에게 반해 결국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자신만 불륜을 저질렀음이 창피했음인지 키르케가 결사적으로 중재에 나서서 이번엔 텔레고노스가 펠레로페를 유혹해 품어버리고 말았다.

<그리스 신화>의 정통성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멍멍이판이 재현 완성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여신인 키르케는 자신을 포함하는 이 가족위에 불로불사의 축복을 내리고, 신계(神界)인 엘리시온의 땅에서 행복하게 영생을 보냈다고 해피앤딩으로 끝을 맺는다.

결론적으로 ‘오디세우스만 한 방에 X 됐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이 소문으로 전해져왔다.

현대에 들어 호메로스의 작품과 너무나 크게 다른 충격적 이야기 전개와 요즘의 시선에서 조차 이질적으로 보이는 윤리적 관념으로 인해 <텔레고네이아>를 '원작자 호머의 작품을 망친 졸작'으로 폐기처분 해 버리자는 주장도 있기는 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에 기록된 오디세우스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패륜의 죄를 직접 읽어보셨습니까?’

‘그 죄가 놀란이 해석한 방식의 눈물젖은 반성으로 엄청난 죄가 모두 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과응보(因果應報)란 고사성어에 담긴 뜻은 인간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신들의 세상에서도 제대로 적용되는 것이 신탁(운명)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혹, 이런 결과가 모두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던 팔라메데스(Palamedes)의 사주에 의한 복수였다면, 전쟁은 아직 모두 끝난것이 아니지 않을까?'

마녀 키르케(Circe)야말로 진정한 최후의 승자가 아니었을까?

3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의 영화 <오디세이> 중에서 가장 어둡고 무겁고 음산한 분위가 펼쳐지고, 어마어마하게 장중한 음악이 보고 있는 이들의 심장과 가슴이 터트려버릴 정도로 마구마구 짓누르기 시작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야말로 놀란 감독 특유의 영화적 역량이 최고의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만은 화면속의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키르케의 가르침에 따라 망자의 섬으로 간 오디세우스 일행은 특별한 의식을 통해 망자가 되어버린 자신들의 전우들과 집으로 가는 길과 방법을 알려줄 예언자를 만나게 된다.

가장 먼저 나타난 망자는 트로이 목마 작전을 위해 부득이하게 희생시켰던 이타카의 병사 시논이었다. 시논은 다짜고짜 자신까지 그렇게 속였어야 했느냐며 오디세우스를 원망하고, 오디세우스는 그에게 연민과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보인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시논은 트로이 목마 작전의 총알받이로 쓰여지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후 시논은 저승에서 이타카에 두고 온 자신의 아버지를 저승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아프고 억울한 과거가 회상으로 등장한다. 가난했던 시온은 아버지를 살리고 싶은 간절함에 유력가 집안인 안티노오스에게 아버지를 대신 맡아서 부양해 줄 것을 약속받고 안티노오스 대신 전쟁에 참여하는 길을 택했다. 징병 선발 과정에서 이미 오디세우스는 이들의 밀약을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묵인했다. 나름 오디세우스 자신에게도 득이되는 유리한 선택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안티노오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결국에 시온의 아버지는 굶어 죽고 말았다. 이에 시온은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대신해 안티노오스에게 복수해 줄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오디세우스는 이를 실행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후 만나게 된 망자는 그들의 상관이었던 트로이 전쟁 총사령관 아가멤논이었다. 그는 자신이 귀향하면 크게 환영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전쟁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친딸을 제물로 바친 일 때문에 아내의 원한을 샀고, 결국 귀향한 뒤 아내와 정부에게 살해당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에게 한 가지 조언을 남기는데, ‘당신은 정문으로 가지 말고, 변장해서 고향으로 귀향하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마지막에 기다렸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나타난다.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여러 가지 예언을 전한다.

집에는 돌아가게 되겠지만 혼자만 돌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그의 앞에 남겨진 시련은 아직 진행형이었던 것이다.

