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여 진도에 가거들랑 시나 글씨나 노래자랑일랑 일절 하지마시게. 크게 낭패를 보고싶지 않으면 말일세.’
‘왜? 양반 문화를 엄하게 금지하고 단속하는 유배지라서 하는 말인가?’
‘진도(珍島)에서는 지나가는 개도 붓을 물고 다니고 울음소리도 타령 장단에 맞추어 짖는단 말일세.’
‘헐! 그게 정말인가? 진도에선 개도 글을 안단 말인가?'’
‘그것뿐 인줄 아나? 진도에 사는 허씨들은 빗자루만 들어도 땅바닥에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정선의 <금강산도> 못지않은 산수화를 쓱싹 그려낸단 말일세. 빗자루 대신 몽둥이를 주면 대충 흔들어 대기만 해도 다들 한석봉이나 추사여. 진도란 바로 그런 곳이여.’
'헐!!!"
진도 읍내를 지나 산자락을 향해 올라가는 길을 따라가면 삼별초의 원한 서린 왕무덤재가 나온다. 그 고개마루를 지나 내리막 길을 택하고 나면 저만치 골짜기 사이로 아담한 마을이 하나있어 고즈넉한 자태를 드러낸다.
이곳 지명은 사천리(斜川里)지만 진도 사람들은 흔히 비끼내골이라고 하는데 첨찰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이 동리 앞을 비껴간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 쫓기다 이곳에서 일대격전을 벌였는데 하천이 피로 물들어 '피끼내'라 불렀던 것이 세월이 흐르다 보니 ‘비끼내’로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운림산방(雲林山房)은 바로 이 비끼내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위치해 있다.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노년에 모든것을 내려 놓고 이곳에 터를 잡아 은거하면서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던 살림집이자 작업실이자 미술 교실이었던 아주 뜻깊은 장소가 바로 여기 운림산방(雲林山房)이다.
< 인생이란 기나긴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인연들>
엄청난 물난리였다.
한양 도성이 떠내려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나흘째 지독한 폭우가 연일 한양 땅에 쏟아져 내렸다.
그 난리통을 헤치며 어둠이 찾아들 무렵에 승복을 걸친 남루한 사내가 도성 앞에 불쑥 나타났다. 임금이 거처하는 구중궁궐의 대문격인 광화문이 손에 닿을 듯 눈앞에 위용을 드러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해 온 조선의 심장부에 남루하기 이를 데 없는 스님이 비를 흠뻑 뒤집어쓴 채 지금 막 당도한 것이다. 스님은 광화문을 힐끗 돌아다보고는 이내 왼편으로 인왕산 자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이미 익숙한 길을 가듯이 태연히 비를 맞으며 걷던 스님은 불과 얼마 가지 않아서 궁궐의 서쪽 망루인 서십자각 앞에서 공터를 지나 대궐같이 생긴 커다란 저택(현 종로구 적선동 66번지) 앞에 멈춰섰다.
‘이리 오너라.’
스님은 찰라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문을 두드리며 호통치듯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한참 지나서 요란한 삐걱 소리와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물난리가 난 판에 이 폭우를 뚫고 누군가가 찾아올 정도라면 사단이 나도 무슨 큰 사단이 났을거라 염려한 때문이었다. 적어도 한양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 중에 이 저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또한 없었을 터에, 지금 이 물난리통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것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육중한 대문을 겨우 열어재친 하인들은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나이 지긋한 스님 한 분이 달랑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추사(秋史)는 안에 계시는가? 멀리서 땡초가 벗을 찾아왔다고 전해 주시게.’
하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리고 서서 ‘늙은 중이 미친 것 아니야? 여기가 감히 어느 분 댁인줄 알고?’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분명 방금 전에 스님의 입에서 ‘추사’라는 호칭이 천연덕스럽게 불려지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벗을 찾아왔다고 말이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눈치가 빠른 어린 종 하나가 서둘러 사랑채로 달려가 주인에게 대충 이런 사실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놀람은 그 어떤 기우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놀라 까무라칠 일은 지금부터였던 것이다.
성균관 대사성이라는 관직을 맡고 있었던 주인은 태생부터 금수저에 옥수저였으며, 양반중에서도 최고위 양반이었으며, 선비중에서도 최고 선비였던 탓에 평소 말이며 행동거지며 하나하나가 서두름 없이 근엄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골수 양반이었다. 그런데 지금 멀리서 땡초가 찾아왔다는 연통을 듣자마자, 의관을 정제하기는커녕 버선발로 물웅덩이로 변한 마당을 가로질러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서 대문으로 향했던것이다. 찾아온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달려들어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믿기지 않는다는 놀란 표정으로 스님의 위아래를 연실 살피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 스님이 누구시기에 우리 대감마님께서 저렇게까지’하는 모두가 일제히 놀라움을 넘어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이보시게 초의(艸衣). 일지암을 어쩌고 한양까지 올라왔는가? 미리 연통을 하시지?’
‘종일 비를 맞으며 걸었더니 춥고 배가 고프다네. 추사(秋史) 자네는 평소 벗을 이렇게 맞으시는가?’
두 사람은 서둘러 주인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 어린시절 동무를 만난 모습이었다.
한 사람은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수행하던 초의선사(草衣先士)요, 저택의 주인은 성균관 대사성이라는 관직에 올라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였다.
두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얻어서 수락산 학림암에서 만나 금란지교를 맺었고, 그 인연을 이제껏 이어오고 있는 사이였다. 그 만남의 시기가 동갑나기였던 두 사람이 30세(1815) 때의 일이었으니, 지금 초의가 추사를 찾아온 날(1838년 8월. 헌종 4년)로부터 치자면 23년 전의 일이었다.
