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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윤선도와 보길도 "토말(土末)로 떠나는 가을여행"

by 피안재 2025. 11. 15.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 뉘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렇나니

아마도 변치 않음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 서리를 모르는가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사철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 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五友歌)다.

세속의 부귀영화나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자기 성찰과 덕을 기르려는 삶을 선택한 그의 내면이 잘 드러나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이상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시조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자연 예찬의 시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어떤 가치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돌아보게끔 해주는 작가의 깊은 자기 성찰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고상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현대에 이르러 고산의 문학적 세계에 지극히 우호적인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멋지게 재해석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앞의 글에서 다산초당 말미에 은거하면서도 성리학의 이상을 추구하고 선비로서의 덕목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내면을 짧고 간략하게 피력해 보았었지만, 그런 연장 선상에서 어딘가 모르게 고혹적으로 느껴지는 이 시조를 살짝 뒤집어 보면 대충 이렇게 평가해 볼 수 있겠다.

오우가(五友歌)의 어디에도 사람(人)은 없다.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후대의 학자들은 해석하면서 사람의 내면세계를 끌어들여 한층 더 고고한 기풍을 더해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버렸다.

왜 사람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물(水과) 바위(石)와 소나무(松)와 대나무(竹)와 달(月)을 친구로 삼았을까? 어쩌면 친구라고 선뜻 부를만한 주변의 막역한 지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우가(五友歌)는 고산이 57세이던 1642년 해남의 금쇄동에서 쓴 시조이다. 벼슬 생활도 제법 했고, 당파싸움에도 여러 번 휘말렸고, 귀양살이도 여러 번 했으며, 권력에서 밀려나기도 했고, 그렇게 조정 생활에서 쓴맛과 단맛을 모두 실컷 보았고, 환멸도 느낄 만큼 충분히 느꼈을 때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망쳐 은둔하듯 낙향하여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를 원했다.

인생 노년에 깨닫고 보니 사람은 저마다 성격과 가치관과 추구하는 이상이 모두 제각각이며, 제것을 우선 먼저 챙기고, 제 마음대로 하고 살기에 혈안이다 보니 사람 사이에 진정한 친구는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를 따져보니 아마도 현실은 분명 후자의 세상이며, 아무리 성리학의 이치를 깊게 깨닫는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결코 믿을게 못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경험한 후였다.

그런 그에게 인간적인 친구로 딱히 거명할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겨우 있는 친구도 신분. 권력. 부. 학문적 성취도. 미래의 벼슬길에 이르기까지, 여하간 좀 더 깊이 들어가 따질 걸 따지고 나면 그냥 편하게 가깝게 터놓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믿음의 친구는 아니라 판단되었을 것이다. 친구와 적의 판단 시작은 양날의 칼끝처럼 하나의 점에서 시작되어 갈라지면서 죽이느냐 죽임을 당하느냐로 까지 변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숙명처럼 말이다.

하지만 수석과 송죽과 달은 그렇지가 않다. 늘 변하지 않고 내 곁에 있으며 내 속을 털어놓아도 후환이 없고, 나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해오지 않는다. 그런 친구가 사람 사이엔 없다.

아마도 그것이 윤선도의 솔직한 당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경우들을 예로 들며 혹자는 말하기를, 성리학을 공부했고 나름 학문적 성취를 이룬 선비들이 읊조리는 시조를 두고 학문적인 존경과 감동을 보내는 시선과는 달리, 사뭇 다른 시각으로 냉정하면서도 비판적인 평가를 하는 이들이 제법 많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가장 먼저 음풍농월(吟風弄月)을 거론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음풍농월의 본래 뜻은 ‘맑은 바람을 쐬며 노래를 읊고 밝은 달을 보며 시를 짓고 흥취를 자아내며 즐긴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선비의 흉내는 다 내면서 그저 먹고 노는데 만 열심이다’는 풀이로 심하게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아니꼽고 치졸한 작태를 심하게 비꼬는 용어로 쓰여진 경우이다.

백성들의 근본적인 먹고사는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허울뿐인 성리학의 이기론에 매달려 달린 입으로 허세와 명분 싸움에만 몰두하는 양반 벼슬아치들의 쓸데없는 사치성 놀이문화를 비판하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 현실도피를 하면서 세상을 비판하고 신세타령이나 하며 생산적인 일과는 담을 쌓고 철저하게 도외시하는 몹쓸 인간들이 선비요 학자라고 욕을 담아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것이다.

혼탁한 세상을 살다보면 은둔자적하는 일도 엄연히 삶의 한 방편일 수 있다. 휴식도 필요하고 재충전도 필요할 테니 말이다. 그런 것을 모두 현실도피라고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 혼탁한 세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성리학은 과연 세상의 개혁을 위해서 실질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나?

당장 먹고사는 것이 절실한 상황에서 성리학적 이기론이 어떤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학문인가?

예송논쟁이 사람을 여럿 죽일정도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말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성리학이 사람과 짐승을 구분시켜 준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짐승만도 못한 성리학자가 차고 넘쳐나지 않았던가?

나는 지금 그런 질문을 고산 윤선도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발자취를 거슬러 따라올라가 보면서 하나하나 그 질문들에 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윤선도 선생을 만나러 보길도로 간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진정 많이 설레는 첫 보길도 방문이다.

우리는 지금 해남 땅 토말(土末)에 있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산리(土末, 땅끝마을)에는 이름난 <송호해수욕장>이 있다.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애초에는 방풍림으로 조성된 640여 그루의 해송 숲과 바다가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펼쳐져 있다고 해서 송호(松湖)라 불리게 되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빼어난 풍광이 펼쳐진다.

여기 송호 해수욕장의 양쪽 끝 부근에 두 개의 캠핑 야영장이 위치 해있는데, 하나는 <땅끝 오토캠핑장>이고 다른 하나는 <황토나라 테마촌> 이다. 하지만 사실은 두 개의 별도 야영장이 아니라, 해남군에서 운영 관리하는 공립 야영장의 1구역. 2구역이라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설명이라 하겠다.

애초, <땅끝 오토캠핑장>은 주로 캠핑 야영을 목적으로 조성되었고, 거기에 더하여 18대 정도의 카라반이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새롭게 추가로 조성된 <황토나라 테마촌>은 체험학습을 위주로 하는 연립동과 오토캠핑 야영장으로 꾸며졌었다.

그런 와중에 금년(2025년) 봄에 해남군에서 대대적인 개편사업을 벌여, <땅끝 오토 캠핑장>은 오로지 캠핑만을 위한 전용 야영장으로 재단장하면서, 이곳의 카라반을 전부 <황토나라 테마촌>으로 옮겨 버렸다. 6대 정도의 구형 카라반은 주차장 구석으로 옮겨 설치했고, 나머지 신형 카라반들은 애초 별도의 구역으로 조성해 놓은 어촌계 울타리 가까이 전용 구역으로 이전 설치되었다. 그러면서 <황토나라 테마촌>의 야영장은 지금 폐쇄된 상태이다.

현재의 운영은 <땅끝 오토 캠핑장>은 오로지 캠핑을 위한 전용 야영장으로 활용되고, <황토나라 테마촌>은 체험 학습장과 연립동과 카라반으로만 운영이 되고 있다.

