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의 위대한 힘과 지성, 그리고 예술을 보라. 오직 프랑스만이 세계의 모든 걸작 예술품을 보호할 수 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이제 모든 나라 사람들은 프랑스에 와서 예술품을 빌려보아야 한다.”
- 1796년 프랑스의 저명한 문화 예술인 39명이 모여서 (나폴레옹의 미술품 약탈)을 지지하면서 발표한 성명문 중에서 일부.
이 무지막지한 선언은 오만함인가, 아니면 무오류성 자기 합리화인가? 다만 그런 망발의 저변에 깔린 현실 문제의 핵심은 그런 막말을 쉽게 내뱉어도 될만한 힘(?)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슬픈 사실이다.
요즘 세계인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그런 해괴망측한 막무가내식 내지르기를 장난처럼 일삼는 트럼프의 만행에 상당히 익숙해지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런 패악의 수괴가 툭하면 인권이나 평화를 수호한다고 떠들어댄다. 그런 인간말종 쓰레기에게 미국 대통령이라는 배경과 힘(?)이 없었다면 그는 진즉에 정신병동에 수감되고 말았을 것이다. 딴에 로마의 시저 흉내를 내기에 혈안이다마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 보인다.
그런 시선으로 보자면, 엇비슷한 부류의 나폴레옹을 떠받들며 성명문을 발표한 39명의 프랑스 저명 문화 예술인이나, 지금 백악관에 근무하고 있는 서열 순위에 따른 39명까지의 예스맨과 예스우먼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인류 역사에 불필요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라는 공통점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견줄 만큼 프랑스의 선조들이 뛰어난 학문적 소양과 예술과 문화에 걸쳐 훌륭한 유산을 남겼고 그것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면 성명문의 내용을 굳이 반박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알프스산맥 너머의 숲과 늪지에 사는 갈리아인들은 그야말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야만인들이었다. 짐승의 가죽을 걸치고 사냥을 하면서 떠돌아다니며 생존에 급급해하는 원시 부족사회였을 뿐이다. 도시 건설과 같은 정착 문화도 부족했고 문화나 문명이라곤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로마가 세계 도처에 거대 도시를 건설하고 원형극장과 목욕탕과 수도 개설과 다리를 놓고 판테온 같은 신전을 지었을 때, 갈리아인들은 숲속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허기와 추위를 모면하기 위해 몰려떠돌아 다니면서 사냥과 부족간의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갈리안인들이 차차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을 때, 그들에겐 내재된 학문도 지식도 기술도 전혀 없었다. 다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의 본능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일부의 선각자들이 등장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카르타고와 로마제국의 역사 기록을 읽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있었다. 비록 학문도 지식도 기술도 갖지 못했지만, 더하여 조상들로부터 눈부신 문화재와 문명을 물려받지도 못했지만, 그것들이 응축된 시간과 역사와 문화유산의 부재를 단숨에 뛰어넘어 극복하는 신묘한 방법을 놀랍게도 찾아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침략과 약탈이었다. 쳐들어가서 빼앗아 차지하면 된다는 시공을 초월하는 혁신적인 놀라운 발상의 전환을 이룩해낸 것이었다. 음식과 잠자리를 위해 숲속을 떠돌던 단순한 약탈 방식에서 벗어나, 전 부족을 이끌고 번창하고 있는 문명의 도시국가를 쳐들어가 점령하고 차지하여 단숨에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문명생활에 적응하면 된다는 놀라운 신사고가 등장한 것이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문화 문명국은 고대 그리스였다.
로마는 고대 그리스를 모방하고 경쟁하면서 초강대국이 되었다. 스스로 초강대국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로마는 불시에 그리스를 쳐들어가 멸망시켜 버렸다. 고대 그리스의 모든 문화재와 문명을 약탈해 로마로 가져와 자신들만의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는 초석으로 삼았다. 찬란한 로마제국의 역사 저변에는 상당 부분이 고스란히 약탈해 온 고대 그리스 문화와 유산이 그대로 토대가 되었다.
바로 거기에서 영향을 받은 그런 야만의 갈리아인들이 점차 문명권에 들어서서 정착을 하고 세력을 넓히면서 프랑스와 독일과 여러 주변 국가로 분리 독립하고 성장하게 되었는데, 여전히 사방에 로마제국이 흩뿌려놓은 문화재 외에는 달리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뿌리가 같은 그들은 서로 비슷한 깨달음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힘(군사력)을 가져야 하고, 전쟁과 약탈을 통한 발전과 번영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며, 더하여 문화와 예술을 가진 국가만이 오래 존속할 수 있다는 고른 관념을 고르게 체득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세 시대 부터의 유럽 역사인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유럽의 맹주 자리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처절하도록 오랜 역사 동안 싸움을 벌여 영원한 라이벌이 되었다. 아울러 비슷한 힘을 가진 처지에 국경까지 맞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이 영원한 앙숙이 되는 것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태생적 숙명이라고 해야겠다.
그나라들이 저마다 각자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하소연이나 정당성이야 어디 끝이 있겠는가? 상황에 따라 죄다 피해자일 테고, 따지고 보면 죄다 가해자들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그런 뻔한 과거사는 이제부터 과감하게 몽땅(?) 생략하기로 하고.........
어쨌거나 놀라운 신의 축복이 있으셨는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이라는 특출난 인물이 등장했다. 가히 인류 역사를 통털어서도 최고의 깡패라 부를만한 위대한 권력자이자 싸움꾼이었다. 그런 나폴레옹을 앞세운 프랑스는 더 이상 꺼릴 것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디서든 내 마음대로였다. 그들은 이어져 내려온 역사의 교훈에 따라 본능에 충실하고자 했다. 요즘의 누구처럼 무조건 <온리 프랑스 퍼스트> 였다. 세계 모든 권력의 중심이 프랑스 파리라면, 당연히 세계 모든 문화와 예술의 중심 또한 파리여야만 했다. 하여 그렇게 만들라고 나폴레옹은 드농 남작(Dominique Vivant Denon baron)을 선발하여 나폴레옹 박물관장(현 루브르 미술관)에 임명했다.
나폴레옹이 독일을 침공했고 마침내 항복을 받아냈다. 그 항복 문서의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에 이미 독일의 전부가 프랑스 소유로 이관 되었으며, 프랑스의 실 소유주가 나폴레옹인만큼 독일 전부가 곧 나폴레옹의 소유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일단 다 파리로 가져다 쌓아놔. 나중에 차차 드농과 이야기를 통해 판단하자고. 일단 무조건 몰수해서 가져다 놔.’라고 명령했다. 그 다음 벌어진 일이야 뻔하지 않았겠는가?
이번엔 이탈리아를 점령했다. 항복 문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로마 점령부대에게는 드농 남작이 작성한 몰수품 목록이 전달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당연하게 이탈리아 전역을 샅샅이 뒤져 싹쓸이해서 파리로 옮겼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예외는 있었다.
나폴레옹이 친히 서명한 압수 목록에는 버젓이 <판테온>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몰수 부대는 그냥 기겁을 하고 말았다. 헐!!!!
‘<판테온>와 <콘스탄티누수 개선문>을 징발하라고요? 어떻게요? 이 어마무시한 것을 분해해서 파리로 옮겨 다시 조립하라고요? 이건 분해를 못해요? 절대 불가능해요. 이 경우엔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다는 단순한 명제가 적용되지 않아요. 처음 이걸 만든 장인들을 데려 온다해도 이것들을 분해서 옮겨다 다시 조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차라리 세세한 분할 도면을 꼼꼼하게 그려서 복제하듯이 파리에다 새로 만들면 모를까, 이걸 분해 해서 옮겨다 다시 조립하라고요?.’
‘총통께서 갖고 가고 싶다고 하시잖아. 어떻게든 해봐? 죽기 싫으면 무조건 해내야돼.’
‘차라리 죽을래요. 이걸 대충 때려 부시는 것도 힘들텐데, 옮기라고요? 번쩍 들어서 옮길 사람을 찾아보세요. 나폴레옹 황제에겐 불가능이 없을지 몰라도, 건축 토목 기술자들에게 이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예요. 차라리 죽으라 하세요.'
‘정말 불가능한 일이냐?’
‘실제로 <판테온>을 가보셨지요? 허공에 지덜끼리 끌어안고 매달려 있는 거예요. 한쪽 팔을 풀면 한순간에 안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니까요? 총통께서 직접 내부 중간에서 버팀목으로 받쳐서 서너 시간만 붙잡고 버텨주신다면 저희가 블가능에 도전해서라도 어떻게 끌어내려 보겠는데.........’
‘ 헛소리하다가 당장 여기서 죽을래?’
‘그러니까 차라리 새로 만드시라고 보고해 주세요. 그렇게 갖고 싶으시다면 파리에 비슷하게 새로 만들어 드릴 수는 있다니까요? 그게 훨씬 싸게 먹힌다니까요? 괜히 여러사람 잡지 마시고요.'
어쨌든, 그런 결과로 해서 지금 <판테온> 대신에 <팡테온>을 파리에 만들어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무덤으로 사용하고 있고,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대신하여 <에투알 개선문>이 파리 중심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로마의 본래 판테온과 개선문은 겨우 살아남게 되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결국 나폴레옹은 패망했고 사망했다. 그런만큼 프랑스의 영화도 끝이나고 말았다. 이 세상에 절대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결과였다.
호랑이가 죽자 온 숲에서 늑대들이 떼로 몰려나와 호랑이 살점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피와 살점이튀는난도질이었다.
나폴레옹이 빼앗은 영토들은 되돌려 졌지만, 드농을 앞세워 빼앗아 들인 문화재만은 어떻게든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 프랑스가 나서서 강렬하게 저항했다. 다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되돌려 주는 것이지만, 유독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프랑스인들 자부심 속에는 ‘일단 내 손에 들어온 문화재는 무조건 내 거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자부심이 진짜로 상당하다. 그들은 그런것들을 프랑스인 특유의 문화적 자부심이자 자긍심으로 여기며 정당화 시킨다. 프랑스는 악착같이 버텼다. 액자를 부수고 나서 미술품의 상태가 안 좋아 내줄 수 없다느니, 복원이 시급한데 당장 지구상에서 이런 복원 작업을 할 곳은 루브르밖에 없다느니, 원래 소유장소였던 어떤 박물관이 전쟁통에 박살이 났으니까 재건부터 하고나면 언제고 그때 안전하게 보내 주겠다는 등등, 하여간 그 질질 끄는 습성은 효과를 내서 2026년 현재까지도 다 해결되지 못한 미술품이 루브르와 프랑스엔 상당히 존재한다. 그들은 그것마저도 '프랑스라는 예술 문화에 환장한 독특한 그들만의 자부심'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실정이다.
‘첩(妾)은 다른 첩(妾)의 꼴을 절대 그냥 두고만 보지 못한다.’ 앞서 말했던 기억이 있다.
꼭 그랬다.
나폴레옹이 떠나고 난 한참 후에 이번엔 반대 진영인 독일에서 나폴레옹에 못지않은 불세출의 역사적 깡패 히틀러(Adolf Hitler)가 등장했다. 첩과 새끼 첩의 처지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나 할까?