한양에 가서 그냥 ‘월궁골’‘월궁동’의 저택을 찾는다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 저택의 주인이 바로 우리가 평소에 잘 알고 있고 아주 익숙한 그 양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이다. 사람들은 그냥 임금이 사는 궁궐 밖에 있는 또 하나의 궁궐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한양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저택의 이름은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의 호 월성위에서 따와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 지어졌다. 아흔아홉 칸의 대저택을 가진 정승이라도 감히 궁(宮)을 붙일 수는 없었는데, 최초의 주인인 김한신의 부인이 바로 영조 임금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였기에 궁(宮)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영조 임금은 특별히 둘째 딸 화순옹주를 끔찍이 아꼈는데, 옹주가 장성하여 결혼을 하게 되어 궁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자, 영조의 사저인 창의궁에서 성벽 너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집을 지어주고 옹주가 살게 하였으니 그 집이 바로 월성위궁(月城尉宮)인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추사의 고향을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으로 인정하고 그곳에서 출생했다고 하는데, 새롭게 드러난 자료와 연구에 따르자면 예산은 추사의 선조들이 뿌리를 내리고 이어져 내려온 본적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추사의 출생지는 아니라는 학설이 새롭게 인정받고 있다. 추사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그 외가가 한성 낙동(현 충무로 1가 21번지)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월성위 김한신의 손자인 김노영이 아들이 없자 일가친척 중에서 양자를 들여 대통을 이어가게 하였는데, 이때 선택된 사람이 김이주로 추사의 조부이다. 그 대통이 12세의 추사에게 전해져서 이후로 약 50년 동안 월성위궁(月城尉宮)의 주인이 되었다. 이런 경우를 ‘추사는 김한신의 봉사손(奉祀孫) 이다’라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초의와 추사, 두 사람은 화엄사(華嚴寺) 법당에 마주 앉아 초의가 추사를 위해 가져온 차를 우려 마시면서 밤이 깊도록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화엄사는 전남 구례의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사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서예가이면서 금석학자이면서 성리학자였던 추사는 평소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넘어서 학문적 영역으로 연구와 성찰을 꾸준히 해왔던 학자이자 선비였다. 하여, 자택의 후원에 화엄사(華嚴寺)라는 가족의 원찰(願刹)을 만들어두고 불전을 공부하는 장소로 활용하면서, 교류가 있는 승려들이 찾아오면 거처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더하여 방방곡곡의 명찰을 즐겨 찾아다녔으며, 말년에는 삭발까지 하고 봉은사에서 기거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어려운 발걸음을 했으니 사나흘 내 집에서 쉬면서 물난리가 끝나기를 기다려 보세.’
‘아닐세. 불가(佛家)의 일이 내게 맡겨졌으니, 나름 최선을 다해야하지 않겠는가? 날이 새면 떠날것이네.’
‘금강산이 어디 하루 이틀 거리인가? 가다가 강물이 불어 길이 막힐 수도 있으니, 이참에 하루 이틀만 더 쉬었다가 서둘러 가면 아니 되겠는가?’
‘이보게 추사. 어찌 나도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떠나야만 하겠네. 대신 금강산에서 일을 마친 후에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렸다가 내려가겠네. 그때까지 기다려 주시게나.’
‘자네 지금 약속을 하였네? 설혹 일행이 생기거나 사정이 생겨도 다른 길로 돌아가면 안 되네? 겨울 전에 돌아와서 나랑 여기서 겨울을 나고 내려가면 좋으련만..........’
‘부처님께 기도드려 보시게. 누가 알겠는가?’
‘날이 새면 떠나야 한다니, 어서 잠시라도 눈을 붙여 쉬게해야 하는가? 아니면 밤이 새도록 이렇게 붙자고 그간의 이야기를 더 나누어야 하는가?’
‘잠은 걸어가면서 자도 된다네. 이젠 습관이 되었다네. 걱정 마시게나. 그나저나 이보시게 추사. 내가 자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 가져온 것이 있으니 내 바랑을 좀 가져다줄 수 있겠는가?’
추사는 밖에 대기하던 하인에게 일러 오는 동안 비에 흠뻑 젖어 아궁이에서 잘 갈무리해 말려오라고 한 초의선사의 보따리를 가져오게 했다. 초의는 바랑을 풀어 그 안에서 대통을 꺼냈다. 대통을 꺼내 묶었던 끈을 풀자 그 안에서 기름 먹인 한지에 싸인 것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인가?’
‘그렇네. 내가 추사 자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서 가지고 왔네.’
‘도대체 어떤 그림이기에 자네가 그토록 애지중지 예까지 가져왔다는 말인가? 혹여 어디서 공재(恭齋 尹斗緖) 선생의 새로운 그림을 찾아내기라도 했단 말인가?’
‘녹우당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림일세. 자네의 평을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가지고 왔네.’
‘이보시게 초의(艸衣). 글씨라면 몰라도 그림이라면 나도 자네에게 부탁을 하는 처지인데 어찌 나에게 그림을 평가하라고 하시는가? 도대체 어떤 그림이기에?’
‘내게 잔재주가 조금 더 있을지는 모르겠네만, 그림을 보는 안목과 깊이는 결코 자네의 경지를 따르지 못하네. 내가 오늘 자네를 찾아온 이유가 바로 이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제대로 살펴보아 주고 평가를 해주시게.’
‘자네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 것을 알겠네.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림을 보기가 두려울 정도일세.’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추사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림이 있어서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왔고, 다행히 자네가 이곳에 있어서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되었네. 이제 내가 가져온 이 그림을 살펴보고 나서 나에게 추사의 평가를 들려주게. 설혹 그것이 평가가 나빠서 나의 그릇된 안목을 탓하는 것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겠네. 자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족하네.’
마침내 초의 선사가 그림을 펼쳐 추사 앞에 내밀었다.
추사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갔다.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지만 사랑채엔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무한 고요와 침묵이 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에 뭍어 지쳐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그림에서 시선을 때지 못하던 추사가 굳게 닫혔던 침묵을 깨면서 장탄식을 늘어 놓았다.
‘누구신가? 압록강 동쪽에서 이만한 그림을 그리는 이를 본적이 없었거늘...........’
‘진도에서 건너온 허련(許鍊)이라는 스물 아홉 먹은 청년의 그림이라네.’
‘어느 분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던가?’
‘나를 찾아 온지 3년 정도 되었네. 그의 자질이 범상치 않아서 절간에 두고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약간의 관심과 도움을 주고 있었다네.’
‘그럼 초의의 제자란 말인가?’
‘제자라니? 가당치 않네. 불가의 제자라면 모르겠으나 내가 어찌 그림을 두고 제자를 거둘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추사 자네를 찾아온 것이 아닌가?’
‘그런 마음이었다면, 어찌 이런 인재의 손을 잡아끌고 함께 오지 않았단 말인가?’
‘련이의 재주가 범상치 않음은 진즉이 알았으나, 정말로 세상에 내어 놓아도 될만한 자질을 가졌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때문이지. 그 또한 내 식견이 좁은 탓이겠지 만 말일세. 하여 먼저 자네의 평가를 듣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라네.’