그렇게 시설 개선과 운영 지침이 달라졌음에도, 어디 이런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고 안내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현재에도 카라반 이용은 <땅끝 오토캠핑장 사이트>에서 예약을 받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카라반 이용객들은 당연하게 <땅끝 오토캠핑장>으로 찾아왔다가 부랴부랴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장면을 연출시키고 있다. 그런가하면 이번의 내 경우처럼, 애초 <황토나라 테마촌>의 숲속 야영데크를 기대하고 선착순 시간에 맞추려고 불이 나게 달려갔더니만,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테마촌의 야영장은 폐쇄라며 오토 캠핑장으로 되돌아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선착순인데 이제와서 다시 장소를 옮겨 찾아가라면....... 이미 좋은 자리는 누가 차지하고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실제 찾아가 보니 정말로 그랬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조금만 세세하게 이용자 입장에서 편리하도록 좀 체계적인 운영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과연 한 달이 지난 지금쯤엔 제대로 개선이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주작산 야영장을 나와 부리나케 달려서 오토캠핑장에 이제 막 여행자들이 속속 입장하는 것을 보면서 그대로 지나쳐 테마촌에 당도했는데, 아뿔싸! 그제야 테마촌 야영장이 폐쇄되었으니 캠핑을 하려면 오토캠핑장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허겁지겁 오토캠핑장으로 되돌아 오니, 이미 많은 캠퍼들이 입장을 한 상태였고, 사방에 이미 싸이트가 구축되고 있었다.

<땅끝 오토 캠핑장>은 무조건 선착순이다.

캠퍼들은 정문에서 접수가 없이 그대로 통과해 안으로 들어간다. 차를 세워두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야영장 경내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맞는 사이트를 먼저 고르는 것이 순서다. 사이트를 골랐으면 텐트를 설치하던, 임시로 테이블이나 타프를 먼저 쳐서 이 사이트는 이미 선택을 받은 임자가 있는 자리라는 표시를 남긴 다음에 정문 관리소로 가서 아무개가 몇 번 사이트를 선택했다고 알리고 비용을 지불한다. 비로소 접수가 완료된 것이다. 여기에서의 예약과 접수는 단 하루만 허락된다. 연박을 하려면 다음날 아침 9시 전후로 다시 하루 연장 접수를 하고 하루 비용을 추가로 지불한다. 연박 제한이 없는 대신 매일매일 하루치 예약만 현장에서 받는다. 이때 연박이 접수되지 않으면 빈자리로 체크되고 오후에 새로운 캠퍼의 선택이 허락되는 것이다. 나름 이런 방식의 선착순 제도가 어쩌면 활용도 면에서 훨씬 유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에게는 이런 선착순이 오히려 더 바람직해 보인다.

다시 되돌아간 오토캠핑장은 많이 부산해 보였다. 군데군데 명당이라고 알려진 자리들은 이미 누군가의 차지가 되어버린 후였다고나 할까.

사방 쫓아다니며 남아있는 공간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보았다.

탐문의 결과로 22번 사이트와 4번 사이트와 S번 사이트 세 곳을 놓고 고심하고 있는데, 휙하니 다른 캠퍼가 그사이에 S 사이트에 짐을 부리기 시작한다. 쫓던 새가 날아간 것이다. 정말로 놓친 새가 커 보였다.

세리 할머니의 최종 선택은 22번 이었다. 차를 끌고와 짐을 내리려는데 코앞 건너편의 4번 사이트에도 벌써 다른 캠퍼의 선택을 받았다.

22번 사이트는 여행을 마치면서 내린 결론으로 오토캠핑장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당이라는 결론이었다. 4번도 좋았다. S번과 O번 까지를 최고 명당이라고 하고 싶다.

22번을 사용해 본 결론으로는, 앞쪽 해변쪽의 경관 절반 정도를 공동시설(취사장. 화장실. 샤워실) 건물이 가로막았다. 굳이 흠이라면 그것뿐이지 싶다. 하지만 지대가 높게 만들어져서 답답함이 크게 줄어든다. 나머지 절반의 공간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누릴 수 있다. 대신 날씨나 기상이 급변하여 세찬 비바람이 불어올 때 공동시설 건물이 나름 훌륭한 방패막이 역할을 해준다. 앞뒤나 좌우로 갇힌 공간을 몹시 꺼려하는 우리에게 22번은 높은 지대에서 사방을 내려다보거나 건너다보고, 시원하게 통행로가 확보되고, 아주 알맞은 정도의 거리에 공동시설을 두게 되어서 오히려 모든 장점을 모두 가진 명당으로 치자면, S번이 으뜸이고 다음이 22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찾아간다고 해도 결론은 역시나 그 두 자리 중에서 먼저 고를 것이다.

우리는 해남 <땅끝 오토캠핑장>의 22번 파쇄석 자리에 삼박사일을 지낼 사이트를 구축했다.

그런데 그냥 호락호락 구축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우리 차의 뒷좌석에 실려있는 텐트의 상태가, 한참전에 비가 내리는 주작산 자연휴양림 야영장에서 대충 둘둘 말아서 대충 싣고 온 상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대형 텐트를 강물에 헹구고 나서 탈수 과정을 생략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차에서 꺼내는 게 어려웠으며 빗물이 여전히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폴대가 휘청거릴 정도의 무게감을 극복하고 어찌어찌해서 기어코 텐트를 세웠다. 물이 흥건히 흘러내렸다. 대형 텐트 사용이 어제처럼 비가 올 때 설치를 하거나, 젖은 상태로 철거를 하는 고역이 참으로 커다란 맹점이구나 하고 절실히 느끼는 즈음에, 볕에 펴서 말리는 과정이 아니라 흠뻑 젖어있는 상태로 다시 설치해야 하는, 실로 경험하기 힘든 상황에 놓이다 보니 차마 이게 다시는 할 짓이 못 된다는 후회까지 생겨난다. 신기한 듯 쳐다보는 마눌님 앞에서 죽을힘을 다해 마침내 설치를 완료했다. 캠퍼 경력만 50년 가까운 내공을 총동원한 결과라고나 할까.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지나 햇볕이 좋은지 젖은 텐트 제대로 펼쳐서 말리기엔 딱 좋은 그런 날씨지 싶다. 힘을 썼더니 배가 고프다. 달랑 텐트만 설치해 우리 영역을 선포해 놓고는 안 살림은 차차 텐트가 마른 후에 들이기로 하고 외출을 한다. 근처에 소문이 자자한 (본동 기사식당) 갈치 찌개가 있고, 송지면 하나로 마트는 약 6KM 정도의 거리에 있다고 하니 거기부터 다녀오면 젖은 텐트가 뽀송뽀송 잘 마르지 않을까?

‘까짓, 우리가 가진거라고는 시간과 배짱뿐이 더 있어?’

'개뿔!'

 

 

 


송호 해수욕장 산책을 하고 남도의 맛집으로 SNS에 소문이 자자한 (본동 기사식당)을 찾았는데, 아뿔싸! 웨이팅 줄의 길이가 장난이 아니다.

가다가다 멀고 먼 이 땅끝자락의 오지에 귀양살이들을 당해 온것도 아닐진데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쏟아져 나온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인지 이른 저녁을 먹으려는 사람들인지 아무튼 길게 늘어선 줄을 보자니 영 자신이 없어진다.

웨이팅은 늘 반갑지가 않다. 웬만해선 우리에겐 웨이팅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요식행위가 근절이다. 물론 내 경우에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웨이팅이라면 좀 사정이 달라지기 마련이고, 마눌님은 병아리들과의 놀이시설이라면 웨이팅까지도 당연하다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냥 패스.

웨이팅 없을 때 다시와서 먹는 것으로 하고 다른곳에서 순대국으로 대체를 한다. 하나로 마트를 찾아갔는데 또 아뿔싸! 추석 연휴로 오늘까지 휴일이란다.

헐!

언제나 국내 여행에서 가장 믿는 구석이 하나로 마트와 자연휴양림이었는데...... 오늘 왜이러지?

근처의 대형 일반 마트에서 오늘 하루 분량의 먹거리 마실꺼리 생필품을 긴급하게 수급을 하고 야영장으로 돌아오니 그새 텐트가 아주 뽀송뽀송하게 잘 말라있다.

‘그래. 캠핑장비 말리는데는 자연 바람과 햇쌀이 최고여. 암! 국산 바람과 국산 햇쌀만한게 어디 있나?’

장비를 마저 들여 설치하고, 이너 텐트도 들이고 나서, 야영장 구석구석 살펴보러 산책을 나간다.