프랑스도 독일도 장차 상대가 어떻게 나올 것을 미리 알았고, 반대로 이번엔 무엇을 얼마나 어떤 방법으로 내주거나 빼앗기게 생겼다는 사실 또한 저들은 미리 알았다.
이게 어디 하루 이틀간에 벌어진 은원관계였던가 말이다. 이들 사이엔 '역사적' 이라는 거룩한 타이틀 매치가 항상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절치부심(切齒腐心)과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고사성어는 바로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용어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럼 오랫동안 새끼 첩(妾)의 처지에 몰려 온갖 수모와 치욕을 당했던 독일이 히틀러의 등장으로 정식 첩(妾)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 새끼 첩(妾)의 자리로 내몰린 프랑스를 향해 어떤 앙갚음을 해줄까 하고 어찌 고심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저지른 일을 잘 알고 있다. 하여 금년 너의 여름은 내가 겪었던 지난 여름보다 훨씬 가혹하리라.’

지나간 역사에 가정을 덧입혀 보는 일은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헛발질이다. 이미 떠나가 버린 시간의 기록들은 절대로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걸 되돌릴 재주가 있으면 미쳤다고 지상에서 인간으로 힘들게 살겠어? 그건 오로지 창조주나 조물주의 영역일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미래를 슬쩍 넘겨다 보는 신통한 능력보다도,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지우개로 슬쩍 지워버리고 새로 새겨넣는 재주가 더 고단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본다.
그런데 말이다. 확실한 것은 이거나 저거나 모두 말짱 도루묵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잘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아무리 나대고 그래 보았자 죄다 개뿔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쓸데없는 짓꺼리라 할지라도....... 과거의 시간과 사건들에 ‘만약에’나 ‘혹시나’하는 가정을 덧입히는 일만큼 재미있는 심심풀이도 극히 드물다.
가깝게..... 만약에 이순신 장군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서 위대한 승리를 맞이했다면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선조 임금의 꼬라지는?
만약에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즉위했다면, 열린 가치관과 앞선 선진문물의 경험을 통해 전제 왕권의 한계를 뛰어넘어 일찍 세계 속의 조선으로 발전시키지 않았을까?
만약에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진정 한반도의 완전한 자주국방을 달성했을 수 있었을까?
하나하나의 가정에 각자의 다양한 생각이나 의견이야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겠지만, 아서라. 다 쓰잘데없는 짓꺼리 일 뿐이다. 흘러간 시간이 되돌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말로 만고불변의 진리이니까 말이다.
그런 불변의 진리를 잘 깨닫고 있으면서도........ 지금 써 내려가고 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에는 약탈 문화재에 대한 한 많은 사연이 수도 없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때문에 이렇게......... 혹시나 하는 한 가지 가정을 덧씌워 보고 싶어졌다.
‘만약에........ 아돌프 히틀러가 비인의 미술학교에 입학을 했더라면 제 2차 세계대전은 벌어지지 않았을 걱이고, 현대사는 달라졌을까?’
제 2차 세계대전에 패해 전범국이자 패전국으로 전락한 독일은 전쟁의 책임과 배상문제로 완전하게 쫄딱 망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국토의 일부를 승전국들이 쪼개서 빼앗아 갔으며, 배상금 지급이 체불되자 문화재는 물론 공장 시설과 심지어 철도까지 뜯어가는 발악 직전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독일인 대부분이 기아에 허덕이며 썩은 감자로 끼니를 해결했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 학교와 병원과 관공서의 담장을 뜯어서 땔감을 충당할 지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가히 신의 저주라 할 만큼 독일 민족에겐 가혹한 시련의 시기였다.
히틀러는 린츠 근교의 시골마을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났다. 하여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린츠를 평생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아꼈다. 그렇게 과거 독일의 영토였던 린츠는 현재 오스트리아의 짤츠브르크와 수도 비인 사이에 놓인 대도시다.
그런 히틀러가 유년시절부터 남다르게 그림에 소질을 보인 것이다. 주변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히틀러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명성을 얻고 있는 오스트리아 비인 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첫 입학시험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그림밖에 그릴 줄 모르던 히틀러는 고향으로 돌아가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하여 고학으로 빈에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초일류 강대국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는 수도 비인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호화롭고 풍요롭고 향락적인 부자와 귀족들에겐 천국이었다. 소수의 부자와 귀족들의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위해 절대다수의 평민들이 마치 중세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과도한 노역과 세금에 치여가며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던 시기였다. 유럽의 이름난 대도시들이 하나같이 향락문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 그런 만큼 그렇게 향락문화가 판치는 도시의 이면에서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하층민들의 처절한 삶과 분노와 원한이 활화산같은 폭동의 조짐과 도화선으로 변해 점점 길게 뻗어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될 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머지않아 재앙같은 폭동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은 재배계급인 부자와 귀족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이고 오지 않기를 바랄뿐이었다.
그런 힘의 원천인 돈과 권력에 의한 불합리한 횡포와 유린된 인간의 존엄과 개나 돼지처럼 취급받는 하층민들의 애환과 피밎힌 절규를, 당시 세계 최고의 힘과 권력과 향락문화의 중심지인 빈에서 히틀러는 뼈에 사무치도록 생생하게 체험을 했던 것이다. 패전국으로 전락해 감자로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 나가기에도 바쁜 고향의 가족들 처지를 떠올리면서 가슴속에 맺혀지는 분노와 한을 속으로 쌓고 또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의 존재를 새삼 다시 깨달았다. 부자와 귀족들이 점점 향락에 빠져들게끔 조정하면서 막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막대한 부를 몰래 챙기는 유대인들의 상술을 샅샅이 지켜보았던 것이다.
일 년이 지났다.
다시 입시 시즌이 돌아왔고 미술학교 입시에 재도전을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이번에도 낙방이었다.
이름난 쪽집게 일타 강사의 수업을 들은것도 아니고, 세상에 명망을 날리고 있는 유명 예술가의 추천장을 가지지도 못한, 배고픈 시골 촌뜨기 지원자를 심사위원들이 선뜻 받아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미술 실력 이전에 심사위원에게 내보일 부와 명예의 징표가 어느 정도 필요했지만, 히틀러는 가진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때문에 히틀러가 받은 좌절과 상처는 무척이나 컸다. 그것이 세상과 부자와 귀족과 유대인에 대한 어떤 확고부동의 어떤 신념으로 바로 이 시기에 장착되고 말았다.
피폐하고 굶주리고 어떤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고향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소위 사회 불만 세력이라 치부되는 부랑자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들과 아울리는 과정에서 히틀러의 뛰어난 언변과 임기응변식 번뜩이는 재능이 서서히 발견되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굶주림을 맡아서 해결하기 위해 군대에 자원해서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기도 하고, 천우신조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면서, 지옥같은 전쟁의 참상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대 후에는 사회 불만 세력들을 끌어모으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서서히 정치계로 방향을 틀어 나치 당을 만들고, 끝내는 독일 제국의 총통 지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때 히틀러가 비인 미술학교에 입학을 했더라면......... 거기에서 클림튼이나 에곤 쉴레 같은 미술가들과 선후배로 교류하고, 화가로서 성공하여 많은 그림이 팔려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면.......... 제 2차 세게대전은 발생하지 않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자못 그것이 궁굼해진다.
하지만 그것 역시 히틀러의 숙명 아니었을까?
두 번의 미술학교 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고향으로 낙향하기 이전까지 히틀러는 빈 거리에서 길거리 화가 생활을 했었다. 일부 그림이 실제 팔리기도 했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당시 히틀러가 그린 작품을 가만히 살펴보면........ 나름 그림을 잘 그리는 초보 화가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고향사람들과 친척들 눈에는 상당한 그림 실력을 가진 히틀러라고 보았을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시선이나 기준에서 보자면(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판단) 정식 화가라고 인정하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해 보이는 아마추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파리나 로마처럼 유명 관광지마다 거리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 판매하는 전문 화가들을 아주 자주 만나게 된다. 다양한 유파의 그림들을 그려서 판매하고 있다. 하나같이 다들 아주 뛰어난 미술 솜씨를 뽐내고 있다. 그저 유명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자신의 작품을 걸어놓지 못한 차이가 하나의 벼처럼 존재하고 있을 뿐이 아닐까 하고 늘 생각해왔다.
그런 기준과 관점에서 보자면..... 히틀러의 그림 솜씨는 유럽의 거리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화가들의 평균적 수준 정도였거나, 아님 그들보다 조금 못한 수준이었지 싶다. 전문 화가로 나서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하고, 단순하게 아마추어의 수준은 조금 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이제 청치가로 성공한 독일 총통 히틀러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비인 체류 시기에서 부터 생겨난 여러가지 고정관념과 한이 앙금처럼 맺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한풀이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새로운 판이 서서히 도래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아리안족 화가로서의 위대한 자질을 너희들이 잔인하게 짓밟아버렸다 이말이지? 두고 봐라. 이 히틀러의 복수가 어떤것인지 보여주마.'


완전하게 폭망한 독일 제국에서도 비주류의 삐딱한 아웃사이더였던 괴팍한 청년이 혼란한 난세를 틈타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더니, 선동을 넘어 해괴한 주장으로 마침내 독일 민족의 영혼마저 나꿔채고 말았다. 역사와 전통과 지성의 넘쳐나는 보편타당한 정상적인 독일의 역사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패전국에 대한 유럽 승전국들의 지나치고 가혹한 배상 요구와 가혹한 수탈은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이고 비전통적인 히틀러의 허무맹랑해 보이는 주장일망정 일단 매달려 볼 수밖에 없게되었다. 기이한 시대가 괴팍한 사내에게 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책임질 엄청난 운명을 맡겨버린 것이다.
히틀러는 프로이센 왕국이 번영을 누리던 과거로의 회귀를 기치로 내걸었다. 유럽 강대국들의 무자비한 수탈과 침략을 막아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로지 자신과 나치당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 민족의 단합을 요구했다.
이런 히틀러의 야망과 목표를 위해서 당장 가장 시급한 것은 힘(?)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는 없는 살림을 쥐어 짜내서 군비증강과 군사력을 확장해 갔다. 국가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국방비 만은 가능한 최대한 과감하게 투자했다. 군인들의 복지와 급여가 최고 대우로 우선 책정되었다. 당연하게 너도나도 앞장서 군대에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그제서야 군비증강을 통한 독일의 재무장을 염려하는 유럽의 눈초리들이 모여 제재책을 강구하게 되자, 히틀러는 이에대한 선제공격으로 독일을 패전국으로 명시한 베르사이유 조약의 파기를 선언했고, 남은 전쟁 배상금 지급을 거절하였으며 패전국으로 빼앗긴 영토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켜 놓으라고 오히려 전 유럽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날렸다.
부랴부랴 승전국들이 모여 대표단을 꾸려 독일로 협상을 내보냈는데....... 히틀러는 협상 테이블에 나서기보다 방문단을 이끌고 군수공장과 군사 시설과 군대의 훈련을 순시하도록 만들었다. 협상단은 그만 까무러쳐 기절초풍 상태에 도달하고 말았다. 지금 그들이 눈 앞에서 목격하고 있는 독일의 현실은, 당장 히틀러가 가진 군사력이 지난 전쟁 이전의 독일이 가졌던 군사력을 뛰어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전 유럽은 허겁지겁 서둘러 장차 벌어질지 모르는 독일의 군비증강에 대응하는 방책을 고심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그동안 우리가 독일에게 너무 심하게 대했었나?’하는 반성은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 이합집산으로 (상호방위조약)이나 (군사협정과 동맹)을 맺어 독일에 맞서야만 하겠으나, 자칫 그런 서툰 행동들이 오히려 독일의 비위를 건드리는 꼴이 될지 몰라 , 후환이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혼란만 부추기고들 있었다.