‘청년의 그림 격조는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해 이미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 할 만하네. 다만 보고 들은 것이 아직은 좁아 그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몹시 안타까울 뿐일세. 당장이라도 한양으로 불러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체험을 통해 계속 공부하게 하는것이 좋을 것 같네. 좀체 보기 드문 인재일세.’
‘하루라도 빨리 그를 한양으로 불러온다면 추사 자네가 거두어 줄 수 있겠는가?’
‘이 사람아. 그는 이미 자네가 거두어 들인 사람이 아닌가? 나는 그저 자네의 오랜 벗으로 한동안 그를 돌봐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네.’
‘거두어 돌보기는 했으나 제자는 아니라고 했음일세. 두고 보기만은 아니되겠다 싶어서 이렇게 자네에게 맡기려고 불원천리를 마다 않고 찾아온 것이 아니겠는가? 내 제자는 아니겠지만, 자네의 제자라면 또 내 제자도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떠신가?’
‘자네의 천거라면 내 기꺼이 받아들이겠네.’
‘부탁일세.’
‘그럼 올려보내 주시게나. 자네의 뜻을 받들어 기꺼이 거두겠네.’
그림을 물리고 초의선사는 서둘러 먹을 갈고 장문의 편지를 써 내려갔다. 해남땅 대둔사 한산전에서 그림을 그리며 초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허련에게 쓰는 편지였다. 이 편지는 아침이 밝아 초의선사가 금강산을 향해 출발할 때쯤이면 달리 인편을 통해 허련에게 전달하기 위해 함께 출발할 것이다.
‘그래 허군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가? 내 얘기는 했나?’
‘추사. 이사람 보시게? 제자로 천거는 했지만 아직 자네의 제자가 된 것도 아닌데, 허군이 올라와 자네 행실을 보고 실망해 다시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을 벌써부터 제자가 된것처럼 하는 것은 너무 앞질러 나가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랬는가? 허허허허허.’



실로 묘한 시기에 선조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순리대로 라면 임해군이 계승자였으나, 당파 간의 권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정쟁의 결과로 광해군이 새로운 임금에 즉위했다.(1609년) 쫓겨난 정통성과 없는 정통성을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채워야 하는 현실적인 혁명세력 사이에 목숨을 건 막무가내식 결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신진 세력의 목표는 오로지 왕권 후계순위 1위였던 임해군을 제거해야만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 정치적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은 상태에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이미 쫓아낸 임해군을 처형한다는 것은 자칫 정통성 시비를 넘어 아버지 선조의 죽음에 대한 의문까지 더욱 증폭시킬지도 모르는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음모론까지 번질 수 있음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얼마 되지 않아 친형인 임해군을 진도(珍島)에 유배시켜 버렸다.
이때, 임해군의 처조카였던 허대(許岱)가 임해군의 유배를 수행하기 위하여 진도에 처음 들어왔다. 허대는 한양을 떠나면서 술을 매우 좋아하는 고모부 임해군을 위해 따로 소줏고리를 챙겨 바다를 건너왔다. 그리고는 소줏고리로 술을 내렸는데, 그 내린 소주를 진도에서 자생하는 지초 뿌리에 담그니 붉은빛을 띠는것이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았다. 그것이 바로 지금 진도를 대표하는 특산품 중의 하나인 <진도홍주>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고모부를 모시고자 하는 허대의 갸륵한 정성도 모두 허사가 되어, 1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임해군의 유배는 강화도 교동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허대는 당연히 강화도까지 쫓아갔으나, 온갖 흉흉한 소문의 역모설이 끊이질 않게 되자 결국,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켜 버리고 말았다. 철저히 감시하며 집 주위에 가시덤불이나 울타리를 쳐서 행동을 제한하고, 외부인과의 접촉을 절대 금지하는 엄한 벌이었다. 이젠 허대로서도 임해군 근처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되었다.
그는 건너편 마을에 멀리 떨어져 기거하면서 새삼 인생무상과 권력의 비애를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뼛속 깊은곳에 새기고 있었다. 그런 고뇌의 시간은 그렇게 길게 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임해군이 결국 홧병과 술병을 이기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했던 것이다.
허대는 곧바로 한양 자신의 터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양천 허씨 집성촌이었던 예산 인근에 주로 머물면서 도성의 돌아가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허대 자신이 현 권력에 의해 쫓겨나 몰락한 임해군의 가까운 일가친척이었던 때문이다. 언제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다시 불거져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난 대북파가 또다시 정통성 시비를 벌이며 영창대군을 앞세워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역모를 벌였다가 실패하였다. 이것이 계축옥사(癸丑獄事. 1618년. 광해군 10년)로 비화되면서, 양천 허씨가문의 차세대 기대주였던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년)이 주도 세력으로 몰려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의 형을 당하고 말았다. 최고의 극형을 당한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의 3대 역신) 반열에까지 이름을 올린 것 이었으니, 이제 양천 허씨 가문의 존폐를 심각하게 걱정할 정도가 된 것이다. 멸문지화나 구족까지 척결이라는 말이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정도전. 정여립. 허균을 3대 역신으로 지목했다. 모두 왕조를 뒤집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역모를 꾸민 인물이라는 점이 공통으로 들어가는 죄목이다. 그 뒤를 이괄. 남이. 김자점. 조광조 등이 뒤를 따르는 역신들 계보다.
남달리 세상의 흐름과 변화를 판단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허대(許岱)는 심사숙고한 끝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허씨 일가가 살아날 방도를 찾았던것이다. 그것은 한양과 권력의 관심에서 벗어나 멀리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안성맞춤의 새로운 터가 바로 진도(珍島)였다.
진도는 일단 외부로부터 접근이 쉽지 않아서 어느 정도 지리적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임해군을 모시고 1년 가까이 진도에 머물면서 그곳이 대단히 기름진 옥토를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양반들의 귀양지로 각광을 받았던 지역인만큼 일정 수준 이상의 양반 문화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한 것이다.
허대는 자신과 연관된 모든 피붙이들을 불러놓고 자신들이 처한 작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는 신속하면서도 은밀하게 모여든 일가친척들을 모두 이끌고 진도로 들어갔다.