 

영화 <오디세이>에서 망자들의 섬(하데스)을 방문하는 오디세우스 일행의 여정이 영화 전체를 통털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런 망자들의 섬 방문 이야기의 주인공은 시논으로, 그의 이름은 ‘해를 입히는 자. 다치게 하는 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떠한가? 이쯤되면 시논이란 존재가 ‘나그네와 도둑들이 추앙하는 신’ 헤르메스나 ‘비열한 잔머리 대왕’ 오디세우스와 어떤 방식으로 든 연관이 이어질 것 같은 약간은 불길한 그런 느낌말이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왜 시논이란 존재를 뜬금없이 등장시켰을까?

원작인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는 시논이란 존재가 아예 없다. 시논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다음 이야기인 3부에 해당하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 2권에 비로소 등장하는, 호머의 이야기에는 존재하지 않은 허구로 창조된 인물에 해당한다.

호머의 원작에서 오디세우스의 망자들의 섬(하데스) 방문의 핵심인물이자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영화에서는 가공의 까메오로 출연한 시논이 테이레시아스를 압도해 버린다.

놀란 감독은 시논을 통해서 원작에서 새로운 유형의 영웅으로 그려진 오디세우스를 신화 속의 신에 범접하는 영웅이 아닌, 인간적이고 실수도 많이 하고 탐욕의 죄를 짓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속죄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영역에 끌어내리는 방편으로, 시논을 그 증인으로 끌어들였다고 본다. 시논의 역할을 통해 원작에 등장하는 사람들 수를 줄일 수 있었고, 테이레시아스를 비롯한 소환된 증인들의 증언을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슬쩍 본문과 다르게 비틀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 비평을 할 것인지 호평을 할 것인지는 오로지 영화를 본 관람객 하나하나의 주관적 판단에 맡겨지게 된 것이다.

망자의 섬(하데스) 방문의 목적이며 앞으로의 모든 진행에 관한 예언을 들어야 하는 오디세우스 일행의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는 오로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감을 모두 시논이 가져가 버렸다. 오디세우스의 통렬한 반성과 후회를 시논과의 대화 속에서 속죄받는 듯한 약간 허무맹랑한 연출의 결과로, 정작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은 ‘죄 사함을 받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는 수도사에게 돌아가는 길에 조심하라며 일러주는 길 안내도’ 정도로 심각하게 격하되고 훼손되고 말았다.

‘헤브라이즘이 헬레니즘을 죽여버렸다면, 시논의 등장으로 테이레시아스라는 예언자의 능력 또한 죽어버렸다.’

‘시논은 거짓과 위선의 탈을 쓴 영웅 오디세우스의 죄를 사해주고 세속의 인간적인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망자들의 섬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시논은 오디세우스를 보자마자 거짓말쟁이라고 분노를 표출한다.

영화 시작 장면의 트로이 해변 백사장에 처박힌 거대한 목마를 찾아온 눈부신 은빛 갑옷 차림의 트로이 기병들에게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승리를 약속하는 징표’라는 말을 전하고, 그 자리에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오디세우스가 아테네 여신의 도움으로 트로이 목마를 만들었으나, 이 목마가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가야만 계책이 성공하게 되는 막다른 상황에서, 시논을 불손한 사전 의도를 가지고 속여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몬 것이었다. 시논은 오디세우스를 믿고 존경했기에 따랐는데, 결과로는 자신을 속이고 적에게 무방비로 넘겨 비참한 죽음을 맞게 방치했던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지시대로 따랐음에도 버려지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기에 분노에 차서 따지고 들었는데, 오디세우스의 대답은 ‘인간은 나약한 존재여서 적들에게 거짓말을 전한 시논이 혹시라도 고문이라도 받게 되면 목마의 진실을 실토하게 될까 봐 부득이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오디세우스를 위해서는 언제든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부하를 다 믿지 못해서 거짓으로 꾸며 속인 뒤에, 목적 달성 후에 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도록 내몬 것이다. 차마 신의 뜻이라고 거짓을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리스군의 승리를 위해서였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던 오디세우스였다. 실제는 전쟁에서 최고의 승훈을 따낸 영웅이 되고 싶었던 오디세우스 자신의 야망때문이었으면서 말이다. 시논이 망자의 섬에서 우연히 죽은 오디세우스의 영혼을 만났어도 억울했을 판에, 저는 버젓이 살아서 집에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찾아왔으니........'