이제 독일은 언제고 기어코 들이닥칠 역사상 유래가 없었을 만큼, 충분히 예측 가능한 가장 무서운 역대급 재앙으로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온 유럽이, 아니 전 세계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그런 폭풍전야의 어느 시점에서 독일제국의 총통 히틀러의 사저로 은밀하게 초대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제 3제국 박물관장(베를린 국립 미술관장과 독일 민족 박물관장 겸직) 오토 큄멜(Otto Kümmel, 1874-1952)이었다. 오토는 저명한 미술사학자로 고고학 분야에서 발굴 현장을 쫓아다니고 강단에서 평생 강의를 해온 학자 출신이다. 1933년부터 박물관장직을 맡았었는데 이제 어느덧 환갑에 이르게 되자 여러 가지 이유로 이미 사표를 제출한 상태였다.
‘오토 관장의 사표를 나는 결코 이대로 수리할 수가 없어요. 나는 독일을 위한 문화예술 분야에 관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어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을 살펴보아 왔는데, 그 결과로 오토 관장이야말로 최고 적임자라고 판단하고 있었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사표 제출이라니요? 절대 불가합니다. 하여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당장부터 내가 그동안 꾸준히 기획해 온 (독일 민족의 위대한 꿈)을 현실 속에 펼쳐볼까 합니다. 그 일을 오토 관장이 맡아주세요.’
‘저는 강의나 하고 발굴 현장이나 쫓아다니던 학자일 뿐입니다. 박물관장 자리도 어쩔 수 없이 맡았던 지극히 평범한 보통 학자일 뿐입니다.’
‘그래도 오토 관장이나 나에겐 같은 아리아인(Aryan)의 숭고한 피가 똑같이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아리아인(Aryan)을 찾으시니 저는 도무지.........’
‘인류가 탄생해서 원시인으로 살다가 진정한 문명인으로 살기 시작한 모든 근원은 우리 아리안으로부터가 아니겠습니까? 그 기원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우월적 인종의 정통성이 정착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학문적 근거와 자료를 통해 완성해 주셨으면 합니다. 히말라야 인근의 티벳이나 부탄에서부터 시작해 유럽과 아프리카의 모든 곳까지 모두 마음대로 찾아다니시며 유물과 유적을 탐사해주시고 고문서를 찾아내 아리안의 발자취와 업적을 통합 정리해, 우리 아리안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늘로 부터 선택받은 우월한 혈통임을 입증해 주세요. 유대인들의 그릇된 허구성을 철저하게 깨부숴 주세요. 그에 따른 모든 전권을 오토 관장에게 드리겠습니다.’
‘아리안 중심의 역사와 예술과 문화의 정통성을 찾아내 체계를 갖추라는 말씀입니까?’
‘장차 독일은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이상으로 전 유럽을 뛰어넘어 범세계를 아우르는 초일류 강대국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먼 과거의 로마제국을 재현할 생각입니다. 그러자면 반듯이 거기에 상응하는 일류 전통과 문화가 있어야만 가능해집니다. 아리안의 정통성을 확보해서 그것을 세상에 당당하게 널리 알려서, 왜 아리안이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려야만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세계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 정통성을 찾아내 완성시키는 일을 오토 관장이 맡아주셔야만 하겠습니다. 그런 후에 완성된 정통성을 세상에 퍼트리고 받아드리게 만들어 줄 사람을 더 찾아야 하겠지요.’
‘당연히 그 사람도 아리안이어야 하겠지요?’
‘어디까지나 이 일은 우수한 아리안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추천해 주실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총통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인지 고심을 좀 더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말씀하시는 일을 맡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아리안의 정통성에 부합하는 자료들을 모으는 일을 먼저 해주세요. 동시에 남들에게 빼앗긴 아리안 문화재와 미술품 목록을 만들어 주세요. 16세기 이후로 프로이센이 격랑에 휘말리게 되면서부터 아리안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적들이 속속들이 빼앗아가더니 전 세계에 흩어지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되찾아 올 생각입니다. 그 목록을 만들어 주세요. 오토 관장의 목록이 완성되는 대로 즉시 프랑스와 인근 국가들에 빼앗아간 독일의 미술품과 문화재를 되돌려 달라는 고소장을 보낼 것입니다. 그것이 곧 정식 선전포고가 되겠지요.’
‘언제까지 목록을 작성하면 되겠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하지만 워낙 방대한 작업이라 딱히 시간을 정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꾸준히 지속되는 것이 더욱 중요할 테니까요. 시기와 방법을 적절하게 구분해서 지니행하는 방안도 강구 해 봐 주세요.’
‘일주일 뒤에 다시 찾아뵐 수 있을까요?’
‘오토 박사에 대해서는 사전 약속이 없어도 언제든 저와 직접 대면할 수 있도록 이미 조치해 두었습니다. 언제든 좋습니다.’
‘여러 분야의 작업을 시작하겠지만, 가장 먼저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는 독일 미술품과 문화재에 대한 목록을 우선 작성해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총통의 국정 수행 계획 시간표와 절차에 따른 보다 시급한 사항이 있으시면 그때 그때 알려주시면 적극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토 박사께서 맡아 주실줄 알았습니다. 어떤것이든 필요한게 있으시면 서류를 만들어 보내 주십시오. 곧 지원 담당 책임자를 골라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연구실과 모든 필요한 시설을 우선적으로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당장은 제 사무실이면 충분하겠습니다. 다만 필요한 인력을 제가 골라서 충원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고 그들의 뒷바라지를 부탁 드리겠습니다.’
‘전권을 이미 드렸습니다. 바라시는 모든 것이 그대로 이행될 것입니다. 자주 찾아오시고 보고서나 자주 올려보내 주십시오.’
정확히 일주일 뒤, 오토 큄멜은 젊은 사내를 한 명 동반하고 다시 히틀러의 사저를 찾았다.
그리고 얇은 보고서 임시 초본 하나를 히틀러에게 건넸다. 표지엔 <큄멜 보고서>라고 적혀 있었다. 보고서의 내용은 프랑스가 어떤 경우로든 반출해서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과 문화재에 대한 목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담겨 있었다.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결코 흔치않은 재능을 가진 젊은이입니다. 총통께서 말씀하시는 그 이상과 목표의 실현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되어 감히 추천드립니다. 곁에 두시고 살펴보아 주십시오.’
용무를 마친 큄멜은 서둘러 사저를 나갔다.
담배를 피워물고 소파 깊숙이 파뭍혀서 히틀러는 큄멜이 툭 하고 흘리다시피 하고 떠난 상황에서 소아마비로 다리까지 절고 있는 조금은 까탈스러워 보이는 깡마른 젊은 남자를 하염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멋쩍은 듯 괴벨스도 큄멜이 사라진 출입문만 멀뚱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들의 어색한 첫 만남의 순간은 그랬다.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그가 바로 독일 나치 정권의 핵심 정치인이 되고, 훗날 전쟁범죄자가 되리라고는 큄멜의 손이 이끌러 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까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범죄자 기록부에는 선명하게 그의 이름과 이력이 낱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비록 장애를 가졌으나, 천부적인 인문학 엘리트로서의 장점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탁월한 재능인 주도면밀한 대중연설 능력을 앞세워 모든 독일 국민에게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설파하였으며,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홀로코스트 등 나치 정권의 극단적인 여러 악행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가 사용한 대중을 향한 선전과 선동 방식은 이후로 지금 이 순간까지 정치와 언론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세상에 펼쳐지는 모든 선거판의 기본 공식과 개념을 창조한 사람이 바로 괴벨스다. 이날 이후로 히틀러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여 베를린 관구장이 되고 나치 정권의 국회의원이 된다. 중앙 선전 국장을 거쳐 마침내 나치 정권의 핵심인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에 올랐다가 패전과 더불어 전쟁범죄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생각을 말 그대로 좋게 표현하자면 (불합리하게 수탈된 독일 미술품과 문화재 환수 프로젝트)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과연 국가와 국가 차원의 문화재 (수탈)과 (환수)의 기준선이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될 수가 있는 것일까?
(수탈)의 사연과 내용도 가지가지일뿐더러, (환수)란 명목 뒤엔 아주 흔하게 조작이나 사기가 너무나 자주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되는 에술품이 (진품)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되기도 한다.
거기다가 (수탈)이나 (환수)라는 행위가 벌어지려면 의당 (본래 소유자의 정당성)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부터 이미 애매모호한 경우가 태반이니까 말이다. 소유자의 명백한 정당성이 입증되고 나서야 (수탈)이니 (환수)니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 정상인데, 애초부터 소유자의 (정당한 소유권)을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사실은 적지않게 태반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내친 김에 짧게 한 가지 사례를 짚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도저히 가격을 책정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비쌀 것이라는 소문으로 가득한 그림.’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다가서서 감상하기에 힘든 그림.’
바로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의 작품 모나리자(Mona Lisa)다. 일부 지역에선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 굳이 다르게 부르기도 한다.
<모나리자>는 포플러나무 패널에 그려진 크기가 53cm x 77cm 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유화 작품이다. 다른 비교를 해보자면 우리가 아주 흔하게 쓰고 있는 A4 용지 여섯 장을 합쳐놓은 정도의 크기밖에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A4 용지 여섯 장을 최대한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채우고도 한참 모자를 만큼 숱한 소문과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전설 같은 미술 작품이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지 싶다.
거기에다 <모나리자>가 가진 또 하나의 기록을 굳이 추가해 본다면, 우리 마눌님인 태리할망구께서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감상을 마치고 그냥 패스해 버린 그림이 바로 <모나리자>였다는 사실을 보탤 수 있겠다.
입장하면서 그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기력을 어느 정도 탕진하면서 겨우 루브르에 입장할 수 있었는데, 뭔놈의 볼 게 그렇게나 많은지, 방 하나하나를 지나가기가 너무나 힘들지 않은가? ‘루브르 한 달 살기’를 할 작정이 아니면 다신 갈 생각을 말아야겠다. 어쨌거나 어그적 어그적 기웃기웃하면서 속칭 ‘모나리자의 방’이라는 장소까지 겨우 도달하기는 했는데, 꾸불꾸불 길게 늘어선 줄이 장난이 아니다. 접근허용 3M 앞에 목재 가로막이 설치되어 있고, 정복 차림의 경비들이 지키고 서서 혹 그림자라도 넘어오지 못하게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그거다가 3M 앞에 놓인 액자 속의 <모나리자> 앞에는 거의 벽을 통째로 가로막은 방탄유리가 설치되어 있다. 박물관 실내를 대낮같이 밝혀주고 있는 불빛들이 그 방탄유리에 반사가 된다. 그런 상황에서 정작 3M 앞에 걸려있는 그림의 크기는 53cm x 77cm 밖에 안된다. 은근한 미소? 눈썹이 없는 미완성? 싸그리 개뿔이다. 어디 보여야 말이지? 너희들은 다 마음의 눈으로 감상하고 있는거니?