참 좋은 세상이다.

뭔놈의 깔 좋고 핏이 사는 신형 캠핑장비들이 언제 저렇게 쏟아져 나왔다냐?

남의 살림살이 좀 슬쩍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기는 한데, 고급화 대형화 다양화 하는 신상 살림살이에 솔직히 약간은 주눅이 드는 느낌은 어쩔수가 없다. ‘또 사고싶니? 우리한데 그렇다고 부족한게 있니? 없는 것 없이 있기는 다 있잖아? 더는 몰래 사들이지 마. 남는거나 처분 해.’하는 마눌님의 눈치를 살펴보니 이미 그런 내 속내를 흩고있는 눈초리다.

‘하긴 마누라 이야기가 언제 틀린적이 있었나?’ 하면서 체념이 아닌 외면을 하는 수 밖에.

몰래 떼어놓고 떠나 온 여행이라 아쉬움은 컸지만, 무릎 수술 회복 단계라 어쩔 수가 없는 이번 여행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눈에 밟히는 게 병아리들이다. 슬쩍 눈치를 살피며 연휴 잘 보내고 있는지 병아리들에게 전화까지 한다. 손녀랑 뭐가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을까? 그런데 긴 통화가 끝날 때까지 할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큰손녀 태리의 음성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팽당한 느낌이다. 제기랄, 어디다 하소연 할데도 없고......... ‘세리라면 틀림없이 할아버지 안부 물었을꺼야. 세리야말로 할아버지 껌딱지니까.’라는 푸념으로 속내를 달래본다. 그러면서도 ‘태리 기집애는 할아버지가 안보고 싶은가?’

그렇게 쉬다가 해가 저물기가 무섭게 모닥불부터 피운다.

여행지에서의 주님(酒)은 얼마나 너그러우신지, 소맥을 평소보다 두 배나 더 말아야 했다. 마셔도 먹어도 취하지를 않는다.

잘 말려서 충주에서부터 여기까지 가져온 장작불로 삼겹살 파티를 하고 나서 불멍을 때린다.

헐!

‘우리 병아리들이 불멍을 참 좋아하는데........ 마쉬멜로 구워 먹어야 하는데........’

‘기집애들아! 할아버지는 자나깨너 너희가 보고 싶은데..........’

또 헐!!!

아침에 일어나 언제나처럼 산책을 하고 멋진 야영장 주변 전망을 맘껏 누리면서 모닝커피를 마신다. 자정을 넘겨 한참 동안 비가 내렸었다. 주작산 야영장에서 느꼈던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와는 전혀 다른, 작게 날아와 부딪는 빗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지정 아늑하고 포근한 평안 가득한 밤이었다.

다시 맑게 개인 하늘을 올려다 보며 ‘오늘은 더울 것 같아’를 연발하면서 야영장을 출발한다.

오늘은 배를 타고 바다 건너 보길도를 방문하는, 아주 오랫동안 고대해 오던 그런 날이다.

우리나라 시조문학의 거장 윤선도 선생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밤새 설레는 마음으로 날씨가 좋아지기를 학수고대했던 그런 나들이 길이다.

보길도로 윤선도 선생을 만나자면 일단 배를 타고 노화도로 가야만 한다. 옛날에는 완도에서 보길도까지 직접 가는 배편이 있었다는데, 보길도와 인근의 노화도 사이에 연륙교가 완공되었다. 주민이 더 많이 거주하고 배의 접안 시설이 더 잘 확보된 곳이 노화도이기에 지금은 모두 노화도 선착장에 일단 도착해 다른 교통편으로 보길도를 다녀오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다보니 보길도를 여행하는 방법은 대략 두가지 코스가 제공된다.

하나는 땅끝 갈두항에서 노화도 산양진항(30분 소요)을 통해 보길도를 여행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완도 화흥포항에서 노화도 동천항(40분 소요)을 거쳐 보길도를 여행할 수가 있다. 어느 곳이나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자가용을 가지고 건너갈 수가 있다. 보길도 여행은 대중교통편이 원만하지 않아서 차를 가지고 가야만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조금은 특별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땅끝 전망대가 있는 언덕을 넘어 땅끝 여객 터미널로 향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얼이 서려있는 보길도(甫吉島)를 찾아서."

우리 역사에서 조선(朝鮮)은 ‘선비(書生)의 나라’다.

물론 고려(高麗)라고 해서 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고려의 주체사상이 어디까지나 불교(佛敎)였기에,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선비들의 입지가 그리 크지 않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교(儒敎) 사상체계를 근본으로 세워진 조선은 그야말로 유학(儒學)과 성리학(性理學)으로 중무장한 선비(書生)의 나라이자 그들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본시 선비(書生)라 하면 학식은 있으나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고고한 인품의 지식인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점차 학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지극히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더하여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에 나가서도 자리와 재물을 탐하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지식인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본래는 굳이 벼슬에 나가지 않아도 살림살이가 살만하고, 일평생 서책을 가까이하며 유학 연구에만 몰두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터득한 학문의 경지를 칭송받을만한 양반을 가리키며 존경을 담아 부르는 이름이 바로 선비(書生)였다는 말이다. 반대로 공부도 안 하고 평생 놀고먹는 데에만 혈안이 된 양반 아치는 죽어도 선비라 불러주지 않았다. 양반사회이다 보니 흔한 게 선비라 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아무나 선비가 될 수는 없었다.

세상살이가 변하면서 사회풍조도 변했다.

학문을 연구했으면 배운것을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제대로 써먹어야만 한다고 가치관의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쓰지 못할 학문 연구는 모두 공염불이라 여기게 된 실학(實學)이 등장한것이다. 배우고 연구한 학문을 사용하는 방법은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가서 자신의 뜻을 펼쳐보이는 것이 최고이자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이 진정한 선비(書生)의 정신이자 선비가 가야 할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학문 연구는 본격적인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단계로 급하게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일타 강사와 사설 학원이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과거 시험에 급제를 일단 하고나서, 선비로서의 지조와 기개를 지키면서 관직생활을 통해 자신이 성취한 학문과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 진정한 ‘선비정신’이며 ‘선비의 이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조선은 선비의 나라’가 분명할진대, ‘조선이 성리학의 이상이 펼쳐진 지극히 이상적인 국가’라는 표현을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어디에서 목격하지 못했다.

‘선비정신’은 지극히 아름다운 이상향이었는데, 그 선비정신으로 뜻을 펼친 조선은 과연 어떤 나라였으며, 조선을 살다간 대다수 백성들의 삶은 진정 어떠했는가?

소위 선비(書生)라 불린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대충 어림잡아도 ‘조선 시대의 사회지도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그들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 사족(士族) 혹은 사대부(士大夫)로 칭해지기도 하는 부류였다고 본다면, 더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쉽게 그들의 모습과 행실과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세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가 있게된다.

‘성리학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무장한 선비정신을 앞세워 맑고 깨끗한 세상을 펼친다’라고?

‘모두 어불성설(語不成說)인게야.’

‘조선은 말이야. 선비의 나라가 아니야. 조선은 임금(君王)의 나라야. 뜻은 신하가 아니라 임금이 펼치는 것이라고.’

‘제대로 뜻을 펼치려면 임금을 끌어내리고 성리학이 임금에 자리에 올라야지. 그래야 뜻을 펼치지. 그런데 그건 역모야. 역모가 수백 번 아무리 반복되어도 성리학의 이상세계는 영원히 도래하지 못해.’

'왜? 그건 성리학에 목숨을 내건 선비들 때문이기도 하지.'

그런 기로에 서서 나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이어서 또 한 명의 선비를 만나보기 위해 보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를 찾아나선 길이다.