시논의 시신을 정중하게 거두어 장사지냈으며 신들에게 기도도 드려주었다는 오디세우스에게 ‘죽은 다음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당신의 거짓 때문에 내가 죽었고, 지금 당신은 말짱하게 살아서 이렇게 찾아왔잖아?’라고 따진다.

시논은 오디세우스의 묵인하에 안티누스를 위해 뽑았던 징병 표식을 건네주며 꼭 복수를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자기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억울한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이번 전쟁으로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해 떠돌고 있는 병사들의 넋이 수천이나 되니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거든 언제고 서쪽 끝으로 가서 그 영혼들의 넋을 기려달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이 대목 또한 원작과는 전혀 다르다.

시논이란 인물이 호머의 <오디세이>에는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데, 트로이 전쟁의 완성본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인물임에도, 또 이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시논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발자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논이 이타카 출신의 젊은이로 평소 오디세우스를 잘 알고 따랐기에 트로이 전쟁에 기꺼이 따라나선 용기 있는 젊은이였다는 사실까지만 서로 간에 말이 들어맞는다.

 

놀란은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와 웅장하고 무거운 사운드와 거대한 영상화면을 무기로 오디세우스의 망각의 섬(하데스) 방문을 전혀 새롭게 각색해 버렸다. 그리고 그 방문의 목적과 새롭게 각색을 해야 했던 이유를 모두 시논이라는 가공인물을 까메오로 출연 시키면서 자신의 의도를 충분하게 달성시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사시에 담긴 진실의 가치는 아무래도 원작이 훨씬 압도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오디세우스의 번민과 후회와 반성을 위해 시논의 등장이 꼭 필요했다 치더라도, 망각의 섬(하데스)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테이레시아스이어야만 했다. 테이레시아스가 없는 오디세우스의 귀향 여정은 애초부터 절대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원작대로 테이레시아스를 전면에 내세워 중심에 굳건하게 세워두고, 시논을 세속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에게 마지막 장면에 나타나 전송하면서 따지기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당부를 하는 스토리로 꾸려나갔으면 훨씬 효과적이고 명분이 살지 않았을까 싶다.

망각의 섬(하데스) 방문 영상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으면서도, 또한 뭔가가 빠진 듯 아쉬운 장면으로 각인되어 기억에 잔상처럼 남았기에, 이쯤에서 호머의 서사시 원작을 옮겨와서 잔상으로 남아 있는 놀란이 표현한 영상미와 비교해 보고자 한다.

 

 

 

키르케가 대답했다.

‘북풍이 그대를 죽은 자들의 나라로 인도할 것이오. 대양의 끝까지 가면 키메리오이족이 사는 땅이 나타날 것이지만, 그곳은 짙은 안개와 구름에 덮여 있어 태양의 빛이 결코 닿지를 않소. 그곳에서 배를 멈추고 페리플레게톤강과 코키토스강이 아케론강으로 합수되어 흘러드는 곳으로 가시오. 두 강이 만나는 바위 곁에서 땅을 파고 죽은 자들을 위한 제사를 올리시오. 먼저 꿀을 섞은 우유를 붓고, 이어 달콤한 포도주와 물을 부은 뒤 보릿가루를 뿌리시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가장 좋은 암소와 보물을 바치겠다고 죽은 자들에게 약속하시오. 마지막으로 검은 숫양과 암양을 희생시켜 그 피가 구덩이로 흐르게 하시오. 그러면 죽은 자들의 영혼이 피를 마시기 위해 몰려올 것이오. 그러나 테이레시아스가 나타나기 전에는 어느 영혼도 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시오.’

키르케는 테이레시아스가 나타나면 그가 오디세우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길과 방법을 모두 알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

태양이 비치지 않는 키메리오이족의 땅은 짙은 안개와 구름에 영원히 덮여 있었다.

태양이 하늘로 올라갈 때도, 서쪽으로 기울 때도 햇빛은 그곳에 닿지 않았다. 끝없는 어두운 밤만이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배를 해안에 세웠다.