그럼에도 이 방은 항상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그야말로 난리 부르스를 춘다. 세계에서 최고로 비싼 입장료를 내고 루브르까지 왔다는 증거를 인증샷으로 남겨야 한다고 애초부터 작정을 하고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냥 한 컷만 찍고 물러나 주면 좋겠는데 결코 아니다. 그런 기대는 아예 접어 두는 게 건강에 이롭다. 폄하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거기다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앞줄에 몰려있다고 치면........ <모나리자>를 포기하거나, 차라리 다른 날을 잡아 루브르에 다시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마침내 우리가 ‘모나리자의 방’에 도착했을 때도 여지없이 길은 아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하. 저게 <모나리자>야? 저사람들은 지금 미술관람을 온거야? 아니면 뷰포인트에 사진 찍으러 온거야? 모나리자는 집에서 컴퓨터로 보는 게 훨씬 좋겠다. 그냥 패쓰!!!’하고는 그대로 지나쳐 반대편의 <가나의 혼인잔치>로 서슴지 않고 그대로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모나리자> 옆에 머문 시간이 얼추 한 2초쯤 되었을까? ‘<모나리자>를 팽해버린 가장 짧은 시간 여행자’로 기네스 북에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기억이....... 그런 추억이 루브르를 찾았던 우리의 여행 이력에도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는 여기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본래의 궤도로 돌아가고자 한다.
‘실질적인 <모나리자>의 소유권자는 누가되는 것이 합당할까?’
지금 당장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으니 당연히 프랑스의 소유라는게 과연 맞는 것일까?
현실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대로라면 그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대한 분쟁과 다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모나리자>에 대한 소유권 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다만 프랑스라는 막강한 문화와 경제분야의 초강대국이 우격다짐이거나 막무가내식으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기에 다른 누구도 감히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 냉정한 현실분석이라 하겠다.
혹자들은 말한다. <모나리자>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유는, 프랑스라는 국가가 경제적으로 완전 파산하여 <모나리자>라도 내다 팔아서 회복의 발판을 마련해야 하는 지경이 아니라면 절대로 <모나리자>만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미술 시장에 나올 확률이 완전 제로기에 억지로 금전적 평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가끔 프랑스 경제 파탄 파업 데모 현장에선 <모나리자>를 내다 팔고 서민층 구제에 정부가 나서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한다. 프랑스는 내다 팔 생각이 없지만, 어딘가는 구매할 의사를 가진 존재가 엄연히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소유권에 대한 입장도 비슷하다. 프랑스라는 국가가 멸망해 지도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프랑스가 <모나리자>을 포기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강경한 기조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프랑스를 쳐들어가 완전 정복하고 빼앗지 않는다면 <모나리자>가 남의 손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히틀러는 정말로 압수목록 최상위에 <모나리자>를 써넣었었다. 꼭 빼앗아 가고 싶은 미술품이었다. 하지만 끝내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 누군가가 그런 속셈을 미리 알고 귀중한 미술품들을 사전에 빼돌렸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그 귀중한 미술품을 빼돌렸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모나리자>는 누가 소유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미술품일까?
원칙대로라면 이탈리아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콘도(Giocondo) 가문의 상속자가 소장하는 것이 지극히 타당하고도 합법적인 경우라 하겠다. 그랬다면 프랑스 파리까지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가도 감상을 할 수 없게 되겠지만, 이탈리아 정부나 피렌체시와의 지루한 소유권 분쟁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런 끊이지 않는 소유권 분쟁의 책임은 누구에에 있는가?
그건 <모나리자>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무책임한 계약 위반에서 모두 생겨난 일이다. 다빈치가 자초해 벌어졌고, 수습하지 않고 그냥 먼 타지에서 죽음으로써 생긴 일이다. 거기에 보태서 뻔뻔한 프랑스의 억지와 막무가내식 오만이 빚어낸 촌극(해프닝)이라 할 수 있는데, 일류 강대국인 프랑스가 그 해프닝을 조작을 통해 진실로 왜곡시키면서 분쟁으로 확산되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거나, <모나리자>는 세계 최고의 명품 반열에 올랐고, 그로 인하여 꾸준히 쏟아져 들어오는 외화수입이 짭짭한데, 해프닝을 해프닝으로 수습을하거나 순순히 <모나리자>를 내어놓을 이유가 만무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와 루브르 박물관은 <모나리자>를 자신들이 소유하고 전시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아직도 합법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모나리자>는 무조건 프랑스 소유’라는 억지를 정당한 것처럼 꾸미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죽어도 나는 안 내놓을 거니까 어디 너희들 마음대로 해볼 테면 해봐’라는 식이다.
히틀러가 마구잡이 식으로 <모나리자>를 약탈해 가려고 했던 것처럼, 혹시 트럼프라면 어떤 묘책이 있지 않을까?
<모나리자>를 두고 벌어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간의 분쟁,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과 피렌체시 간의 분쟁 틈새를 트럼프가 파고드는 것이다. 양쪽 분쟁의 핵심은 <모나리자>인데, <모나리자>를 가지고 지금 당장 부당 영업이익을 프랑스 루브르가 짭짤하게 거둬들이는 것은 상식과 형평성에 옳지 않다고 간섭하면서 끼어드는 것이다. 트럼프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분쟁의 최종 결정이 날 때까지 제3의 공공지역에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깽판을 치는 것이다. 그럼 안전한 최적의 그 제3의 공공장소가 어디가 좋겠느냐?
아직도 거기가 어딘지 몰라? 그렇게 눈치가 없어? 트럼프가 지금 심혈을 기울여 죽자살자 매달리는 장소가 어디여?
바로 완공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백악관의 새로운 연회장 아니겠어? 그 연회장 개막식에 맞춰서 <모나리자>를 연회장 가운데 전시한다? 트럼프에게 로마 황제의 승리 금관이 씌워지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어? 거기다 말이 좋아 분쟁 종료까지 임시 보관이지........ 이번엔 미국이라고 그냥 순순히 내어 주겠어? (아메리카 퍼스트)가 폼이여? ‘가져가고 싶은 놈이 직접 와서 어디 가져가 봐.’ 장차 짭짤한 수입이 백악관 방문객들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데?(이런 비책을 넌지시 알려주면 트럼프가 내 비자는 내 줄려나? 혹 준공 연회에 초대해주려나? 연미복이 없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의 <조콘다 부인의 초상((La Gioconda)>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분야를 가장 잘 세세하게 기록하여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에 따르자면, 1503년 여름에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에게 피렌체에서 성공한 부유한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로부터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 두고 싶으니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와 함께 대금을 지불했다고 기록되었다. 상호 합의로 대금이 결정되고 지급되었으나 작품을 완성해 넘겨받는 날짜는 약속되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명망있는 화가인 다빈치이기에 돈을 떼어먹지는 않겠지만, 워낙 작업 속도가 느리기로 정평이 난 다빈치에게 기일을 독촉했다가는 혹시 졸작으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조콘도는 언젠가는 완성된 그림을 받게 되겠지 하면서 기다렸다.
하여 이후로 당연하게 다빈치와 조콘도 부인이 만나서 화가와 모델의 입장으로 데생을 비롯한 초보 작업이 벌어졌을 것이다.
직업이 유명한 화가가 분명했고, 주문받은 그림이 있었고, 모델 문제가 전혀 없었다면 초상화 하나를 완성하는 것에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화가에게나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보편타당한 직업적인 일(JOB)일 뿐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게 세상의 모든 다른 화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었을지 몰라도 다빈치에게만은 평범한 일상이 결코 아니라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었다.
물품의 품질은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주문이 폭발적으로 쇄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장이 제때 가동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공장만 제대로 가동이 되면 부자가 되는 것은 따논 당상이 분명한데 어찌된 일인지 공장 기계가 제대 돌아가지 않았다.
다빈치의 직업이 화가라는 것은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데, 정작 다빈치 본인은 자신의 직업을 다방면의 재능인으로 여겼고, 화가를 그냥 취미 정도로만 생각했던것이다. 그림으로 밥 먹고 살겠다는 게 아니라, 살면서 심심해지면 잠깐 그림이나 그려볼까 하는 태도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늘 바쁘고 분주했다. 가진 재주가 너무 많았고 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오죽했으면 다빈치 디스왕인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의 천장에 <천지창조> 그림의 의뢰받자 5년의 시간을 요청했다. 교황이 3년을 강조하자 합의 끝에 끝내 4년 만에 천장화를 완성했다.
그는 교황과의 흥정(?)에서 ‘잘 생각해 보세요. 다빈치는 인물 하나를 벽에 그리는데만 몇 년씩 걸리잖아요. 여기 천장화를 다빈치한테 채우라고 하면 50년이 아니라 500년은 걸려야 겨우 완성이나 시킬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저한테 3년 만에 그려내라고요? 못해요. 5년 안에라도 그릴 수 있는 다른 화가를 찾아보세요. 다빈치를 한 백 명쯤 한꺼번에 데려다 그리라고 하시던가, 5년 아니면 누구도 못 그려요.’
‘너 지금 당장 여기서 죽고 싶어? 무조건 그려서 완성해. 그럼 좋다. 5년 줄께. 대신 그때 가서는 단 한 시간도 더 늘려 줄 수 없다? 맥시멈이 5년이여? 시간 못 지키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야?’ 미켈란젤로는 4년 만에 천장화를 완성해냈다.
어쨌거나 다빈치는 처음 한동안은 나름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를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스케치를 끝내고 초벌 그림까지는 순조로웠을 것이다. 당연하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1년, 2년이 지났는데 초상화의 진전은 없었고 생활비는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다른 수주라도 있어야 하겠는데, 이미 선금을 받고도 납품을 하지 못하는 화가라는 오명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림 의뢰자는 여전히 많았지만 돈을 일시에 선금으로 지급할 사람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작업의 진행도에 맞춰 여러 차례로 나누어 부분 지급을 하겠다는 사람들만 넘쳐났다.
그때 밀라노에서 반가운 초대장이 도착했다.
밀라노에 체류중이던 루이 12세 프랑스 왕이 다빈치를 궁정화가로 와달라는 초대장이었다. 1506년 다빈치는 야반도주를 하듯이 피렌체를 빠져나가 밀라노로 향했다. 이사가는 다빈치의 짐꾸러미 속에 초벌 상태의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가 실려져 있었다. 1506년에서 시작해 1513년까지 두 번째 밀라노 체류를 하게 되었는데, 직책은 분명 궁정 화가의 신분이었음에도, 성을 쌓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여 그만 전쟁놀이와 발명 놀이에 푹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완성되어 쏟아져 나오는 그림이 전혀 없었다. 완전 무늬뿐인 화가였던 셈이다,
주변의 눈초리가 사나와지고 일꺼리가 떨어지자 부득불 1513년 가을에 피렌체로 낙향하고 말았다.
피렌체에 돌아오니 느닷없이 이번엔 피렌체의 통치자 줄리아노 메디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는 것이 아닌가. 줄리아노 메디치의 형인 조반니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 레오 10세에 즉위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밀라노에서 개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에 여유가 생긴 다빈치는 이번엔 로마로 진출할 생각을 했다.