앞에서 피력한 ‘성리학의 이상을 펼치고자 한 조선의 선비문화’를 너무 쉽게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한 지인으로부터 받았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하여 간략하게나마 (보길도의 윤선도 발자취)를 탐방하기에 앞서서, 이어지고 있는 지면을 통해 대답을 하고 넘어갈까 한다. 핵심은 지극히 개인적 주관적인 필자의 생각과 판단은 그렇다는 뜻이다. 나라고 해서 선비 문화나 정신의 모두 가치가 없고 쓸모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성리학의 이상이 제대로 펼쳐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여러 심각하게 부작용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 아니겠는가?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정도에 따라 다른 판단이 있을 수 있으며, 거기에 무슨 유불리가 있겠는가?

윤선도도 정약용도 모두 훌륭한 성리학자이자 존경받아 마땅한 어른들이다.

그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고 가르침을 되새겨 보면서 더 배울 것은 배우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재해석이 필요하다면 해보고, 오늘에 다시금 되살려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모든 사물의 앞면만 보아서는 진실을 헤아리기가 불가능하다. 사물의 뒷면까지 제대로 살피고 나서야 대상 사물에 대한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헤아려 주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2차원적 사고는 벗어나 적어도 3차원적 사고를 가져야 진실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당장 4차원적 접근을 할 생각이나 의도는 전혀 없다.

성리학은 비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허구의 심한 말장난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고불변의 진리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세상의 이치에 관한 수많은 학설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런 의문의 시작에는 ‘과연 유교(儒敎)를 하나의 종교로 볼 수 있느냐’하는 의문이 먼저 제기되었던 것을 상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볼 것이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그만한 근거와 이유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

<아주 짤막한 조선의 성리학(性理學) 이야기>

우리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을 처음 들여온 사람은 안향(安珦)이다.

원의 간섭기에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부부를 호종(1289년 11월)하고 직접 원나라에 가서, 주자의 저작들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남송의 철학자)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1290년(충렬왕 16년) 고려로 돌아왔다. 고려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며 동방 18현 중의 하나로 존경받았던 안향에 의해서 한반도에 주자(朱子)가 집대성한 성리학이 처음 도입된 것이다.

안향(安珦)은 모든 백성이 일상생활에서 유학의 도리를 지켜나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며 유학이야말로 인간이 근본으로 삼아야 할 유일한 올바른 가르침이라 생각하였으며, 성리학의 가르침을 원나라에서 처음 접하고 직접 그것을 연구하며 고려로 가져와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가르쳐 깨닫고 배우게 함으로써 이 땅의 성리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때부터 안향을 시작으로 한 신진사대부의 정계 진출은 결과적으로 질서가 무너져가던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건국하는 주요 실질적인 원동력이 되었으며, 성리학의 이념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들어서자 안향은 도학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문묘에 제향되었다.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에 처음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하기 위해 풍기에 세운 사당에서 기원한 서원으로 1542년(중종37)년의 일이다.

남송은 원나라 쿠빌라이에 의해서 멸망했다. 멸망한 남송의 유학자 주자의 가르침을 역시나 원나라의 지배를 심하게 받고 있던 고려의 유학자가 찾아가서 들여왔고, 이를 통해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조선이라. 하여 그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자 선비의 나라가 되었다.

성리학의 가장 핵심은 이기론((理氣論)에 근거한다고 하겠다.

그런 이기론((理氣論)의 리(理)는 천하의 모든 사물이 ‘그와 같이 이루어진 근거(所以然之故)’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법칙(所當然之則)’이라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다. 기(氣)는 그러한 근거와 법칙에 의거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질료가 된다. 리(理)는 추상적인 원리로서 형체를 갖지 않는 존재인 까닭에 현실 세계에서 리의 실현은 기의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사상적 바탕 위에서 흔히 리(理)는 임금(君王)을 가리키고, 기(氣)는 신하(臣下)를 가리키는 것이 바로 조선 성리학의 근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왕과 신하들의 이상적인 관계에서 비로소 성리학의 이상이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성리학적 연구와 열띤 토론과 성취를 이룬 신하들이 임금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열고자 하는 게 조정의 대신과 관리들이 하는 일이었는데,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논리와 말싸움에 지나치게 치우치다 보니 공염불이 되었고, 허구한 날 신하들의 다툼과 분열상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임금은 성리학이 꼴도 보기 싫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이 엄연한 조선의 현실이었으며, 모든 당쟁과 사화는 거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토론을 아주 중요한 의사결정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뜻과 생각과 다른 방법론을 가지고 마주 앉아서 절서 정연한 논리와 이치를 앞세워 상대를 설득함으로써 문제해결의 답을 찾았다. 거기까지는 지극히 이상적인 의사결정 방법을 채택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해결의 방법은 최종적으로 왕 앞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놓고 선비들 간에 견해를 개진하는 것을 넘어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윤허를 받아내야 하다 보니, 당연하게 반대하는 상대방의 생각과 주장의 그릇됨을 지적하고 책임을 따지는 경우로 번지기 마련이다. 그 책임에는 제기된 안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벌어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사고와 자칫 훗날 복권된 정적에 의해 거꾸로 겪게 될지도 모를 복수까지를 염두에 두고 철저하게 정적을 완벽 응징 내지는 제거의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당파싸움이고 결국 사화의 비극까지 초래하고 만 것이다.

선비라는 건, 과거를 거쳐 관료가 되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애초부터 어떤 특정 분야에 특화된 사전에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인재들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고 합의된 집단의식을 사용해 특정한 목적을 향해서 머리를 합치고 힘을 합치는 것이 파당이다. 그런 그들을 견제하고 대항하기 위하여 또 다른 파당이 만들어 졌다. 매사에 사사건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주어진다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 승리는 부와 명예와 높은 지위가 주어지지만, 패하면 삭탈관직은 물론 재산몰수와 심하면 멸문지화를 당하기도 한다.

이 난장판에서 사약을 받고 멸문지화를 당하는 최고형을 겨우 피하고, 다음의 중죄형을 받은 사람이 바로 정약용이며 윤선도이며 김정희요. 이황과 이순신에게까지도 귀양이 내려지는 것이다.

조선 역사를 통 털어 어느 정도의 높은 벼슬을 기준으로 귀양살이를 간 신하가 더 많을까? 아니면 아무 일 없이 터벅터벅 벼슬길만을 걸은 신하가 더 많을까?

아마도, 사대부 소리를 들을 정도의 벼슬에 오른 사람중에서 귀양살이를 겪지 않은 신하는 지극히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벼슬만 높은 꽁생원이 아니라면 말이다. 남에 입에 오를 일이 없는 낙하산 아니면 언제 어디서든 정적으로부터의 견제나 모함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게 관료의 어두운 숙명이었다.

그런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성리학이라는 특화된 교육과 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재들이었다.

바로 여기 이부분에서 선비에 대해 현대를 살아가는 일부 한국인들은 '실용성에 융통성까지 없는 학문에 빠져 나라를 망친 집단이 바로 선비(書生)라는 비판적인 인식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성리학을 최초 도입한 안향의 초상(국보 111호)

주희(朱子)는 일생을 바쳐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철학자다.

대제국이었던 한족의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략에 수도개봉을 점령당하고 황제까지 체포당해 포로로 끌려 갔다. 금나라는 허수아비 정권을 내세워 지배하고자 하였는데, 포로로 잡혀간 왕족 중에 유일하게 끌려가지 않고 살아남았던 조구가 임안(항저우)으로 수도를 옮기고 새로운 남송을 세웠다. 이후로 빼앗아 차지하려는 금나라와 지켜 살아남으려는 남송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일백 년 이상 지속되다가, 새롭게 대륙의 최강자로 등장한 몽골의 침략으로 두 나라 모두 역사에서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 주희는 이렇게 국제정세와 국내정세가 모두 어지러운 난세에 태어난 유학자였다.

송나라 정부는 무능하였고 심각하게 부패했다. 당연하게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극도의 혼란과 기아가 만연했다.

그러자 주희는 황제 앞에 나아가 이렇게 외쳤다.