하여 허대(許岱)를 양천 허씨의 진도 입항조(入航祖)로 그 뿌리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허대는 양천 허씨 집성촌을 진도군 고군면 율목 포구 인근에 건설하면서 일가친척의 원만한 정착을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애쓰느라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부터 한 가지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피붙이 조카인 허련(許鍊)의 나날이 발전해 나가는 그림 솜씨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허련은 유독 그림 그리는것을 좋아했다. 자신이 글쓰기를 하다가 마칠 즈음이면 영락없이 나타나서 다 쓰고 버리려던 한지의 여백에다 남은 먹으로 쓱싹 그림을 그려대곤 했다. 남다른 자질이 엿보여 어렵게 <오륜행실도>를 구해다가 주고 모사를 시켜보았는데 그 솜씨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위였다. 누가 그림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먹의 농도와 붓의 결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물을 넘긴 조카 허련의 숙련된 그림 솜씨를 지켜보면서 허대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련(許鍊)이는 틀림없이 그림으로 충분히 일가(一家)를 이룰만한 재목이다. 숙부로서 조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어야만 하겠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지금의 신세가 자못 안타깝구나.’하면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떤 결심이 섰는지 조카를 불렀다.
‘련아. 숙부가 너에게 심부름을 하나 시켜야만 하겠다. 바다를 건너 해남땅 안쪽으로 들어가면 두륜산 자락에 대둔사란 커다란 절이 있단다. 그 대둔사 일지암에 초의선사(艸衣禪師)라는 큰 스님이 계신 데, 내가 편지를 써 줄 터이니 네가 찾아가서 정중하게 편지를 전해드리고 오너라.’
허대는 초의선사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다만 소문으로 그분의 품성과 행적과 학문의 경지에 대해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초의선사가 교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전해 들은 바가 많았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가 초의선사를 꺼낸 것은, 가까운 지역에서 찾아낼 수 있는 최고의 화가라고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허대는 생면부지의 초의선사에게 자신을 밝히면서 정중하게 조카의 그림과 자질을 한 번 지켜보아 달라고 거듭거듭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 편지와 함께 그동안 조카가 그려서 자신에게 보내준 그림 중에서 가장 아끼던 그림을 하나 골라서 동봉해 봉인까지 했다.
아무런 사정을 모르는 허련은 숙부의 심부름으로 바다를 건너 두륜산 자락의 대둔사로 향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 발걸음은 심부름 길이 아니라 유학의 길로 바뀌게 된다.
불쑥 나타나 진도에서 심부름을 왔다는 청년을 바라보면서 스님은 청년이 건네주는 서신의 봉인을 뜯고는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정중하고도 예절을 다하는 일종의 청원서이자 추천서였다. 그리고는 편지와 함께 동봉된 그림을 찬찬히 펼쳐보았다. 스님의 미간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님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전해 듣기를 ‘천재는 천재를 단박에 알아본다.’고 했다. 그런 기우를, 그런 떨림을 자신이 겪게 될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스님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너는 이제 진도로 되돌아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아래 절간의 한산전에 머물면서 일단 불화를 공부하도록 해라. 내가 수시로 너의 그림 공부에 대한 진척도를 살필 것이니 너는 오로지 그림 공부에만 매진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말씀은 감사하오나, 심부름 온 처지라 돌아가서 숙부께 답신을 전해드려야 하겠고, 공부라면 준비를 해서 다시 오겠습니다.’
‘그럴필요 없다. 숙부가 너를 여기로 심부름을 보낸 이유가 네가 제대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게끔 해주기 위해 유학을 보낸 것이었다. 진도의 일은 모두 숙부께서 알아서 이미 처리하셨을 것이니 너는 이 순간부터 그림 공부에만 열중하도록 해라. 그것이 숙부의 뜻을 받들고 은혜를 갚는 길이 될 것이니 유념하도록 하여라.’
허련의 성취도를 지켜보는 초의선사의 기쁨은 매우 컸다. 그는 다산초당에서 정약용 선생과 교류하면서 얻은 인연을 허련을 위해서 기꺼이 나서 활용하기로 작정하고는 해남의 녹우당을 찾았다. 허련으로 하여금 공재 윤두서 선생의 그림을 몇 날이고 열람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오가는 길이 불편한 겨울이면 아예 화첩을 빌려와서 수도 없이 반복해 모사를 하면서 공부할 수 있게 하였을 정도였다.
삼년이 지나자 이제 초의 선사 마저도 지난날 허련의 숙부 허대가 조카를 자신에게 보내면서 당부했던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깨닫게 되었다. 지금 자신이 딱 그 시기의 숙부 심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초의도 숙부 허대처럼 똑같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래도 추사에게 부탁을 해 보는 방법밖에 없겠구나.’












얼추 그로부터 한달 반쯤이 지나서 남루한 복장에 스님들이 주로 사용하는 바랑을 걸머진 청년이 불쑥 월성위궁에 나타나 주인 뵙기를 청하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추사는 이미 찾아온 청년이 초의가 천거한 허련이라는 것을 진즉부터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이 순간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던 때문이다.
허련은 대청마루 섬돌 앞에서 초의선사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추사에게 올렸고 넙죽 엎드려 스승에 대한 예를 올렸다. 처음 만나는 낯선 자리였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어떤 친근함이 벌써부터 넘쳐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허련(許鍊)은 월성위궁의 바깥사랑채에 기거하면서 추사(秋史)에게서 그림과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추사의 관직이 성균관 대사성이었으니, 당시 조선의 내놓으라 하는 인재들을 고르고 골라 선발하여 성리학을 근간으로 학문과 예법은 물론 유교적 질서를 통한 교육과 평가를 하는 교육기관의 최고 책임자였다. 하지만 성균관 대사성이라는 자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탐하고 휘두르는 자리라기보다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유학자로서 최고의 지위라는 어떤 상징성이 비교 불가의 더 큰 가치를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다. 적어도 성균관 대사성이라면 모든 조선 유생들의 사표(師表)로 인식되어 추앙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성리학으로 무장된 선비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학문적 모범과 엄격한 품행이 전제되는 상당히 까다롭고 불편한 자리 또한 성균관 대사성의 자리였던 것이다.
지금 당장의 성균관 대사성이 바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다.
가문으로 보나, 그가 성취한 학문으로 보나, 서예가로서의 명망과 평판으로 보나, 어느 하나 흠잡을 것이 없는 인물이 적재적소에 등용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의 나리였지만......... 그 성리학의 이상향 아래서 지옥 같은 아비규환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조선은 실은 당쟁이 거의 전부인 나라이기도 했다.