하여 로마로 달려갔는데, 아뿔싸 그만 암초가........... 당시의 로마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막 완성 시켜 세상에 공개한 직후였다. 어디를 가나 사방에서 ‘미켈란젤로’와 ‘천지창조’ 연호가 온 로마를 뒤덮고 있었다. 더불어 레오 10세와 교황청 주면은 희대의 꽃미남 라파엘로가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들이 쌓고 있는 아성을 다빈치가 파고들 틈새가 전혀 없었다.
결국 피렌체로 되돌아 오고 말았는데, 엎친데 덮친다고 그만 줄리아노 메디치 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갈데 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견디다 견디다 못한 다빈치는 결국 1516년 여름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제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치를 앞세우고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앙부아즈로 넘어갔다. 밀라노에서 루이 12세의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나름 연줄을 맺어놓은 몇몇 프랑스의 귀족들과의 인연에 마지막 기대를 건 것이다.
프랑스 왕에 새롭게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대단한 미술 애호가였다. 그가 가진 프랑스가 가지지 못한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에 대해 정말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으며, 거의 도를 지나쳐 집착에 가까울 만큼 이미 정평이 나있었다. 그런 군왕에게 피렌체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제 발로 앙부아즈를 찾아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프랑수아 1세가 감격에 겨워 버선발로 뛰쳐나가 맞이했다는 표현이 아마도 맞았을 것이다.
프랑수아 1세는 알부아즈 근처인 클로 뤼세(Clos Lucé) 숲속에 다빈치가 머물 저택을 무상으로 마련해 주었다.
바로 이때, 다빈치가 믈로 뤼세에 짐을 품때 가지고 온 짐 속에서 3점의 미완성 그림이 나왔는데 바로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와 <성 안나와 성모자>,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그림이었다. 현재 이 그림은 모두 루브르 박물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에 걸려있다.
다빈치는 프랑스에 체류하는 기간에 이 작품들을 마저 완성했다.
작품이 완성되기 까지, 그리고 완성되어 마침내 다빈치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늘 그가 곁에 두고 가장 아꼈던 그림은 바로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였다. 작품 의뢰를 받아 첫 스케치를 하던 순간에서부터 숨이 멋는 순간까지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는 언제나 다빈치의 곁에 있었다. 다빈치가 있는 곳엔 초상화가 있었고, 초상화가 놓였다면 근처에 다빈치가 머물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금 우리는 그 초상화를 <모나리자>라고 부른다.
이때라도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가 마침내 완성되었다면, 계약한 대로 피렌체로 DHL이던 우체국 택배던가 아니면 인편으로라도 작품을 보냈어야만 했다. 여전히 다빈치는 조콘다에게 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계약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그린 그림이 좋고 아까웠다면 속성으로 비슷하게 짝퉁이라도 그려서 보내주었어야만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 그림의 첫 스케치에서부터 완성까지의 전 과정을 스승 뒤에서 지켜보면서 똑같이 그려낸 제자의 그림이 있었다. 채무를 부담으로 느꼈다면, 그랬는데 진품을 보내주려니 아까웠다면, 짝퉁을 차마 못 그리겠다면, 차라리 제자를 설득해서 제자의 그림이라도 대신 보내줬어야만 했다. 하지만 다빈치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나는 모르세로 일관했다.
1519년 4월 23일 다빈치는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스스로 어떤 한계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던 것이리라.
먼저 자신의 노후를 거두어준 프랑수아 1세 프랑스 국왕에게 감사의 편지와 함께 여러 가지 선물 목록을 작성해 서명했다.
다음으로 <모나리자>를 비롯한 남겨놓은 작품들과 다빈치가 가진 유산에 대한 상속권을 제자인 멜치에게 넘긴다고 유언장을 작성해 서명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다빈치가 남겨놓은 모든 작품은 프랑수아 1세가 소장하면서 궁전의 이곳저곳에 걸어 두고 전시를 하다가, 1797년부터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 상설 전시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그저 그러려니 했다.
대영제국이 그토록 갈망하면서도 가지지 못했던 르네상스 미술품을, 그것도 최고라 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거기에 하나도 아닌 다빈치의 여러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를 하는 상황이었으니 프랑스의 자존심은 한 마디로 쁑 쁑 이었다.
'어이. 잉글랜드! 너희는 르네상스란게 없지? 우린 있지롱? 르네상스도 르네상스 나름이라고, 우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야. 적어도 이정도는 되어야 문화를 논할 자격이 있는것 아니겠니?'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는 1503년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 콘다로부터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의뢰받고 계약에 따른 수수료를 받았다. 이미 작품이 팔린 것이다. 작품을 완성해서 건네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에 따른 인수 거부로 계약 취소나 배상 문제가 재판까지 가는 경우도 간혹 있기는 있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화가가 카라바조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다분히 다빈치에게 귀책 사유가 있었다. 납기를 마구마구 어기면서 (밀라노 --> 피렌체 --> 로마 --> 피렌체 --> 프랑스)를 옮겨 다니면서 15년이 지나도록 약속이행을 하지 않은 쪽은 다빈치였다. 어쨌거나 다빈치가 죽기 전에 다행스럽게 작품은 완성되었다. 하지만 계약자에게 납품은 되지 않았다.
다빈치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몰염치한 가해자이고, 조콘다는 초상화를 넘겨받지 못한 순수한 피해자다.
하여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모나리자)>의 소유권은 그림을 의뢰하고 대금을 지급한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가 갖는게 너무도 당연하다.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흘렀으니 채권자도 사망하였을 터, 그의 법정 상속인에게 귀속됨이 마땅하다.’는 것이 지구상의 모든 법률가와 법조인들의 하나같이 공통된 결론이었다.
그랬다면 <모나리자>는 지금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수태고지> <그리스도의 세례> <동방박사의 경배> 작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금 <모나리자>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 회화관)에 버젓이 전시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가????????

나라를 구한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인생의 말년을 맞이하여 다빈치는 프랑스에서 꿈에서도 누려보지 못하던 호사를 누렸다.
반면에 라파엘로는 요절하였고, 미켈란젤로의 말년은 갈수로 상황이 나빠지기만 했다. 내가 그때 알았더라면 미켈란젤로를 어떻게하든지 교회(교황) 몰래 프랑스로 내빼게 만들어주었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 파리의 문화 예술 판도가 사뭇 달라지지 않았을까? 더불어 미켈란젤로의 노후도 편안했을 테고 말이다. 애처롭게 교황의 강제 옵션에 묶인 미켈란젤로의 노후는 파란만장하다 못해 까맣게 속까지 타들어 가고 말았다.
오호 통제라.
암 쏘리 부오나로티!!!!
‘그럼 저렇게 대궐처럼 생긴 집만 하사해 주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냐?’
맨몸뚱이로 야반 도주하다시피 내빼온 처지로 당장 뭘 먹고 살고, 난방비를 어찌 감당하고 관리비는 또 어떻게 해결한담?
그 한탄이 왕의 귓전에 들렸음일까?
다음날 궁전 재무차관이 느닷없이 불시에 들이닥쳤다.
군왕의 재가가 떨어졌음을 알리면서, 앞으로 이곳에 다빈치 일행이 체류하는 기간 내내 국비에서 체류비를 전액 지급해 주겠다는데, 귀빈인 다빈치에게는 매년 1.000 에큐 드 솔레유(Écu au Soleil)를, 비서인 멜치에게는 급여로 매년 400 에큐를, 하인인 살라이에게는 위로 정착금으로 1회 성 100 에큐를 지급하겠다며 첫 달 치 생활비를 내놓는 것이 아닌가.
프랑스는 순금(3.275g) 금화를 사용했는데, 16 세기에 들어서면서 금화의 가치가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가치 환산은 하기 어렵다. 하여 대충 접근을 시도해 봄에 있어서 16세기 프랑스 1 에큐(금화 1닢)의 가치를 오늘날로 환산하면 적게는 500 달러에서 많게는 1.000 달러 이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주 더 간단하게 대충 어림잡아 귀빈인 다빈치에겐 매년 약 10억원 정도의 체류비가 지급되고, 비서인 멜치에겐 3억 이상의 급여를 대신 지급한다는 계산이 떨어진다. 대궐 같은 집도 줘, 국빈 만찬이나 왕실 파티에 초대해 줘, 생활비로 10억씩이나 줘, 그냥 팔자 늘어진 거지 뭐. 로또가 연속으로 한 열 번쯤 당첨되었다고나 할까?
에고. 에고. 불쌍한 미켈란젤로. 난로도 없는 작업실에서 새벽부터 나와서 망치질이나 하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다. 우짤꼬????
또 에고 에고. 라파엘로야. 너는 뭐가 급해서 그리도 빨리 가버렸노? 그러게 옛말에 아랫도리 힘 함부로 쓰는것 아니라 했다니까 안듣더니만.
어쨌거나 그렇게 말년에 팔자가늘어졌던 다빈치가 세상을 훌쩍 떠났다.
그런 그가 떠났다고 세상에 특별하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와 같은 어제였고, 어제와 같은 오늘이었다. 아마 내일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굳이 변한 것을 따지자면 다빈치가 가지고 있던 그림들이 모두 파리 근처의 퐁텐블로(Fontainebleau)성으로 옮겨졌다는 사실뿐이었다. 퐁텐블로는 프랑수아 1세 프랑스 왕이 사는 사저라 할 수 있었다. 성의 곳곳에 다빈치의 그림들이 걸려 전시되었다.
그런데 지금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딱 하나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 행방이었다.
퐁텐블로 성의 프랑수아 집무실 어디에도 초상화는 보이지 않았다.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과 응접실과 서재에도 보이지 않았다. 계단 주위를 아무리 오르내리면서 찾아보아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프랑수아의 침실을 살짝 훔쳐보았는데, 거기에도 초상화는 없었다. 다빈치가 평생동안 가장 아낀 그림이라는 사실은 프랑수아 1세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비밀 금고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 볼 리도 만무하지 않은가? 찾다 찾다 지쳐 쓰러지게 생겨서 지나가는 수행 비서에게 살짝 도움을 청했더니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알려준다.
‘리얼리? 설마 그럴 리가? 장난치지말고? 그게 정말이야?’
비서가 가리킨 곳은 뜻밖에 왕의 전용 욕실이었다.
하고많은 좋은 전시공간을 내버려두고 왜 하필 욕실이냐고? 그게 어디 보통 그림이냐고? 지금 제정신이야?
어쨌든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실제 벌어지고 말았으니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란 존재를 알고 있거나, 아니면 실제로 그 그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프랑수아 1세의 다빈치에 대한 애착은 아주 강력하고 유별난 것이었지만, 적어도 이 그림 <조콘다 여인의 초상화>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다빈치가 남겨놓은 것이고 하니 아무 곳에나 대충 걸어놓아 치운다는 꼴이 아니었겠는가 말이다.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그게 누가 그렸고 무슨 사연이 담겼는지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런 무관심은 프랑스와 1세 뿐만이 아니었던 듯 싶어보인다. 다른 후대의 왕들 태도도 별반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이 13세는 영국 찰스 1세가 초상화에 관심을 보인다는 말에 차라리 팔아버릴까 생각까지 했다가, 거래 상대가 하필 영국이라는 이유로 판매를 거절했다.
루이 15세는 내부 수리중인 건축 감독관에게 아무대나 치워버리라 지시했고, 감독관이 거실의 깊은 구석에 감추듯 걸어놓았다.