“간곡하게 바라옵건대 부디 폐하께서 제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시어, 의리와 이익을 함께 시행하고(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아울러 쓴다(王霸竝用)는 그간의 그릇된 간언들을 모두 물리치시고, 분노를 억제하고 사욕을 막으며 선으로 옮겨가며 허물을 고치는(懲忿窒慾 遷善改過) 일에 관심을 가지시고 종사하시고자 하시면, 그래서 순수하고 깨끗한 유학의 도리를 치세의 근본으로 삼으신다면 민심은 안정되고 부국강병이 뒤따라 태평성대를 이룩할 것입니다. 벌을 각오하고 올리는 말씀을 부디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기득권을 차지한 측이나 기득권을 차지하려고 혈안인 측이나 저마다 속으로 이런 주희의 말에 한가지씩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주희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교의 도덕성을 앞세워 혼란한 세상을 틈타 ‘어리석은 군주’를 구속하려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자 이래 유학의 정신적 권위에 기대 벼슬에 나선 사대부(士大夫)의 정치적 지위를 한층 이끌어 올리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주희가 받게 된 의심이었다.

주희가 황제에게 올린 말씀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는 바른 말이었지만, 그 방법의 실천을 반듯이 유학자가 대신 나서서 집행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유학자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모든 일의 가장 큰 핵심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正心)인데, 그 일을 덕망과 학식이 있는 유학자가 나서서 꼭 행해야 한다’면, 자칫 임금에게 대놓고 바지사장이 되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수렴청정이 아니라 대놓고 진짜 황제 앞에서 버젓이 간판까지 내걸고 황제대행 노릇을 하지 말란 법이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고로, 이제까지의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은 죽이되던 밥이되던 말던 무조건 임금의 마음대로였는데, 이제부터는 인의(仁義)를 중심으로 하는 군신 관계와 도덕성을 앞세우는 윤리적 규범 안에서 해결하자는, 이제까지의 일방적 군주권(君主權)에서 벗어나 신권(臣權) 중심의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해 나가자는 뜻으로, 말은 맞는 것 같은데 듣기에 따라서는 묘한 뉘앙스가 풍겨 나온다고 하겠다.

얼마후에 우리 역사에서 실제로 이와 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실행에 옮기는 혁명가가 등장한다. 그 결과에 까지 그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제까진 이런말을 함부로 꺼내면 무조건 역모로 몰려 거열형에 구족 몰살이라는 처형을 받을 것을 당연시 해왔는데 신진사대부들이 워낙 많이 생겨나고 세력이 커지니 이런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주희의 바램은 결국 그를 견제하고자 하는 부패한 세력에 가로막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남송도 금나라도 결국엔 몽골제국 쿠빌라이에 의해 몰락했다. 고려도 비슷한 꼴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에서 주희의 증손자인 주잠(朱潛)이 어지러운 남송을 탈출해 고려로 귀화해 주희를 시조로 하는 신안 주씨의 중시조가 되면서 우리나라에 정착한다.

그렇다면 주희의 후손이 성리학을 몰랐을 리가 없다는 전제가 가능해 진다. 그 가족이 귀화해 정착함과 동시에 성리학은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지극히 타당할 것이다.

그런 주잠과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으로 봉직하던 안향 사이에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혹, 이 시기에 주잠과 안향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당시로선 신학문이랄 수 있는 성리학에 대하여 주잠으로부터 소개를 받았으며,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부부를 호종하여 직접 원나라에 다녀오는 계기를 통하여 본토에서 오리지널 성리학을 접하고,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돌아오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원의 간섭기가 시작된 이후로 벌써 고려라는 국가의 말기 증상이 심각하게 퍼지고 있었다고 본다면, 주희가 황제에게 성리학을 권면하던 시기와 안향이 성리학을 접하게 되는 시기가 모두 절대적 혼탁함과 극심한 부패와 통치세력의 무능이라는 비슷한 환경이 만연해있었지 않은가?

세상은 혁명과도 같은 개혁이 필요하고 성리학은 그 개혁에 딱 들어맞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충분히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반도에 전해진 성리학의 이념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급속도로 널리 퍼져 나갔다. 하여 이른바 새로운 당대의 지식인들....... 신진 사대부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고려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성리학의 새로운 이념에 동참한 당대의 지식인에 선두주자로 목은(木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같은 젊은 지식인들이 등장한 것이다. 더하여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조준(趙浚). 하륜(河崙). 이숭인(李崇仁) 등이 가세하였고, 정점에서 이성계(李成桂)와 같은 신진 무장세력까지 가세하게 된다.

하지만 성리학의 태생적 한계때문이었을까?

곧 이들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지고 서로간에 마찰과 분쟁을 유발시킨다.

고려라는 나라를 어떻게든 개혁시켜서 계속 유지해 나가자는 온건파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하나 다시 만들자는 강경파로 나뉘게 된다.

성리학의 가르침대로라면 일단 역성혁명은 근본적으로 있을수가 없는 것이고, 설사 이견이 생겼다 해도 끝까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의견 수렴을 하는 것만이 지극히 타당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원이 온건파의 주장인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암살해 버림으로써, 이제 서로 간에 건너서는 절대 안되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역성혁명이 일어났고 이성계가 승리했다. 이제부터는 성리학의 근본을 가지고 혁명을 정당화시키는 사람들이 승리자(공신)가 되었고, 혁명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패배자(역적)이 되었다.

이제 고귀한 성리학의 이상은 모두 말뿐인 공염불이 되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렇게 성리학의 이념을 숭고하고 불변의 진리처럼 떠받들던 선비들이 공신이 되고 권력을 잡으면서 구태의 썩은 관리들이 하던 짓을 고대로 반복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몰려다니는 부류의 얼굴과 이름만 바뀌었을 뿐, 혁명 이전과 이후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피폐하고 굶주린 백성은 언제 또다시 어느 쪽에서 피바람이 느닷없이 들이닥칠지 몰라서, 자나깨나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와 미풍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야만 했다. 민초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잽싸게 불어오는 피바람을 감지하고 반대쪽으로 먼저 드러누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민초들이 잡초가 되어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는 이유는 바람의 냄새만으로도 정세를 읽고 잽싸게 어디로 드러누워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참으로 용한 재주를 가졌기 때문이다.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롭게 건국된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유교(성리학)가 자리 잡게 노력한 사람들은 성리학으로 무장된 젊고 유능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이었다.

왕조가 바뀌는 역성혁명의 와중에 주체였던 정몽주((鄭夢周)가 암살당하자, 이때부터 조선의 성리학 계보는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중심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길재의 학통이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졌고, 다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유호인, 남곤, 이행, 조위, 남효온, 홍유손 등으로 갈려져 뻗어나갔다. 이런 와중에 김굉필에게서 배운 조광조, 김안국의 시대에 성리학이 크게 번성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종직의 제자인 손중돈(孫仲暾)에게서 걸출한 성리학자인 이언적(李彦迪)이 나온다.

이언적(李彦迪)은 주희의 충실한 숭배자라 할만할뿐더러 조선의 성리학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람이다. 이언적의 학통 안에서 ‘기(氣)보다는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主理) 성리학자’와 이에 반대하는 이(理)를 근본으로 여기는 성리학자들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일어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여기에서 시작되어 끝내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고,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게 되고, 또다시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갈리게 된다. 이 모든 파행의 내면에는 왕권의 존중에 대한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서인-노론-벽파의 계보가 가장 극렬하게 왕권을 비판한 주희의 원칙론에 충실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럼 여기에서 끝이났느냐?

절대로 아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당파는 또다시 분열한다.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도산서원에 모인 사람들을 (영남학파)라 불렀으니, 이황. 조식(曺植). 유성룡, 김성일, 정구, 김효원, 이산해, 심의겸, 윤근수, 윤두수, 허엽 등이 그들이다.