제물로 바칠 양들을 끌어내고 키르케가 알려 준 장소를 찾아 어두운 땅을 걸었다. 마침내 두 강물이 만나는 곳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칼을 뽑아 땅에 구덩이를 팠다. 먼저 꿀을 섞은 우유를 부었다. 그 위에 포도주와 물을 차례로 붓고 보릿가루를 뿌렸다. 그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향해 기도했다.

‘제가 무사히 이타케로 돌아간다면 새끼를 낳지 않은 가장 좋은 암소를 바치겠습니다. 불 위에는 귀한 보물을 올리겠습니다. 테이레시아스에게는 온 양 떼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검은 숫양을 바치겠습니다.’

기도를 마친 오디세우스는 숫양과 암양의 목을 베었다.

검붉은 피가 구덩이 안으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젊어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 늙어서 지친 사람들,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처녀들, 전쟁터에서 창과 칼에 쓰러진 전사 등 다양한 영혼들이었다.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영혼도 있었다. 그 갑옷은 몹시 낡고 헤어져 있었다. 그들은 희미한 울음소리를 내며 구덩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오디세우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는 칼을 뽑아 든 채 그들 앞을 막아섰다. 테이레시아스가 나타나기 전에는 어느 영혼도 피를 마시게 해서는 절대로 안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황금 지팡이를 든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나타났다.

그는 죽어서도 신이 지혜와 정신을 간직한 유일한 예언자였다. 다른 영혼들은 기억과 생각을 잃고 그림자처럼 허공을 떠돌았지만, 페르세포네 여신은 그에게만 온전한 정신을 허락했었다.

테이레시아스가 오디세우스를 알아보고 말했다.

‘라에르테스의 아들, 지혜 많은 오디세우스여. 살아 있는 그대가 어찌하여 햇빛을 버리고 이 어두운 땅까지 찾아왔는가? 칼을 거두고 내가 피를 마시게 하시오. 그러면 그대가 알아야 할 진실을 말해 주겠소.’

오디세우스가 물러서자 테이레시아스는 검은 피를 마셨다. 그리고 예언을 시작했다.

'위대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Tiresias)여. 그대는 왜 장님이 되었습니까? 무슨 죄를 지어 망각의 섬(하데스)에 머물고 있단 말입니까?'

‘그대는 달콤한 귀향을 원하지만, 그 길은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 만만치만은 않을 것이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대를 끈질기게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오. 그대가 아들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했으니 포세이돈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대와 동료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잘만 다스릴 수 있다면, 모진 고난을 겪기는 하겠지만 마침내 모두 함께 고향에 닿을 수 있을 것이오.’

잠시 숨을 고르던 테이레시아스는 가장 중요한 경고를 전했다.

‘하지만 명심하시오. 그대들의 배가 트리나키아섬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와 양을 보게 될 것이오. 그 짐승들을 절대로 해쳐서는 안 되오. 그대들이 헬리오스의 신성한 가축을 건드리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생각만 한다면, 언젠가는 모두가 이타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만약에 동료들이 그 소를 잡아먹는다면 배와 사람들은 모두 파멸할 것이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종국엔 그대 혼자만 살아남아 남의 배를 타고 오랜 고통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오.’

폴리페모스가 포세이돈에게 복수를 해달라고 울부짖으며 외치던 저주의 내용과 똑같은 운명이 예고된 것이다.

모든 동료를 잃고 남의 배를 타고 돌아가게 해 달라는 저주가 이제 예언자의 입을 통해 되풀이되고 있었다.

 

이처럼 오디세우스는 망자의 섬(하데스)에서 테이레시아스를 만났고, 그로부터 무서운 예언을 들었다.

테이레시아스가 돌아간 후에, 함께 동행한 부하들이 하나같이 테이레시아스로부터 들은 예언의 내용을 물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대답을 회피하고 외면했다. 이번에도 또 비밀에 붙여버렸다. 그 비밀의 속셈은 바로 시논을 죽음으로 내 몰았던 비밀과 같은 것이다. 혹시나 부하들이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에 대해 알게 된다면 트리나키아 섬에서의 우려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지막에 자신만 혼자 이타카에 돌아갈 것이라는 예언을 부하들이 눈치채게 되면, 어쩌면 그 신탁을 어그러트리는 다른 말썽을 부리지 말란 법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오디세우스 자신만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예언이 이미 있었는데, 이걸 일행 모두에게 퍼트려 자신에게 유리한 신탁이 혹시나 망가지면 절대 안되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태생적으로 이미 ‘All or nothing’ ‘Together’를 입으로 외쳐왔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나의 필요에 따라’라는 전제를 가지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었다.