‘이편이여? 아니면 저편이여? 적당한 중간은 없으니까 잘 선택해.’
미래는 아무도 미리 알 수 없는 것처럼, 날카로운 칼날과 무딘 칼등도 처음 시작은 아주 미세한 칼끝에서 시작하여 나뉘게 된 것이니, 그 한 번의 선택이 생과 사를 갈라놓았다.
그런 당파간의 싸움은 참 선비라 해서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성리학의 이상이 태생적으로 가진 어두운 이면이었기 때문이다.
한 스승에게서 같은 학문을 배웠고 깨닫고 성취가 있어서 세상에 함께 나섰지만, 정치판에 일단 발을 디디게 되면 진영의 선택, 혹은 관직의 이동에서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동물의 왕국에 등장하는 늑대나 하이에나로 변해가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예외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결과는 다산 정약용도 고산 윤선도도 지금의 추사 김정희도 대충 어림잡아 근 20년 정도씩은 유배지를 전전했다. 어쩌면 조선 시대 선비의 등급을 새롭게 3등급으로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유배지에서 죽은 사람과, 유배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더 이상 쓸모가 없어 그냥 버려진 사람과, 기어코 정치판에 복귀하여 화려한 재기를 통해 통쾌하게 또 복수를 해대는 사람으로 말이다.
아무튼, 그런 조선의 선비정신과 유학자로서의 표상인 추사(秋史 金正喜)께서 낮에는 성균관에서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치시고, 퇴청하면 사랑채에서 진도 촌놈(?) 허련에게 맞춤형 일대일 사교육을 베푸시니 이 세상에 아무리 다양한 특혜가 있었다 해도 그런 특혜가 어디 있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솜씨를 시연해 보여줌은 물론 자신이 소장한 귀한 서책이며 화첩이며 그림들을 다 내어주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방에 수소문까지 해서 온갖 귀중한 교육자료들을 끊임없이 공수까지 해 주시니, 가히 추사의 허련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남달랐는지를 엿볼 수 있다.
흡사, 서책이 귀하던 시기에 멀리까지 발품을 팔아 찾아가서 슬쩍 곁눈질로 잠시 구경을 하던가, 특별한 배려로 다른 종이에 베껴가는 게 특혜이던 시절에, 서울대 총장께서 직접 노트북을 구해다가 와이파이 연결해서 구글 검색까지 마음대로 하게 해주었다면, 일타 강의로 성적을 끌어 올려주고, 거기에도 모자라 제자의 프로필을 챗GPT까지 동원해 만들어서, 자신의 전매특허 추사체로 추천서까지 작성하여, 하버드. 캠브리지, 예일, 파리 대학 등에 유학까지 시켜주고자 했다면........ Oh. My God!!!!!!
추사는 제자에게 중국 원나라 말기의 4대 화가들의 작품을 방작(복사)한 화첩(畫帖)까지 내어주면서, 폭마다 열 번씩 본떠 그리라는 숙제를 내주곤 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허련은 스승의 가르침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따라 수행했다. 그의 그림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추사의 기쁨을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자고로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아도 ‘큰 스승의 가장 큰 기쁨은 제자가 쑥쑥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취한 제자가 세상에 나아가 어떻게 어떤 성공을 거두고 덕분에 스승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나가는 제자의 학업 성취도를 지켜보면서 얻는 그 순간만의 참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큰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추사의 마음이 꼭 그러했다.
추사는 자신을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제자를 소개하고, 제자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잘 그렸다고 생각했던 그림을 지인들에게 한 폭씩 나누어주면서 거듭 제자의 솜씨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미술 시장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소치 허련의 초기 작품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스승이 제자의 명함 대신이라 생각하고 여기저기 돌려 내놓은 작품들 일 것이라 생각된다. 덕분에 이제 온 장안에 허련의 그림에 대한 소문과 평가가 자자해지게 되었다.
하루는 많은 지인들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그날 역시 제자의 그림 솜씨를 자랑하는 잔치마당이 되고 말았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추사가 한 폭의 그림을 펼쳐들고 대청마루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래전에 막역한 벗 초의(艸衣禪師)가 불쑥 찾아 와 한 폭의 그림을 불쑥 내밀었을 때의 감동을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훗날 초의가 전해주기를 그때 제가 “압록강 동쪽에서 이만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네.”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얼마 지나서 초의의 편지를 들고 한 청년이 불쑥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한눈에 그 청년을 알아보았습니다. 저를 놀라게 했던 그림을 그린 청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은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그림 솜씨를 지켜보면서 제가 얻은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자면 초의가 가져야 할 기쁨을 벗이라는 명목으로 제가 뺏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초의가 하도 권하기에 저는 그냥 못 이기는 척 거두어들인 것밖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혹 다시 데려가겠다고 할까 봐 지금은 그것이 더 걱정입니다.’
추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좀 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림으로 보자면 여기 제자 허련의 솜씨가 저보다 낫습니다.’
장내는 경악했고 사방에서 탄성의 터져 나왔다.
글씨와 시와 그림의 최고 경지에 올라 삼절(三絶)로 명망을 드높이고 있던 추사의 입에서 제자의 그림을 두고 칭찬을 넘어서 ‘자신보다도 이제는 위다’라고 사람들에게 대놓고 공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제부터는 허련의 그림이 조선 제일이다’라는 해석도 가능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곧 ‘압록강 동쪽에선 유일무이한 그림 실력’으로의 연결이 당연해지기 때문이다.
좌중이 잠잠해 지기를 기다려 추사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허련이의 그림이 이제 저를 뛰어넘는 경지를 이뤄, 이제부터는 본인 스스로 자신만의 화풍으로 그의 그림 세상을 펼쳐나가게 될 것입니다. 초의가 허련이를 제게 보냈던 마음처럼 이제 저 또한 허련이를 세상 밖으로 보내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할 생각입니다. 허련이가 세상에 나가 번듯하게 일가를 이루고 나면 혹여 나와의 그동안 관계를 잊을까 봐......... 초의 선사는 잊어버려도 무방하겠지만 추사는 부디 잊지 말라고........ 정표로 제가 직접 이름을 하나 지어주고자 한동안 고심을 했었습니다. 진도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도 허씨 성을 가진 련(鍊)이었고, 대둔사 승방에서 초의에게 공부할 때도 그냥 련(鍊)이었습니다. 이곳에 올라와 사랑채에 머물며 공부하는 동안에도 호칭은 언제나 “련(鍊)아” “련(鍊)아”였습니다. 일취월장 일가를 이룰 제자를 세상에 내어놓으면서까지 그냥“련(鍊)아”로 보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여 고심 끝에 련(鍊)이게 걸맞는 이름(호)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라고 소치(小痴)라는 이름(호)에 스승인 저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제가 평생 마음속에 스승으로 삼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했던 황공망(黃公望) 선생님의 아호가 대치(大痴)셨기에 거기에서 따와 제자 허련에게 새로운 이름으로 주고자 합니다. 어떠신가? 소치(小痴)선생. 받아주시겠는가?’