반면에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모인 경기도 충청도 일원의 사람들을 (기호학파)라 불렀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 김장생. 조헌. 송시열·권상하·한원진 등이 그들이다.

그런가 하면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모여서 영남학파나 기호학파와도 원활하게 교통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호남학파)라고도 불렀으니, 기정진, 김인후, 기대승, 최덕지, 정약용, 김부식이 그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이 말하는 성리학의 이상은 현실과는 괴리가 크게 차이가 났다.

사림파(선비)들은 현실적인 민생과 부국강병보다는, 성리학 이념 체제 안전과 전파를 위한 명분 쌓기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그것이 군왕과 백성들을 모두 위하는 길이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상적인 세상은 성리학 이념이 곳곳으로 전파되어 성리학 이념에 따른 질서가 체계적으로 자리 잡는 안정된 세상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어쩔 수없이 파생되는 민생이나 부국강병은 차차 보완해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안된다면........ 그런 가정하에서 출구로 준비한 것이 바로 <맹자>의 교훈이었다.

<맹자>는 ‘군주는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며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먹인 다음 도덕을 교육해야 인간의 선한 품성을 지킬 수 있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백성을 괴롭히는 불인한 군주는 쫓아내야 한다’는 역성혁명의 길도 열어놓았는데 사림은 항상 이 대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정도전(鄭道傳)이다.

정도전이야말로 혁명적인 발상과 절대적 실천력으로 적어도 우리역사 안에서 유일하게 성리학적 성공을 이루었던 사람이 아닐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다.

‘주희(朱子)는 성리학을 창안하고 설계한 이론가였지만, 정도전은 이를 실행하고 성공시킨 정치가이자 전략적 행정가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리학의 이념이 추구하는 이상세계는 지극히 짧은 기간, 정도전이 주도하는 개혁정책의 시기 동안만 유일하게 성공했었다고 생각한다.

분명 그것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성공 때문에, 성리학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점 때문에 그는 조선왕조 최고의 역적이 되었고, 최고의 극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왕조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의도적으로 그를 훼손시켰고 지워버렸다.

이방원(태종)에 의해서 최고의 역신으로 낙인찍힌 정도전이 새롭게 개국에 직접 참여했던 조선은 절대왕정기인 14세기에는 생각조차도 불가능했을 새로운 정치체제였다. 오늘날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나 겨우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 입헌군주제와 비슷한 ‘재상(宰相)이 중심이 되는 신권정치(臣權政治)의 나라’를 현실의 세계에 펼치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왕조(이방원)로부터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찬란하게 비상을 시작하던 성리학의 이상이 한순간에 날개가 꺾이고 추락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그 많은 선비(성리학자) 중에 정도전의 편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 모두가 왕조(이방원)의 편에 붙어서 정도전을 비판하고 매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애초부터 불손한 의도를 가진 역도’였다고 말이다.

이것은 자신들이 목숨보다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내세우고 주장하는 성리학에 대한 모독이자 제 얼굴에 침뱉기였다. 거룩한 사명이나 고고한 선비의 기품보다는 생사여탈권을 쥔 권력 앞에 무릎꿇고 읊조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선비로서는 결코 씻어낼 수 없는 치욕과 같은 것이었다. 기개와 지조의 선비 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도전은 이제 성리학 계보에서 우연히 생겨난 돌연변이 취급을 당했다.

태종으로 즉위한 이방원은 대대적인 정도전 지우기에 나섰다.

그중 하나로 아이러니하게 자신이 죽여 없애야만 했던 정적 정몽주를 높이 치켜 세우기 시작했다. 어느새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역성혁명의 정적은 일등 공신이 되었고, 역성혁명의 최고 공로자는 만고의 역적이 되고 말았다. 모두 같은 사람에 의해서 말이다.

자고로 사람의 팔자란 살아서만 알 수 없는게 아니라, 죽어서도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 처세에 능한 모사가. 파렴치한 세도가’가 그의 새로운 이름이 되었다.

정도전은 사병혁파는 물론 사원경제 개혁으로 토지제도 개선 등 수없이 많은 개혁정책을 내놓고 실현중에 변을 당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그를 제거해야만 했던 이해당사자인 태종에 의해 그의 개혁안들은 모두 정책 입안되고 반영되기에 이른다. 오로지 하나, ‘재상 중심의 통치 체제’만 쏙 빼놓고 말이다. 정도전을 죽여야만 했지만, 그의 이념과 이상까지 죽일 수는 없었나 보다.

오히려, 그런 통치 체제야말로 성리학의 이상 실현에 꼭 필요하다고 주희가 애써 주장했던 내용이 아니었던가?

시대상황에 따라 선택이나 판단과 평가는 얼마든지 달라지게 마련이다.

‘정도전은 억울하게 죽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죽음을 외면하고 방관하다 못해, 그를 능멸하는데 앞장섰던 당대의 모든 지식인 선비(성리학자)들은 여전히 고고한 척하며 다른(비굴한) 살길을 찾고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른 고고한 선비들의 품격 속에는 어느새 ‘언제든 살기 위해서라면 다툼이든 분열이든 모함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필요해지면 언제든 감행해야만 한다는 검은 속내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은 자신들의 부패해가는 부조리한 속내를 고고한 선비 정신으로 감추는데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정도전이 죽었고 철저하게 지워졌지만,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조선의 성리학은 점점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정도전 같은 과감한 실천력으로 실질적 구현에 뛰어드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언제나 말로써 의견을 제시하고 말대꾸로 싸움질이나 일삼으면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백성들에게 태평성대를 이루게 해주기 위해서 불철주야 책을 읽고 연구하고 정책을 입안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타령만 늘어놓기 일쑤였다.

어제도 그러했고 오늘도 또 그랬다. 아마도 내일도 그럴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나 나라가 크게 흔들리는 혼란한 상황을 겪고, 그제야 정도전을 닮은 또 한 명의 개혁자가 등장했으니 바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다.

우리나라 유교(儒敎)의 역사에서 김굉필(金宏弼)은 모든 조선 성리학자들의 시조로 평가받고 추존되고 있다. 그런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이며 남효온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서 걸출한 한 인물이 제자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바로 조광조(趙光祖)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근본이념과 예를 정치와 사회 기강과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도덕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평생 추구했다. 그것은 군주에게도 철저하게 경연을 통해 성리학적 교육을 해야 하고, 대대적인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실력과 파벌에 구애받지 않는 너른 인재 등용 등이 개혁의 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조광조는 이를 위해 군주가 성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봤다.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마치 전설과 같은 그의 학통이 든든한 배후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도 성리학의 이상향으로 활짝 꽃을 피우는 듯 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그만 추락하고 말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 결과 또한 정도전의 경우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광조도 조선의 큰 역신 반열에 올랐다.(훗날 복권은 이루어지지만 말이다)

 

성리학이 과연 무엇이기에 이렇듯 수많은 사단과 사화를 불러온단 말인가?

어쩌면 단 하루도 피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성리학이 주된 통치이념으로 작용하던 모든 시기에 걸쳐서 말이다.

그 피바람이 불던 사건과 사건의 사이에 정약용이 있었고, 윤선도가 있었고,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가 있었고, 이담로가 있었다.

그래서 남도의 문화와 향기와 정취속에서는 언제나 피와 눈물의 냄새가 난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의 다른 이름은 (부용원)이다.