자신있게 나서서 ‘예언자의 신탁은 너희들이 모두 죽게 되어 있다고 말했어. 하지만 나는 죽어도 혼자 돌아갈 생각이 없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함께 가보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잘못되어도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일부러 말했다가 나까지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해’라는 선택을 스스로 정당화시킨 아주 특별하게 총명한 영웅이었다. 그런 특별한 영웅심이 시논을 그렇게 냉정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시논과 안티누스 사이의 부당한 거래를 왕의 신분으로 목격하였으면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나름 유익하다는 판단에서 눈감아 줄 때부터 이미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외할아버지 헤르메스에게서 거창한 말솜씨와 능수능란한 거짓말을 탄생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결국 야누스의 이중성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나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테이레시아스가 떠난 후 오디세우스의 어머니 안티클레이아의 혼령이 피를 마시고 아들을 알아 본다. 생각치도 못했던 모자상봉이라.

태고의 명망 있는 여인들의 흔령이 나타난다.

아가멤논의 혼령이 나타나 아내를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아내와 정부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아킬레우스의 혼령이 나타나 지하세계의 통치자가 되느니 차라리 지상의 품팔이가 휠씬 낫다고 자신의 처지를 항변한다.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혼령이 자신을 제치고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차지한 오디세우스에게 원한을 보인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최고의 공적을 차지하기 위하여 야비한 술수를 부려 아이아스가 스스로 죽게 만들었다.

멀리서 혼령들을 심판하는 미노스가 보인다. 미친 X의 마구잡이 칼부림이 바로 저런 것일 것이다. 오디세우스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왔다.

사냥하는 오리온과 타르타도스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티티오스, 탄탈로스, 시지포스가 보인다.

오디세우스는 마지막으로 헤라클레스의 혼령을 만난 후, 분노해 떼로 몰려오는 트로이 전쟁에서 전사한 자신의 군대에 쫓겨 가까스로 지하세계를 탈출해 지상으로 돌아왔다.

이 여정에 시논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놀란 감독은 이 많은 군중들의 참여와 대화를 모조리 과감하게 생략해 버리면서, 가공의 까메오로 등장시킨 시논의 입과 존재를 통해 전혀 다른 깊고 인상적인 장면으로 대체시켜 버렸다.

어쨌거나 그랬음에도 죽은 자들의 나라에서 오디세우스가 얻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삶의 소중함’이다.

아킬레우스는 저승의 왕이 되기보다 가난한 사람의 품꾼으로라도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에게도 죽음 뒤의 명예보다 살아 있는 하루가 더 귀했다.

그의 귀향은 이제 더욱 절박해졌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왕좌와 재산을 되찾는 일이 아니었다.

아내와 아들, 늙은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을 때 그들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너무 늦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 그것이 오디세우스가 죽은 자들의 나라에서 배운 가장 아프고도 소중한 진실이었다.

다만, 오디세우스는 종국에 달랑 혼자만 살아서 고향에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함께 고생하는 부하이자 전우이자 친구들에게 '너무 애쓰지 마. 너희들은 집에 못가. 가다가 죽을 운명이래.'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들에겐 죽음 이외의 선택할 수 있는 운명이 아예 없었다. 신의 핏줄을 가진 위대한 영웅 오디세우스라면 운명을 거부하면서 그에게 모든것을 헌신한 그들을 보살펴줄 책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알았으면서도 그는 아무런 도전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에게 내려진 텔레고노스를 통한 비극적 결말은 그렇게 살아 온 오디세우스의 쌓인 선택들에 대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었을까?

단테가 <신곡>에서 확인해 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오디세우스가 지금 지옥에서 험한 꼴로 형벌을 받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게 살았을 때 좀 잘하라니까 말을 안듣더니만.'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일과 병행하다보니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