좌중들의 시선이 대청마루 옆에 비켜나 서있던 허련에게 일제히 쏠렸다.
진한 감동에 어느새 얼굴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된 허련이 달려나와 대청마루에 올라 추사에게 스승에 대한 예로 큰절을 올렸다.
‘죽는 날까지 스승님의 가르침과 은혜를 잊지않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겠습니다.’
조선의 미술사에 남종화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소치(小痴 許鍊)의 미술세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초의선사(艸衣禪師)와 추사(秋史 金正喜)와 소치(小痴 許鍊)의 사이에는 연결고리 역할로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茶山 丁若鏞) 선생이 기거하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세 사람은 자주 다산초당에 모여 다도를 즐기며 학문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그때마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다산을 대신하여 연배가 비슷한 다산의 아들 정학연이 이들과 어울렸다.
초의와 추사의 배려와 가르침을 바탕으로 장차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게 되는 소치를 두고 다산의 아들 정학연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그를 칭송했다.
心窩裏準備一副邱壑/
神明中常蘊/
傲世絶俗之姿然後/
落筆便入三昧/
此世界小癡一人而已
마음속에 한 폭의 산수를 채비하여/
늘 밝은 정신을 품고/
세속을 초월하는 풍취가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붓을 들어 삼매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 경지에 이른 이는 소치 한 사람뿐이다/



어느 학술지에서 “초의선사(艸衣禪師)의 헌신으로 소치(小痴 許鍊)가 공제(恭齋 尹斗緖)의 산수를 모사하던 수습단계에서 방황자구벽계청장도(倣黃子久碧溪靑장圖),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서울대 소장)를 그렸던 초기 추사 문하의 방작들도 뛰어났으나 서서히 추사에 물들어.........”라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게 내가 찾을 수 있는 전부였다.
초의가 추사에게 허련을 소개하면서 처음 보여주었던 소치의 작품은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었고, 어쩌면 그 그림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기록조차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초의의 손을 떠난 것은 이미 확인이 된 것이고, 그림을 받은 추사의 입장에서는 이후로 소치가 수련을 하는 동안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와중에 연습생 시절의 초기 작품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용 명함처럼 마구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과정에 그 그림도 누군가의 손으로 건너갔고 굳이 어떤 사연 때문에 그 그림을 꼭 다시 찾아야 할 이유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소치가 헤아릴 수 없을 만치 다작을 남긴 화가라는 특별함이 그 그림을 꼭 다시 찾아야 하는 이유를 상실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이 학술지의 내용을 세세하게 살펴서 거기에 유추해 보자면 방황자구벽계청장도(倣黃子久碧溪靑장圖)와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가 소치가 대둔사 한산암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와 월성위궁 사랑채에서 기거하면서 추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던 그 초기의 그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다.
소치가 워낙 다작을 하고 수많은 작품을 남겨놓는 과정에서, 여러 그림이 하나의 같은 소재를 가지고 다시 그리거나 비슷하게 표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거기다가 한자식 표기의 제목까지도 비슷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 보니 아마도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그림이 헷갈렸거나 한자 표기를 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그 오류를 바로잡고자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이제 소치로 귀결되는 조선 시대의 남종화를 아주 많이 감상해야 하는 상황에 앞서서, 위 기사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는 과정으로 우선 소치의 작품 석 점을 먼저 맛보기로 살펴보고 나서, 다시 (남종화)와 (소치 기념관) 여행을 계속해 보고자 한다.
“小痴此畵固佳 同收於臨摹石濤卷 全不相稱以其 不斷畵家從橫習氣耳”
윗쪽 왼편의 그림 <방석도산수도> 에는 그림의 내용에 관한 발문(題跋)이 상단에 써있는데 그 발문의 작성자가 추사(秋史 金正喜)라고 낙관까지 찍었으니, 그림을 그린 사람의 스승이더라.
그러니까 범상치 않은 에필로그(서문)까지 전면에 내건 나름의 사연이나 스토리가 있는 조금은 특별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소치의 이 그림은 뛰어난 가작으로 석도의 작품을 임모하였다. 그런데 석도의 화풍을 닮지 않은 것은 아직 소치가 부단히 습기를 익혔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떼어내어 다른 서첩에 옮기면서 이같이 제문을 쓴다.” 라는 내용이다.
이를 다시한번 해석해 보면 대충 이렇다.
추사의 제자인 소치가 청나라의 대표 산수화가인 석도(石濤)의 그림을 모방하여 그렸는데, 석도의 화풍이 근사하게 드러나지 않음은 채 아직 그림 공부가 부족한 탓이다. 그럼에도 나름의 성취를 보인 작품이라 생각되어 특별히 아껴서, 그의 그림 연습장에서 따로 떼어내서 이렇게 본인이 발문을 써서 남기고자 한다면서, 스승으로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제자를 바라보는 뿌듯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하겠다. 추사의 발문에서 이 그림의 발문에서 소치가 한양에 올라와서 추사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던 시기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곧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소치의 초기 작품임이 분명하고, 은근히 그의 초기 시절 솜씨 수준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아직은 덜 익은 미완의 대가였던 것이다.
또한 내용을 보자면 추사가 석도의 그림을 구해다가 소치로 하여금 여러 번 모사하는 것으로 그림 공부를 시켰다는 내용이다. 추사는 명청시대의 화풍과 그림을 들여다가 재해석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방편으로 적극 활용하였던 것이다.
석도(石濤)의 본명은 주약극 (朱若極)으로 청나라 시대의 대표적 산수화가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멸망당한 명나라 황실의 후예인 왕족이었다. 청나라가 들어서자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어 산속으로 들어가 그림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화훼 (花卉), 난죽 (蘭竹)과 인물화에 능했지만 특히 산수화에 뛰어난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이처럼 추사는 석도 뿐만이 아니라 청나라에서 원나라까지 두루 총망라하는 중국의 문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이것이 훗날 소치에 의하여 남종화가 조선에 뿌리를 내리는 결과를 만들게 되었다.