이곳 일대의 지형이 마치 연꽃이 터지며 막 피어나는 모습을 닮아서 부용(芙蓉)이라 했다. 왠지 모르게 부용원(芙蓉苑)이란 이름에 더 정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필자가 주변에서 자주 입에 달고 사는 이야기 중에 ‘대한민국 구석구석 경치가 끝내주는 장소에는 반듯이 절(寺)이 있다’고 토로하고는 한다. 좋은 장소는 이미 전통 사찰이 다 차지해 버렸다. 사찰이 차지하기가 좀 그런 장소에는 반듯이 무덤(묘지)이 벌써 차지하고 있다. 임금에서 말단 벼슬아치까지 좋은 터(명당)를 차지해 집을 짓던가 무덤을 쓰던 일단은 차지하려고 말뚝을 박았다. 그런 다음으로 부와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경치 좋은 곳에 정자나 누각이나 별서(別墅)나 별장(別莊)을 지었다. 한국인의 DNA 속에는 좋은 땅이면 일단 무조건 환장하고 보는 아주 특별한 유전인자가 내재 되어 있어 보인다. 나라의 영토가 좁아 명당이란 것도 한계가 있다 보니, 천정부지로 치솟아 오른 땅값과 온갖 규제를 지켜보면서, 이제 서민들 입장에서 경치 좋은 명당이란 그저 먼 딴 세상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 와중에 땅에 대한 온갖 강력한 규제를 뚫고 국민 복지와 여가선용의 차원에서 ‘자연 휴양림’이란 것이 생겼다.

그나마 남아있는 풍광이 빼어난 명당 터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현대판 열린 별서(別墅)나 별장(別莊)이 생긴 것이다. 국가와 산림청이라는 공공기관의 업적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진심을 가득 담아 갈채와 감사를 드리고 싶을 정도이다. 덕분에 이제 나는 임금이나 윤선도나 정약용이나 송시열이나 정철이나 양산보를 더는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하여, 이제는 대한민국 곳곳의 내놓으라 하는 경관이 빼어난 소위 명당이라는 곳에 세워진 사찰이나 여러 문화재를 찾아가 만나보고 누려보는 기회를 종종 가져보는데, 역시나 이런 곳에 이르면 늘 풍수지리(風水地理)라는 과거의 학문에 대한 경이로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곤 한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의 지형이 마치 연꽃이 터지며 막 피어나는 모습을 닮아서 부용원(芙蓉苑)이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연꽃모양의 터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해서, 원만함, 고귀함, 다산, 인재 배출을 가진 매우 길한 터(길지)로 삼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여기에 더해 연꽃이 흙탕물 속에서도 깨끗하게 피어나는 상징으로 청정함과 고귀함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자면 윤선도는 성리학자로서는 좀 보기 드물게 풍수지리(風水地理)에도 해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사고와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풍수가 이의신의 속내를 뚫어다 볼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윤선도의 묘지 터와 연계하여 전해지고 있으니 말씀이다.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이 바로 그런 땅의 기운 위에 윤선도가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세운 별서(別墅)라고 하겠으나, 조금만 그 속을 들여다보게 되면 ‘이게 별서라고?’ ‘이건 난개발을 통한 부동산 투기 아냐? ’‘이건 모 이단 종교의 별천지 왕국아냐?’ ‘윤선도가 정말 제대로 된 성리학자였다면 부용원이 아니라 고산서원을 지었어야지?’ ‘이건 성리학에 대한 배반 아냐?’ ‘이 정도의 재개발이면 수탈이나 착취가 없이 불가능한 것 아니야?’ ‘부와 권력을 가진 양반네의 극한의 사치놀음이 바로 부용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완전하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눈과 가슴은 대한민국 최고의 정원을 돌아보면서 극한의 호사를 누리고 있음에도, 머릿속 한쪽에서는 어느 책자의 한쪽에서 읽었던 ‘그 양반들은 정자를 짓고 사람들을 불러다 노래하고 춤을 추게 하면서 시를 쓰고 산해진미로 풍류를 즐겼지만, 그 배경에는 이곳 섬에 살던 사람들을 모두 동원하여 돌과 흙을 가져다가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드는데 피와 땀을 쏟게 만들었수다. 볍씨를 뿌려 쌀을 수확해 놓고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아슈? 보릿쌀을 주었다오. 그것도 양이 부족하여 겨우 근근히 살아갈 정도였는데, 그 양반들은 그 쌀로 술을 빚어서 흥청망청 양반 놀이를 허구헌날 즐겼단 말이요. 우리 섬사람들은 눈앞에 양반들이 지나가거나, 노랫소리만 들려도 치가 떨렸을 정도라우. 그놈의 정자를 학 불질러 버리고 싶은 것이 모든 섬사람들 마음이었답니다.’라는 구절이 떠나지 않았다.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실제로 불을 확 싸질러 현실에서 (윤선도원림)을 볼 수 없었다고 해도, 나는 섬사람들을 결코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느낌으로 보자니, 이 모든 것이 그저 올곧은 선비정신의 결과물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보여주고픈 사람이 있었고, 그렇게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드러나는 것이 모두는 아니지 않겠는가?

어디 성리학과 선비들의 생활과 가치관에 밝고 따스한 면만 있었던가? 붕당정치의 실체를 보지 않았던가? 그도 그들중 하나로 그 당시 그 세계를 살았던 소위 양반네 중의 하나였다.

그렇다면 고산 윤선도의 삶과 학문 이면에도 다 드러나지 않은 치부가 엄연히 존재했을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그런 치부의 일면이 ‘과거의 현지인들에게 부용원은 저주의 대상이었다’라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여기 보길도뿐만이 아니었다. 노화도에도 있었고, 진도에도 분명 있었다. 해남윤씨가 이룬 거대한 부(富)의 이면에 늘 따라다니는 이야기다 보니 그것은 곧 윤선도 본인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윤선도와 문인으로서 라이벌일랄 수 있는 정철의 경우, 시인으로서의 정철은 추앙과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정철은 멍멍이만도 못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처럼, 시조인으로 최고의 경지에서 찬사를 받아 온 윤선도이지만,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서의 삶은 어쩌면 알려지고 보여지는 것과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잠시 가져본다.

 

자고로 관직에 나가고자 하는 선비(書生)라면 확실한 자기 철학과 신념을 가져야 한다.

하여, 직신(直臣: 마음이 강직한 신하)이라 함은 적어도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고 관직에 나가 있는 선비들이 반듯이 갖춰야 하는 가치이자 품격인 것이다. 이는 선비라면 당연히 직신이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선의 역사를 통털어 직신(直臣)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만한 이름들이 그렇게 많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 임금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자주 들이댔다고 해서 모두 직신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벼슬에서 자주 쫓겨나거나 귀양살이를 밥 먹듯이 했다고 해서 그가 강직한 신하라는 명분 또한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올바름(眞)이 반듯이 뒤따라야만 한다.

적어도 직신(直臣)이라 불릴려면, 확고한 가치관과 신념으로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 철저하게 연구와 검토를 거쳐 군왕(혹은 만백성)에게 진실로 유익하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방안과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이 잘 반영되도록 신념을 바쳐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누군가 다른 방법이나 의문 제기에 충분히 듣고 생각하고 반영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또한 중요하다. 그럼에도 공공의 질서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이 서면 기꺼이 목숨을 걸고 완수에 신념을 다 바치는 신하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직신이라 할 수 있겠다.

보길도를 여행하면서 곳곳에서 ‘윤선도는 직신(直臣) 이었다. 그래서 18년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는 안내 문구를 곧잘 접하게 된다. 그랬나?

보길도를 떠나 오기전에 송시열의 시가 적힌 암벽을 찾아가 보았다. 그의 시를 풀어놓은 안내 표지판을 보면서 ‘송시열이야 말로 직신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조 왕조 실록)을 통털어 가장 여러 번 이름이 등장하는 직신중에 직신이 바로 우암 송시열이 아니겠는가?

고산 윤선도와 우암 송시열은 세상이 다 아는 정적(政敵)이다. 하나가 될 수 없는 앙숙이다.

‘윤선도가 직신이었으니 송시열도 직신이다’라는 명제는 성립될 수가 없다. 왜냐면 같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이 달랐고 상대방을 저주에 가깝게 폄하하고 비판했다. 진리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둘 다 직신일 수는 없다. 누가 올바른 주장을 했고, 누가 옳다고 평가를 받는가가 중요하다. 윤선도 지지자는 윤선도가 직신이고, 송시열 지지자는 송시열만이 직신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조선은 온통 성리학으로 무장한 대쪽같은 올바른 신하들만으로 빼곡히 가득 채워졌는데, 조선의 역사는 왜 그렇게 엉망진창이었을까?