그러다가 정작 초상화에 관심을 보인 첫 인물이 나타났으니 바로 나폴레옹 이었다. 나폴레옹은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를 자신의 침실에 걸어 놓았다. 나폴레옹마저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초상화의 팔자는 사뭇 달라졌거나, 사라졌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나폴레옹과 왕실의 재산과 미술품들이 모두 국고로 강제 환수되었다. 나폴레옹의 침실에 놓였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초상화는 최고로 귀중한 대접을 받기에 충분했다. 소중하게 모셔졌고 1804년에 새롭게 개조된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전해 전시되었다.
그런데 또 거기까지 뿐이었다.
회수되어 박물관에 들어가기 까지는 최고 귀중품 대접을 받았으나, 박물관에 들어가 보니 사방에 널리고 쌓인 게 죄다 역사상 최고로 비싸고 귀중하다는 것들 천지였던 것이다.
대충 박물관의 어느 귀퉁이에 크기가 고만고만한 작품들 사이에 끼듯 내걸렸다.
위쪽으로 베로네세(Veronese)의 그림이 걸렸고, 티치아노(Titian)의 그림과 코레조(Correggio)의 그림 사이에 끼워 맞춰 놓은 모양새였다. 누구도 이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인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면서 루브르 박물관의 미술품 배치와 전시 목록이 재정비 되고 완전하게 목록화가 이루어지면서, 담당 관리자와 큐레이터들과 극히 소수의 관계자들만이 이 그림의 존재와 정확한 내역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일반 대중에게 오픈된 루브르 박물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왔지만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가 놓여있는 구석진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춘 관람객은 눈을 씻고 아무리 찾아볼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는 지워지고 숨겨진 소중한 미술품이 아니라, 아예 애시당초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존재하지 않는 작품이었다고 보아도 이상할 것이 전혀없는 그런 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1804년부터 1911년까지 한 세기(100년)가 지나도록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는 루브르 박물관 회화 전시실에서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처럼 가혹한 버림을 당했다.
차라리 다빈치가 죽기 전에 약속을 이행해서 피렌체의 조콘다 가문에게 보내줬었더라면, 지금쯤 조콘다 저택의 서재나 응접실에 걸렸거나, 아니면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진가를 발휘하고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겠는가?
하늘나라에서 다빈치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과연 누가 가장 원망스러웠을까?
프랑수아 1세가 원망스러웠을까?
아니면 제자인 멜치와 살라이 중에 과연 누구를 더 미워했을까?
그렇다고 설마하니, 방치되었던 그림을 끄집어 냈다고 나폴레옹을 원망하지는 않겠지?

리옹 출신의 사실주의 화가인 루이 베르드(Louis Béroud)는 이젤과 스케치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서 자신의 작업실이자 갤러리인 몽마르뜨 인근의 집을 나섰다. 밖에는 친한 친구이자 동업자이기도 한 프레데릭 라귀예르미(Frédéric Laguillermie)가 기다리고 있었다. 루브르(Musée du Louvre)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가야 했기에 일찍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어제 월요일은 루브르가 공식 휴관 일이었기에 일찍 서둘러가서 혹시나 다른 누군가와 작업 장소가 겹칠 수 있기에 좋은 공간을 우선 확보하기 위해 조금 서둘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드농관 2층의 카레 살롱이다. 베르드는 금년 들어서 <루브르 살롱 뒤 루브르> 라는 루브르 박물관의 내부 전시실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하는 사실주의적 풍경화의 연작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번 단계의 작품이 <루브르의 조콘다 부인 초상화> 였다.
카레 살롱이 배경이 되는 전시 벽면에는 위쪽으로 베로네세(Veronese)의 그림이 걸렸고, 아래로 티치아노(Titian)의 <알폰소 다발로스의 우화> 옆에 다빈치의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가 걸렸고, 오른쪽으로 코레조(Correggio)의 <신비로운 결혼>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앞에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를 모사하고 있는 여류화가의 작업풍경을 이번 화폭에 가득 옮겨 담을 생각이었다.
프레데릭 라귀예르미(Frédéric Laguillermie)는 루벤스의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중에서 한 장면을 판화로 옮기는 작업을 위해서 함께 루브르를 찾아가는 중인 것이다.
사실 두 사람 모두 그리 널리 알려지거나 성공한 화가에 들지는 못한 그저그런 정도의 화가였다. 둘은 루브르 외에도 쥬 드 폼이나 오르세 역이나 에펠탑 등을 찾아다니며 풍경이나 장소가 주는 빼어난 상징적인 건축물을 배경으로 주변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아내거나, 판화로 찍어내 허름한 자신의 갤러리에 전시하면서 작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두고 주변에선 베르드가 솜씨는 있으나 창의력이 부족한 모작 화가라 비아냥거렸고, 라귀예르미 역시 모방 판화작품이나 양산하는 인쇄업자라고 비아냥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엄연한 파리의 예술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루브르 박물관의 생 니콜라스 출입문을 그대로 통과했다.
원래 이곳은 루브르의 관리 직원이 상주하면서 외부 방문자의 입장권을 확인하고, 업무차 방문객의 신분과 짐 검사를 철저하게 하는 경비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금 당장 직원과 몇 마디 말로써 인사만을 나누고는 짐 검사도 없이 그대로 경비소를 통과하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정식 직원도 아니면서 말이다.
사실 루브르(Musée du Louvre)는 지금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의 미술관)이라 내세우고 프랑스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지만, 소장 미술품의 절대다수가 약탈 문화재라는 오명에 대해서도 (대영박물관) (독일 베를린 미술관)과 함께 치명적인 약점으로 늘 작용하고 있었다. 하여 (대영박물관)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지금 이순간에도 완전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반면 루브르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입장료를 받고 있다. 곧 <모나리자>를 앞세워 특별 추가 입장료를 더 받아낼 생각이다. 프랑스 국민의 그 엄청난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자신들의 세금으로 만들어 가기는 죽어도 싫고, 외부 방문객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유지해 나가겠다는 속셈이다. 내가 루브르를 싫어하는 속내가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신 루브르는 18세 이하의 청소년과 어린이에게만은 완전 무료 개방이다. 더불어 미술종사자와 학계의 미술 분야 연구를 하는 사람에게도 항상 무료로 개방한다. 여행객일지라도 미대 학생증이나 학교 미술 선생님을 증명하는 서류를 갖추면 무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이점이 내가 루브르를 가장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이유다.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루브르는 소풍 장소이자 야외 견학 장소이자 미술 공부방이자 놀이터다. 1년 365일 내내 공기와 습도와 밀도는 물론 실내 온도까지 최적의 상태로 항상 체크 되고 유지되는 최고의 휴식 공간이다. 세상에서 최고로 비싼 입장료를 낸 여행자들은 <모나리자> 앞에서 30분씩이나 줄을 서서 겨우 인증샷이나 찍지만, 여기 어린이들은 <메두사호의 뗏목>이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나 <오달리스크>나 루벤스의 연작 시리즈가 있는 공간과 푸생의 풍경화가 빼곡한 방을 비롯한 루브르 미술관의 아무데서나 엎드리고 드러눕고 턱을 괴고 그림을 따라 그리는가 하면 장난도 치고, 궁금하면 선생님이나 전문 큐레이터에게 물어보고, 여기 이 지구상 최고의 미술관을 지상 최고의 놀이터로 삼고 놀이 삼매경에 빠진다. 그야말로 어린이 천국이다. 숫적으로 절대 부족한 화장실 앞에서 선생님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 놀다가 지치고 생리적 현상 처리의 때를 그만 넘긴 어린이들 상황에 대처하느라 열일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도 어린이들의 미술관 놀이에 대해서 이래저래 제재나 간섭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루브르 박물관의 실질적인 주인은 (온리 어린이 퍼스트)다. 그들이 앞으로도 이 거대한 박물관을 지켜나갈 것이고, 더 풍성하게 채워나갈 것이라는 희망이기 때문에 부여되는 특권인 것이다. 하니 어찌 마냥 부럽지 않겠는가?
‘엘리트 문화인으로 살아가려면, 시를 읽고 고전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며, 악기 하나쯤은 다루어야 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소질을 가질 필요는 없어도, 어느 정도 그림을 보는 안목과 지식은 반듯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루브르에서 즐겁게 노는 어린이들은 이미 그런 터전이 조성되어 밑받침이 되고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문화와 예술이 성장의 저변에 알게 모르게 깔려있고, 그런 환경에서 성장하다가 자신의 재질과 재능을 깨닫고는 다음 단계의 전문적인 예술가의 길로 역시나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가는 것이리라. 어찌 부럽지 않겠는가? 우리 병아리들도 그렇게 자라나게 해 주고 싶다.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갈 때마다 드는 간절한 생각이자 바람이다.
루벤스 전시실을 지나면서 ‘이따가 쉴 때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고 베르드는 살롱 카레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관일 다음 날 아침이기 때문인지 전시관의 실내는 조용했다. 조명 상태를 확인하는 기술자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카레 전시실 구석진 자리에 도착해서 베르드는 이젤을 꺼내 설치하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그저께와 똑같은 위치에 설치를 해야 그날 하다가 만 스케치 작업의 시선과 초점을 맞출 수 있다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으며 거리와 방향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데 초상화가 어디 갔지?’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스쳐 지나가는 시선에 반듯이 거기에 있어야 할 그림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시선을 되돌려 신경을 집중하고 쏘아보았는데 분명..........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가 없어진 텅 빈 공간만이 보였다.
좌우의 티치아노와 안토니오 다 코레조 그림의 세세한 스케치는 그제 마친 상황이었다. 이제 오늘 다빈치의 초상화를 세세하게 스케치하고 나면, 다음은 그의 작업실에서 캔버스에 유화로 옮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여보게. 라귀예르미. 초상화가 없어졌어. 자네 무슨 이야기 들은 것이 있었나?’
‘그게 무슨 소리야? 초상화가 없어지다니? 자네가 거기서 작업하는 걸 관리자들이 알고 있는데, 그림을 가져갈 이유가 있었다면 진즉에 알려주었겠지?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어. 관리실에 가서 한 번 물어나 보자고. 초상화가 거기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함께 가 보자고. 물어나 보지 뭐.’



루브르 박물관 관리사무소 직원은 커다란 목록 책을 가져다가 책상위에 펼쳐놓고 한 장씩 넘겨 가면서 살롱 카레(Salon Carré)에 전시중인 작품들의 목록을 하나씩 하나씩 짚어 내려가고 있었다.
‘초상화 작품이라고 하셨지요? 등장 인물이 여성 한 명이라고요?’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라고 불렀으니 장부에는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다빈치의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었다고요? 그래요?’
순간 베로드와 라귀예르미는 눈치챌 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는 이 직원은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정작 라 조콘다(La Gioconda)가 다빈치의 작품인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이 직원은 아직까지 그 그림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 여기 있네요. 라 조콘다(La Gioconda) 초상화가 <4706 D1- Salon Carre> 구역에 전시 중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라고 적혀있네요. 그런데 지금 그림이 안 보인다고 신고하러 오신 거지요?’
‘신고라기 보담은, 그냥 궁금해서 알아보러 온것이지요. 그 초상화를 모사하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 와보니 갑자기 안보여서요. 갑자기 무슨 이유라도 생겼나 해서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요?’