소치(小痴 許鍊)가 그린 산수화 중에서 <방예찬죽수계정도(倣倪瓚竹樹溪亭圖)>는 그가 추사에게서 그림과 글씨를 배우던 시기의 대표 작품으로 손에 꼽힌다. 앞에 소개한 <방석도산수도>와 비교하여 붓놀림이 몰라보게 단순하면서도 깔끔해졌고, 여백의 미를 한껏 살리면서도 정돈되고 우아한 분위기를 안정적인 수평 구도 위에 펼쳐놓았다. 갈필(渴筆. 마른 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기법)과 적묵(積墨. 마른 붓으로 여러 번 반복 덧칠해서 짙은 먹색을 내는 기법)의 기법을 이젠 어느정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데, 산수화의 구도는 여전히 예찬(倪瓚)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갈필의 피마준으로 바위와 산세를 나타낸 것은 분명 황공망(黃公望)의 화법을 어느 경지에 이를 정도로 터득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거기에 이젠 추사체를 써 내려가는 솜씨까지 돋보이니 타고난 재질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이제 소치만의 재량이 만개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 두 그림의 제목에 앞의 작품은 ‘방석도’가 들어가고 뒷 작품엔 ‘방예찬’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석도의 작품을 보고 그렸다’ 내지는 ‘예찬의 그림을 모방했다’는 뜻이다.
요즘에는 저작권 문제가 아주 심각해져 툭하면 재판까지 가곤하는데, 당시에도 저작권은 심각하게 다루어졌던 듯싶다. 선비의 시대에 명망을 휘날리던 화가가 남의 그림을 베꼈다거나, 슬쩍해서 직인만 추가했다고 하면 화가 이전에 선비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추잡한 소인배로 전락했을 터이니 말이다. 하여 ‘누구의 그림을 보고 답습했습니다’ ‘고대로 베껴 연습했습니다’ ‘참고하여 리메이크 했습니다’등의 원작자와. 의도와. 정도까지를 분명하게 적어놓았다. ‘누구를 존경해 배우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모방과 창조를 병행했습니다’‘누구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는 결코 감추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감추다 걸리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전문적인 미술 양성 아카데미나 교육 시스템도 없고, 인터넷 강의도 없던 시절에는 그냥 좋아서 여기저기 그리다가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 추천을 받아 문하로 들어가 교육을 받아서 화가가 되거나, 간혹 끝까지 스스로 독학으로 습득하는 천재적 자질의 사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학업의 첫걸음은 남의 것을 보고 베껴가면서 기법을 깨닫고 습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추사(秋史 金正喜)를 계기로 명나라 말기(明末)와 청나라 초기(淸初)의 조금은 유행이 지나간 (원대산수화풍)이 새롭게 재조명되면서, 조선의 화단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쳐 이후로 대부분의 화가들이 이를 적극 수용 발전시키게 된다. 그 중심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다. 소치가 그린 거의 모든 그림에서 운림(雲林)과 예찬(倪瓚)의 구도와 풍경을 연상시키는 듯한 화풍이 고스란히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소치가 남긴 산수화의 상당수가 예찬의 그림을 모방한 그림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방예찬죽수계정도倣倪瓚竹樹溪亭圖>로 소치의 대표 작품 목록에까지 제목이 올려져 있다.
추사가 사망한 후에 소치는 진도에 낙향하여 은둔하면서 오로지 그림만 그렸는데, 그가 작품활동을 한 화실이자 생활공간의 이름을 운림산방(雲林山房)이라 지었는데, 그 이름의 운림(雲林)이 바로 예찬(倪瓚)의 호에서 따온 것이었으니 그가 평소 예찬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호는 추사(秋史)로부터 황공망(黃公望)의 호에서 따서 받았고, 집의 이름은 예찬(倪瓚)의 호에서 따와 스스로 가졌으니, 그가 가졌던 평생의 인연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또 소치가 성공하여 그림을 통해 맺어진 인연 또한 무수히 많기만한데, 그 정점에서 만났던 이가 바로 ‘조선에서 난을 가장 잘 쳤다’ 평가 받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었다.
<방예운림죽수계정(倣倪雲林竹樹溪亭)> 이라고 짧게 적어서 아예 처음부터 ‘운림 선생이 그린 죽수계정을 모방하여 그림’이라 적고 소치의 관인을 떡하니 찍었다. 저작권협회에 모방작이라고 등기까지 낸 작품인 것이다. 이미 어느 정도 성공하여 소치(小痴)란 이름이 장안에 떠들썩하게 퍼져나가 성공한 화가였음에도 말이다.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는 누가 뭐라고 하던 소치(小痴) 허련(許鍊)의 대표작이다.
스승인 추사(秋史 金正喜)의 유배생활을 지원하기 위해서 제주도를 여러번 오가기도 했던 소치는 결국, 권력 탐욕과 생존 경쟁뿐인 한양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낙향하여 진도에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칩거하면서 작품 활동과 후학 양성에만 매달리게 되었으니 소치의 나이 49세 때의 일이다.
너무나 답답해지면 그는 남도 지방을 떠돌면서 여러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글과 그림을 나누는 그저 그런 궁핍해진 유랑화가의 처지로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시기에 더욱 원숙해진 소치만의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많이 남기게 되었다.
조선의 회화가 오로지 한양이라는 한정된 영역 안에서 정통성을 내세우는 궁중 화가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화가 대세를 이루던 시기에, 한양 도성을 벗어난 멀고 먼 남도 자락의 끝인 진도에서 남종화의 씨앗을 터트려 화사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차차로 운림산방(雲林山房)은 한물간 화가 허련의 거처라는 수식어를 넘어서 조선 남종화의 근본이자 호남 회화의 상징적인 장소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그런 그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과 그의 그림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소치(小痴)를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과 더불어“조선 후기의 회화를 상징하는 양대산맥”이라 칭송하기 시작했다.
소치는 다작을 한 화가였기에 대표작이라 부를만한 작품의 숫자 또한 많이 있지만, 상당수의 대표작들이 바로 이 시기에 이곳 운림산방에서 탄생했다.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이 작품은 초의선사가 입적한 1866년(고종 3) 소치의 나이 57세 때 자신의 화실인 운림산방을 부채(合竹扇)에 그려 넣은 작품이며, 남종화의 기풍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치의 대표작품이라 하겠다.