<그것이 알고 싶다.>

‘고산은 집권세력에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18년이나 유배를 당했던 결과로, 조용히 물러 나와서 이곳 부용동에서 20년 동안 은거 생활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 어디 솔직하게 한 번 나도 들이대 보자. 직신(直臣)의 심정으로 말이다.

‘윤선도의 보길도 생활 20년을 어디 은거라고 할 수 있겠나? 그것들을 어디 선비 정신에 입각한 성리학자의 모범적인 생활 태도라고 볼 수 있겠나? 그것은 은거나 은둔이 아니라 유유자적(悠悠自適), 가진 자가 하고 싶은거 다 하고 놀고 싶은 대로 실컷 노는 낙원처사(樂園處士)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평의 모 이단종파 궁전처럼 보길도에 자신만의 왕국을 지어놓고 최상급 양반 놀이를 하고 풍류를 즐기고 살았으면서 무슨 선비의 도와 품격을 따지고 직신(直臣)을 논한단 말인가? 조선이 임금의 나라이면 보길도는 윤선도의 나라인지라, 혹 들킬세라 은둔이니 은거니 하긴 했지만, 실생활은 임금을 넘어 신선의 세계에 살고 싶었던 것이리라. 혹여 이런것 또한 모반이나 역모가 아닐까?'​

부용동에 세연정을 완성한 고산은 현판 세연정(洗然亭)을 중앙에 내걸었고, 네 개의 현판을 더 내걸었는데, 그중에 서쪽의 현판에 동하각(同何閣)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같은 이름으로 시를 지었다.

"내 어찌 세상을 저 버리랴 /세상이 나를 저버렸네 / 이름은 중서 위에 있는 것이 아니거니 / 삶은 항시 녹야의 규범과 같았다네."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는 싯구로만 느껴지지만, 이면에는 한양 도성의 관료 생활에 관심과 미련이 아직 남았음이며, 더 깊은 곳에는 세상(혹은 임금)에게 ‘나 지금 잘 살고있어. 이만하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삶이 부럽지 않을 정도야. 이런 나를 몰라본 세상(임금)이 안타까울 뿐이야. 너희들 부럽지?’하는 오기심의 발동일 수도 있겠다.

하긴, 당장 나라도 임금에게 불림을 받아서 경회루에서 엎드려 기어 다니며 술 몇 잔을 얻어 마시느니, 차라리 여기 보길도 세연정에서 고산 선생에게 잘 보여서 빌붙어 (일 년 살이)를 택하고 싶다.

성리학이나 풍수지리에는 자신이 없지만, 기독교 코이노니나 공동체적 삶을 대동법과 연계해 보고, 이슬람 방식의 세계관과 천문에 관한 이야기들을 주희의 사상에 살짝 섞어보고, 삼국지와 초한지를 놓고 주담(酒談)을 이어가다 보면 한 일 년쯤은 무료 숙식 제공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 처지 또한 해남윤씨 못지않은 파평윤씨의 후손이고 보면 역시나 내가 머물 곳도 한양 도성보다는 보길도 부용정이지 싶다. 바둑은 고산 선생에게 져 드리고, 활쏘기는 쬐끔씩 이기면서 말이다. 사행 시든 오행 시든 운만 떼어주면 갖다 붙이는 것 자신 있는데, 필체에 자신은 없지만 추사 선생 글씨체를 보니 새삼 어떤 알다가도 모를 자신감이 생기는 것은 또 왜일까? 악필이 잘만 승화되면 추사체여!

거기다 주님(酒)을 모시는 대작이라면 웬만한 누구와도 겨루어 볼 자신까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

닻 들어라 닻 들어라 /

만경창파에 실컷 배 띄워 가자 /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인간 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 '가을' 가운데

 

선생이 이 시를 지은 장소가 바로 이곳 보길도 세연정(洗然亭)이다. 선생의 나이 64살로 1651년(효종2) 9월의 일이었다고 기록에 적었다.

시에서의 세연(洗然)이란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단정하여 마음이 상쾌해지는 곳'이란 뜻이다. 기념관에서 나와 후원을 지나니 커다란 숲이 나타나는데 발걸음을 옮겨 다가갈수록 절로 마음이 상쾌해지기 시작한다.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라고 할까? 아무렴 이름처럼 꼭 그런 느낌의 어느 성역에 막 들어서는 느낌이다.

선생의 후손인 윤위(尹威)가 <보길도지 (甫吉島識)>를 통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했을 정도로 보길도에 대한 선생의 첫인상이 그리도 강렬했다고 하니, 풍수지리에 어느 정도 경지를 이미 넓힌 고산 선생의 높은 안목에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다.

만약에 내가 남도 섬지역 여행길에 보길도에 우연히 들렸더라면, 그저 남도 섬 자락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정도의 풍광에 그대로 지나쳐 버렸을 것인데, 이곳의 지세에서 연꽃을 발견해 내시고, 더하여 세연정(洗然亭). 낙서재(樂書齋). 곡수당(曲水堂)에다 동천석실(同天石室)까지 지어 조성하신 후에, 지금에서야 와보고 경탄을 금치 못하는 까막눈의 처지이고 보니 가슴속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감탄이야 어떻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냐 만은, 이제야 찾아온 것이 못내 안타깝다.

‘이토록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어디서 또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세연정은 압권이었다.

보길도의 (윤선도 원림)을 이야기하다보면 가끔 ‘제주도 유배길에 풍랑을 만나 위험을 피하려고 잠시 상륙했다가 아예 정착해 버렸다’라는 이야기가 따라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이야기는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짬뽕되었기 때문이다.

고산 윤선도는 배를 타고 제주도를 향하기는 했지만 그게 유배는 결코 아니었다. 보길도와 윤선도의 18년이나 되는 유배 생활과는 손톱만큼도 연관이 없다. 풍랑을 만났고, 잠시 피하려고 보길도에 들렀다가 지형에 반해서 터를 닦고 살다가 원림의 낙서재에서 운명했다.

유배를 제주도로 떠난 사람은 고산의 정적이기도 했던 우암 송시열 선생이다. 해남을 떠나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던 중에 역시나 풍랑으로 보길도의 반대편에 잠시 상륙해 위험을 피했다가 마저 유배길을 떠났다. 제주도 유배 중에 새로운 죄가 추가되어 추궁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에 사약을 받고 중도에서 횡사하였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생각나는 대로 짜집기 되어 각자의 입맛대로 전해진 것이다.

아무리 그렇기로 물과 불의 관계같은 정적들이 시간차를 두고 풍랑을 만나 어쨌거나 한양 도성(정치판)에서 천 리나 떨어진 고립무원의 섬에서 재회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우연이건 필연이건 보길도를 들리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는 마냥 신기하기는 하다. 그때 진짜로 마주쳤으면........ 계급장 떼었겠다. 주먹다짐 했으려나? 아님 양반 똥폼잡고 소리만 고래고래 질렀으려나? 하인들 대리 전쟁으로 씨름 한판?

이제 발걸음을 옮겨서 세연정에 들려서 고산 선생에게 ‘우암 송시열 선생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여쭤 보아야 겠다.

그리고 나서 보길도 마지막 여정으로 송시열 글씨 바위에 들려서 우암 선생에게 직접 ‘고산 윤선도 선생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또 슬그머니 여쭤 보아야겠다.

그러고 나서 토말로 돌아가는 배편에 앉아서 제대로 평가를 해 보아야겠다.

어느 분이 더 올곳은 선비(書生)였는지를 말이다.

 

 

 

 

 

 

 

--이쯤에서 지면상 일단 이번 이야기를 끝내고, <세연정>으로 다시 이어 가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