직원은 라 조콘다 이름과 작품 일련번호가 적힌 메모 옆에 신고자의 이름을 적으려고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루브르 미술관의 보안책임자 푸파르댕(Poupardin)은 외부 업부를 위해 막 외출을 하려던 참이었다. 인근의 쥬 드 폼 미술관에서 보안 시스템 개선 협조를 의뢰해 왔던 것이다. 하여 자문을 약속하였던 터라 아침에 잠시 주 드 폼 미술관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적힌 메모를 보면서 설명을 했다.
‘<4706 D1 - Salon Carre>에 전시중인던 다빈치의 초상화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빈치의 초상화? 거기 베르도 화가께서 며칠 동안 꼼짝 않고 매달리시던 그 그림 아닌가요? 내가 보니까 그저께도 문 닫기 전까지 거기에 계시던데, 어제는 휴관이었고 오늘 아침에 보니까 갑자기 없어졌다? 에이. 루브르 경비가 얼마나 철저한데 갑자기 그림이 어디를 가겠어요? 혹 베르도 화가께서 어디 감춰놓으신 것이 아니라면 누가 어디에다 숨기겠어요. 그러니 그냥 다시 걸어 놓으세요. 아셨지요?’
‘제가 감췄다고요? 아닙니다. 절대 아니예요. 저는 여기 라귀예르미와 함께 방금 전에 도착해서 막 이젤을 펼치려던 참이라고요. 제가 그걸 가지고 뭘 한다고....... 저는 절대 아닙니다. 이적 손끝도 대보지 않았단 말씀입니다.’
‘농담입니다. 농담이요. 백주 대낮같은 이 아침에 루브르 미술관 한복판에 있던 그림이 가면 어디를 갔겠습니까? 안전 관리와 보안 대비로 유리케이스 작업이 얼마 전에 끝났고, 전시 공간 재조정이 한창 막바지가 아니겠습니까? 시진 목록 완성을 위해 크기가 작은 미술품이니까 잠시 사진 찍으려고 가져갔겠지요.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보고서 쓰고 허락받기 불편하니까 한가한 시간에 잠시 가져갔을 것입니다. 어디 액자에 작은 상처라도 생겨서 부분 수리 하려고 연구실에서 잠시 가져갔을 수도 있겠고요. 전시실로 돌아가셔서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금방 다시 가져올 것입니다. 저는 잠시 외출이 있어서 이만..........’
설명을 마친 보안책임자 푸파르댕(Poupardin)은 일행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푸파르댕의 말을 듣고 나니 또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브르 박물관은 지금 한창 현실적인 개선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장하고 있는 모든 미술품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는 데이터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해프닝이 종종 발생하긴 했었기 때문이다.
베로드와 라귀예르미는 다시 카레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사이에 벌써 초상화가 돌아와 다시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벽면의 초상화가 걸렸던 공간은 여전히 텅 비어 있고 유리 진열장을 지탱하던 네 개의 못 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다.
다시 또 한 시간이 더 지났다.
오늘따라 살롱 카레를 찾는 방문객도 별로 없었다. 아주 썰렁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안 되겠어. 직접 한 번 연구소로 직접 찾아가 보자고. 확인해서 사진 작업이 더 오래 걸리겠다고 하면 우리가 이대로 접고 오늘 작업을 포기해야 하지 않겠어?’
라귀예르미의 동의를 얻어서 베르도는 긴 회랑을 지나 옆 건물의 지하 연구실로 향했다.
여기저기 기웃기웃 하면서 마침내 미술품의 관리 데이터를 사진 작업으로 전환하는 사무실을 찾았고 담당자를 만났다.
‘아니예요. 카레 살롱의 데이터 작업은 벌써 끝이 나서 저희가 다시 작품을 찾아볼 일이 없어요. 그리고 오늘은 어떤 작품도 사진 작업 스케줄이 없답니다. 아마 다른 착오가 생긴 것이겠지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일?
두 사람은 어차피 나선 길에 다시 복원작업실로 가서 담당 책임자를 만났다.
‘복원작업이야 항상 이어지고 있지만, 지금 손대고 있는 다빈치 작품은 없어요. <라 조콘다(La Gioconda)>의 보존 상태는 썩 훌륭해요. 지금 손을 댈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저희는 보존 작업이 상당히 오래 걸리기 때문에 보고서와 절차에 꼭 따라야 하지, 함부로 작품을 회수해 오진 않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뭐야?
정말로 <라 조콘다(La Gioconda)>가 사라졌다는 말이네?
다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베로드와 라귀예르미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보안책임자 푸파르댕(Poupardin)의 표정은 경악을 넘어 새하얗게 변해갔다.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두 화가가 처음 낌새를 채고 제보를 해온 지 벌써 3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푸파르댕은 아까 제보를 처음 받은 직원의 책상으로 가서 자신에게 내보여 주었던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 일련번호가 적힌 메모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메모용지의 뒷면에 전달사항을 기록했다.
‘이걸 가지고 전신국으로 가서 당장 박물관장님 앞으로 전보를 타전해. 여기 메모 내용 그대로 보내도록 해. 관장님이 지금 니스에서 휴가 중이시니까, 아무때고 니스에서 연락이 오면 즉시 나에게 연결해 주고.’
허겁지겁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려던 푸파르댕은 베로드와 라귀예르미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두분께서 추측하시는 대로 아무래도 안 좋은 일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서 절대 외부로 새나가서는 안되겠습니다. 당분간 비밀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 사무실에 그대로 머물러 주십시오.’
이어서 사무실이 찌렁찌렁 울릴 정도로 푸파르댕은 큰 소리로 자신의 명령을 지시했다.
‘지금 당장 루브르를 완전히 차단하도록, 외부에서 들어오는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되고, 이미 내부에 있던 그 어떤것도 절대로 오늘은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별도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어떤 예외도 없다. 비번인 보안팀도 모두 비상소집시키고, 내부 근무자들은 먼저 전시실 일대를 샅샅이 수색해서 초상화를 찾아보도록 한다. 나는 지하 연구실로 부관장님을 만나보고 오겠다. 일절 외부로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방문객들에게는 보안 시스템 훈련 작동 실험에 약간의 차질이 생겨서 그러니 곧 정리가 될것이라 하고 무조건 붙잡아 두도록. 곧 다음 조치가 내려 질 것이다.’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가면서 밖을 보니 정복 차림의 경비원들이 자신의 담당구역으로 뛰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이시간부로 루브르 박물관은 폐쇄되어 외부와 완전하게 차단될 것이다.
루부르 박물관의 관장은 테오필 오몰(Théophile Homolle) 이었는데, 그는 지금 니스에 머물면서 휴가와 현지 미술관 순시를 병행하고 있었다. 하여 비상조치 순위에 따른 지금의 책임자는 큐레이터이자 미술품 전문 복원가인 베네딕트였다.
푸파르댕은 베네딕트에게 지금 벌어진 상황을 설명했다. 책임자의 지시와 허락을 받으려고 비상사태 보고를 한것인데, 사실 베네딕트는 연구실에 쳐박혀있는 학자일 뿐이었진, 행정 업무나 비상상황에 대처할 임기응변을 가진 책임자급 인물이 아니었다.
그때 니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테오필 관장이었다.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가 없어졌다고? 너희들 서라는 경비는 안서고 단체로 야유회라도 다녀왔냐? 경비를 제대로 섰으면 그림이 어디를 가? 구석이든 창고든 어디에 있겠지? 어떤 멍청한 놈이 보고를 빼먹고 움직였겠지, 노틀담 대성당의 제단 십자가를 훔쳐낼 수 있겠어? 파리에서 에펠탑을 훔쳐 갈 수 있겠냐고? 제대로 찾아보고 나서 다시 보고해. 좀 제대로 해라?’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실질적 책임자인 테오필 관광에게서 뚜렷한 지시를 받지 못한 푸파르댕은 즉시 같은 자리에서 예술부 장관(문화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직책으론 박물관장 윗선 책임자가 장관이 맞았음에도 평소 프랑스 예술계의 전반을 하급기관인 국립박물관장이 모두 나서서 쥐락펴락하는 꼴을 못마땅해하던 상황인지라 되돌아올 답변은 너무나 뻔한 것이었다.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가 없어졌다고? 그건 루부르 박물관의 일이지 외 이제와서 새삼 나한테 떠넘기려 하는거야? 테오필 오몰에게 물어봐? 테오필이 책임지고 해결을 한 후에, 나중에 절차대로 나한테 보고하라고 전해. 알았지? 루브르가 홀랑 불에 타서 전소되지 않는 이상 이런 문제로 다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마.’ 하고는 화까지 버럭 내면서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푸파르댕은 맥이 쭉 빠지고 허탈해지기 까지 했다.
이게 루브르 박물관의 엄연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낸 루브르와 내부의 사정 사이에는 실로 엄청난 갭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박물관 전체를 비상 차단했다고 하셨지요? 경비에 좀 더 힘써주세요. 아무래도 경찰에 신고해서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우린 당장 인력도 부족하고 이런 도난 사건에 대한 수사 경험도 없으니까요. 사고가 외부로 알려지거나, 아니면 범인이 박물관을 빠져나가기 전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것이 최선이란 생각이 드네요. 파리 경시청에 믿을만한 전문가를 보내 달라고 신고를 제가 하겠습니다. 푸파르댕은 내부 근무자의 동요나 소란을 막아주시고, 외부인들을 마냥 붙잡아 둘 수는 없을 테니 방문자의 신원과 연락처와 찾아온 용무와 동선을 파악하는 선에서 서면 조서를 작성해 놓고는 잘 달래서 보내주는 일을 맡아주세요.’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큐레이터님의 도움을 받을 일이 있습니다.’
‘뭐든지 돕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라 조콘다(La Gioconda) 초상화가 사라져서 찾고 있는데, 정작 경비원을 포함해 이 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중에서 <라 조콘다>를 실제로 보았거나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큐레이터들을 제외하면 <라 조콘다>를 구분해서 찾아낼 만한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하여 지금은 일단 그림이라면 무조건 압류하라고 지시를 내려놓았을 뿐입니다. 사진 작업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 사진이 되었던, 아니면 스케치로 급하게 그리던 <라 조콘다 >를 알아볼 수 있도록 종이에 인쇄해서 보내주십시오. 박물관 근무자 형편이 그럴진대, 경찰 인력의 도움을 청한다 해도 그들 중에 찾아야 하는 초상화 그림을 알아볼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베네딕트 옆에서 이런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큐레이터가 자료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필름으로 데이터화 해놓은 <라 조콘다>를 찾아 인화를 해서, 다시 인쇄용지에 찍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여러장을 말이다.
베네딕트는 파리 경시청에 전화 연결을 부탁했고, 푸파르댕은 다시 상황실로 뛰어 올라갔다.


요란한 싸이렌 소리와 함께 한 떼의 무리들이 루브르 박물관 광장으로 들이닥쳤다.