푸른색과 황색을 은은하게 담채로 활용해 부채의 한가운데 우뚝하게 솟은 산을 배치하고, 그 아래 널찍하게 자리 잡은 집 세 채가 대숲과 서너 그루 거목에 둘러싸여 있는 평온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인데, 외출했던 집 주인이 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참이다.
그리고 하늘에는 중국 남송 시대 시인이자 유학자인 나대경(羅大經)이 쓴 산문 <산거(山居)>편의 내용을 옮겨 추사체로 써내려간 글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우뚝 솟은 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집은 마치 거대한 스승의 품에 안긴 제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하늘을 뒤덮은 추사체는 마치 스승의 숨결 같다.
부채의 형태를 따라 펼쳐진 이 그림은 산수화와 추사체 글씨의 뛰어난 조화가 매우 돋보인다.
소치 허련은 남종문인화와 추사체 글씨가 잘 어우러진 이 <선면산수도>를 통해 드디어 '남종화의 대가'로 불리게 되었다.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으로 대변되는 중국 남종화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의 진경산수화를 비판하자, 허련은 스승의 회화관을 받들어 문기 어린 남종화에 일생을 바쳤고, 마침내 그 결실이 여기 운림산방에서 활짝 꽃피워진 것이다.
황공망과 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붓끝이 갈라진 거친 독필(禿筆)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생생한 담채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보여지는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소치의 개성은 산수화에만 머물지 않고,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하여 사군자. 모란. 파초. 괴석. 노송. 연화 그림에도 그만의 독창적인 개성미를 담아냈다.
이렇게 그가 이룩한 토착화된 화풍은 아들 형(灐)에게 전수되고, 이어서 손자 건(楗)에게, 또 방계인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계승되어 오늘날 호남 화단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굳이 소치의 대표작을 고르고 또 고른다면, 산수도첩(山水圖帖). 오백장군암도(五百將軍巖圖). 방예찬죽수계정도(倣倪瓚竹樹溪亭圖). 방석도산수도(倣石濤山水圖).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김정희초상(金正喜肖像) 등을 먼저 꼽을 수 있으며, 이밖에도 모란. 괴석. 사군자 등 많은 양의 작품이 전해진다.
아울러 그의 새로운 작품은 언제든 다시 또 등장할 소지가 많이 있다. 워낙 다작은 한 화가였고, 워낙 세상에 많이 퍼져나가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에 화제로 적힌 중국 남송 시대 문인 나대경羅大經의 산문집 ≪학림옥로(鶴林玉露)≫ 중 <산거> 편의 내용을 슬쩍 들여다 보기로 하자.
"내 집은 깊은 산속에 있어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무렵이면 푸른 이끼가 섬돌을 덮고 떨어진 꽃이 길바닥에 수북하다./
문에는 누가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하나 없고, 솔 그림자 들쭉날쭉한데 새소리만 높았다 낮았다 한다./
낮잠 충분히 즐겼으니 산속 샘물 긷고 솔가지 주워다 쓴 차 달여 마신다./
마음 가는 대로 ≪주역≫, ≪시경≫의 '국풍', ≪춘추좌씨전≫, ≪이소≫, ≪사기≫, 태사공의 글, 도연명과 두보의 시, 한유와 소식 글 몇 편 읽는다./
조용히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와 대나무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높은 나무숲과 무성한 풀밭에서 새끼사슴이나 송아지와 함께 누워 쉬기도 한다./
흐르는 샘물가에 앉아 물장난을 치다가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는다./
대나무 그늘진 창문 아래로 돌아오면 산사람이 다 된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죽순과 고사리나물 반찬에 보리밥 지어 내오니 기쁘게 배불리 먹는다./
창가에서 붓을 놀려 되는대로 크고 작은 글씨 몇십 자를 써보기도 하고, 간직한 법첩(法帖, 명필의 서첩)이나 묵적(墨蹟, 먹으로 쓴 흔적), 두루마리를 펼쳐 마음껏 보기도 한다./
흥이 나면 짧은 시를 읊거나, ≪학림옥로≫의 한두 단락을 쓰기도 한다./
다시 차 한 잔을 끓여 마시고 밖으로 나가 시냇가를 걷다 농원의 노인이나 냇가의 늙은이를 만나면 뽕나무며 삼 농사를 묻고 찰벼와 메벼를 이야기한다./
맑은 날과 비온 날을 헤아려 절기를 따져보고 계산하며 한바탕 유쾌한 말을 주고받는다./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 사립문 아래 서면 석양은 서산마루에 걸려 있고, 자줏빛과 푸른빛이 만 가지 형상으로 순간순간 변하며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소 잔등에서 피리 불며 목동들이 짝지어 돌아올 즈음이면 달이 앞 시내에 뚜렷이 떠 있다.“
속된 표현으로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아닌가?
지상낙원이 여기 있음이요,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
이런 곳에서 저런 삶이 가능하다니 도솔천이 어디메뇨? 천국도 필요치 않으니 내세의 삶을 걱정한 필요 없이 그냥 이대로 이승에서 살아가련다.
성리학의 이상향이란 바로 저런 세상이 아니었을까?
비록 성리학의 현실은 ‘약육강식의 동물농장’이었지만 말이다.
-- 찾아주시고 장문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토말(土末)로 떠난 가을여행"을 연재하던 중에 손녀들과 베트남 푸꾸옥으로 겨울여행(10박11일)을 다녀왔습니다. 하여 예쁜 손녀들과의 <푸꾸옥 여행>을 되뇌이며 추억하는 이야기를 먼저 적어 올리고 나서, 다시 이어서 <남도 여행>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리며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세리의 여행) "오늘은 싸파리(Safari) 가는 날" (1) | 2026.01.23 |
|---|---|
| (세리의 여행) "할머니. 푸꾸옥(PHU QUOC)여행 가고 싶어요." (3) | 2026.01.19 |
|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 "토말(土末)로 떠나는 가을여행" (1) | 2025.12.24 |
| 윤선도와 세연정 "토말(土末)로 떠나는 가을여행" (1) | 2025.12.02 |
| 윤선도와 보길도 "토말(土末)로 떠나는 가을여행" (1) | 2025.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