버스 두 대로부터 수십명씩의 정복 경찰들이 쏟아지듯 내리기 시작한 시간은 정확히 오후 1시였다. 루브르로부터 도난사고 발생 신고를 받고 파리 경시청이 파견한 경찰 수사대였다. 앞장을 섰던 승용차에서 파리 경시청장 루이 레핀이 내렸고, 기다리던 푸파르댕이 경찰 수뇌부를 카레 살롱으로 안내하고는 이제까지의 사건 정황을 설명했다. 아울러 방금 제작되어 배포되기 시작한 <라 조콘다> 사진을 복사한 인쇄용지를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직설적이며 호탕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경시청장 루이 레핀은 데리고 온 60명의 경찰관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어떤 경우에도 예외 없이 모든 출입을 일제히 금지한다. 아울러 박물관 외부에 일정 간격을 두고 비상 경계선(바리케이트)을 설치하여 외부와 어떤 소통이나 사소한 물건이라도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한다. 현재 경비를 서고 있는 박물관 소속 경비원들은 관리자들과 함께 내부를 수색하면서 동시에 경찰의 조사에 적극 협조해야 하며, 모든 경비업무는 즉시 경찰이 넘겨받아 대신한다. 추가로 증파되고 있는 수사 전담 경찰 60명을 사무실 직원들의 협조하에 모든 박물관 내부의 전시실을 우선 수색해 사라진 그림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살롱 카레를 눈여겨 살피고, 모나리자가 뜯겨나간 전시공간을 예의 주시하던 레핀 경시청장은 평소처럼 아주 자신에 찬 어조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푸파르댕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 직원들을 향해 일갈을 날렸다.
‘도난 사건이 오늘 개장 시간 직후에 발견되었다면, 어제가 휴관이었으니 아마도 그제 마감 시간 전후에 벌어졌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경비실에 알아보니 그제는 물론이고 박물관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의 인적사항과 방문 시간은 물론 나가는 시간까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는 여기 박물관 근무자들의 출퇴근 기록이 남아있겠지요.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약간의 시간입니다. 하나하나 조사하고 확인해 보면 모두 드러나게끔 되어있습니다. 달리 더 드러난 사건 사고 없이 그림만 사라진 것이라면, 어쩌면 그림은 아직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단 훔쳐서 감추어 놓고 밖으로 반출할 수 있는 틈새를 찾고 있겠지요.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그리 어려운 수사는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수사는 이틀에서 사흘 안에 끝날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불편을 참아주시고 수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루이 레핀의 말 대로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푸파르댕은 생각했다.
일단은 이 비극적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기에 그림을 찾아 수습되기만 한다면, 정부나 관련 기관이나 박물관이 앞장서서 어떻게든 이 사건을 덮어버리려고 할 테니까 말이다. 그늘 누구도 이 사건으로 인해 더이상 프랑스의 국가 위상이 훼손되는 것만은 절대로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늘 예측 가능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데에 모든 문제의 핵심이 있다.
멀쩡한 백주 대낮에 느닷없이 모든 문을 잠궈버리고 바리케이트까지 치는 경우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20세기에 들어서서 벌써 몇 번 벌어지기도 했었으며, 그때마다 박물관 안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느닷없이 버스까지 동원한 경찰 파견이 오후에만 두 번씩이나 벌어졌다. 거기다가 박물관에서 나오는 방문객들이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정황들을 합쳐보면 분명한 것은, 지금 루브르 박물관 안에서 모종의 어떤 사태가 발생했다는 가정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당연하게 이런 낌새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어있게 마련이고, 이내 이런 냄새를 맡고 파리의 신문과 잡지 기자들이 서서히 노을이 찾아들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파리에서 발행되는 모든 조간신문에 도난 혹시나 모를 의심되는 사건에 대한 추측성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아직은 구체적 내용이 전혀 수반되지 않은 분분한 추측성 기사였을 뿐이다. 일부 신문에서 19세기 말에서 최근까지 루브르 박물관에서 벌어졌던 각종 사건에 대한 재조명 기사가 올라왔다.
세간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하던 사태의 직접 담당자들이 살롱 카레에 비밀리에 모였다. 루이 르피슈 파리 주지사와 미술부 차관과 베네딕트 큐레이터와 푸파르댕 보안 책임자와 루이 레핀 파리 경시청장이 그들이었다. 루이 레핀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다. 밤새 수색을 해 보았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폭언을 날렸던 루브르 박물관장은 지금 니스 휴가를 중단하고 기차로 파리로 급히 돌아오고 있었다.
루이 르피슈 파리 시장은 조간신문 르 피가로(Le Figaro)지에 실린 관련 기사를 지금 다시 읽고 있었다. 알려지면 절대 안 되는 국가 비밀이 밤사이에 어느새 담장을 넘어버린 것이다. 지금 이 방에 모인 실무 담당자들의 긴급회의에서도 어떤 해결 방책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만 하고 있었던것이다. 이제 여러 아침 신문들이 총리실은 물론 모든 관공서는 물론 각국 대사관에도 전달되었을 것이다. 온 유럽이 어떤 낌새를 채고 루브르를 주시할 것이다. 특히 영국과 독일은 정보 수집을 넘어 스파이를 파견하고도 남을 정도로 파리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태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지난 한 세기가 3국 간에 식민지 확보와 자원 쟁탈전이었다면, 지금은 예술과 문화 쟁탈 전쟁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총리실에 보고를 해야겠습니다. 더는 우리 차원에서 수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정부 차원에서 해결책을 마련하고 즉시 책임을 질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내 전권을 주고 맡겨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아시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정부 차원의 다음 지시를 기다려 주세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에서 모닝커피와 함께 파리의 조간 신문들을 늘어놓고 국정을 살피려던 대통령의 눈에 어떤 음모론 같은 루브르 박물관의 추측성 기사가 띄고 말았다.
프랑스 제3 공화국의 아르망 팔리에르 대통령(1906 ~ 1913 재위)은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했다. 르피슈 파리 시장이 각료회의에 참석해서 <라 조콘다> 도난 사건의 개요를 세세하게 설명했다. 회의 분위기는 더없이 무겁고 진지했다. 마치 프랑스가 지금 어떤 나라와 전쟁이라도 발생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 시간을 넘긴 내각회의 끝에 다음과 같은 대책이 최종 결정되었다.
‘팔리에르 대통령은 루브르 박물관의 <라 조콘다> 도난사건 수사의 총 책임자로 조셉 마리 드리우 치안판사를 임영하며, 그에게 대통령령으로 전권을 부여한다.’는 명령서에 즉시 서명했다.
명령서를 접수한 치안판사는 즉석에서 전설의 수레테 파리지앵(파리 특별 수사대) 60명을 루브르에 투입을 명령했다. 옥타브 하마드 경감의 지휘하에 모든 수사가 지휘 감독될 것이다. 수레테 파리지앵이 출동하여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없었다. 더하여 하마드 경감의 수사 능력은 항간에서 이렇게들 평가해왔다. ‘영국에 셜록 홈즈가 있다면 프랑스엔 하마드가 있다. 홈즈는 소설책 속에 등장하지만, 하마드는 파리의 길거리에서 언제든 만날 수 있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직속 상관이었지만 루이 레핀 파리 경시청장 조차도 하마드 경감의 아우라에 짓눌려 함부로 이래라저래라하지 못하던 차에, 이제 하마드 경감이 실무 책임자가 되어 자신을 패스하고 치안판사를 통해 대통령실에까지 직속 라인을 설치하게 되었으니, 레핀 경시청장의 처지가 어떻게 좌불안석이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실제로 그런 우려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레핀 경시청장이 데려와 수사에 투입된 경찰이 밀려나고, 하마드 경감이 이끄는 수레테 파리지앵이 투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 사건을 첫 단서를 찾아냈다.
카레 살롱에서 화재시에 사용하려고 만든 비상계단 중간의 깊숙한 안쪽에서 뜯어서 버린 액자가 발견된 것이다. 함께 발견된 옆에는 그림을 보관하기 위해 이번에 새롭게 설치한 유리 상자가 파손된 상태였으며, 유리 상자에는“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피렌체 화파 <라 조콘다>”라는 꼬리표가 선명하게 붙어있었다.
이는 곧 <라 조콘다>가 누군가에 의해서 안전장치가 훼손된 채, 적어도 전시관 외부로 이미 확실하게 반출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아울러 박물관 외부로 이미 반출되었기에 더이상 어떤 추가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했다.
다시 열린 비상내각회의는 결국 이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해 어수선한 여론을 무마시키고 시민들의 협조하에 명명백백하게 사태를 수습하기로 하고 대변인을 통해 언론에 모든 정황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은 즉시 테오필 호몰레 루브르 박물관장과 문예부 장관을 해임시켰고, 임시 관장으로 치안감 외젠 M. 퓌잘레를 임명했다. 드리우 치안판사는 곧바로 루브르 박물관을 일주일간 폐관했다. 동시에 모든 프랑스 국경이 봉쇄되었다. 주변국들에게 수사 협조를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열차와 자동차를 운행을 임시 중단 시킨 상태에서 철저하게 조사한 후에 이동을 허락했다. 항구를 떠난 선박들도 정지 요청을 보내 경찰 선박이 쫓아가 수사를 했을 정도로 국제 수사망까지 동원한 전대미문의 대대적인 수사가 전격적으로 단행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수레테 파리지앵(파리 특별 수사대)을 전설의 반열에 올려놓은 마지막 히든카드까지 동원되었다.
하마드 경감이 이끄는 수레테에는 ‘번죄 수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현대적인 법의학과 과학 수사기법을 창안하고 도입한 범죄 수사학자 알폰스 베르티용(Alphonse Bertillon, 1853~1914)이 있었던 것이다. 지문 감식을 통한 수사가 막 도입되기 시작한 시점에서 베르티용은 근대적 범죄자 사진 촬영 방식을 도입해, 용의자의 신체 치수와 사진을 결합하여 몽타주를 뛰어넘는 인체 측정법(Bertillonage)을 통한 체계적인 범죄자를 식별하고 데이터를 수집해 모으는 시스템을 구축했던 것이다.
요즘 우리가 흔하게 떠올리게 되는 머그샷(Mug shot)이 바로 이때 탄생한 것이다.
이 머그샷을 통하면, 화재등으로 인체가 심하게 손상되지 않는 이상 그 데이터는 절대로 달라지지 않는다.
베르티용은 인류학에 관심을 가지던 중에, 고고학 분야의 발굴현장에서 사용하던 인체 측정과 정면과 측면 사진, 글쓰기 방법을 범죄 수사에 도입했다. 자신의 얼굴을 사진 찍어서 구체적인 측정 기록으로 남기고, 추가적 특징을 추가로 적어놓으면서, 이 새로운 수사 기법의 현장 도입을 적극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수사기법이 ‘베르티오나주’로 불리면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새로운 범죄수사분야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다만, 일단 수사 선상에 올라 머그샷을 찍었으면, 수사 과정에서 범죄자가 아니라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데이터가 계속적으로 수사에 사용된다는 범죄와 인권 사이에 철학적인 문제성을 제기하게 되기도 했다.
알폰스 베르티용(Alphonse Bertillon, 1853~1914)의 범죄감식부는 박물관 직원 257명의 지문을 채취하여 비상 계단의 유리 상자에서 발견된 지문과 대조하였으나 일치되는 자료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수사의 범위를 점차 확대하여 사고 당일과 전일의 방문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지문을 채취하고 거주지를 샅샅이 검사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확대해 나갔다.
그런데........
<라 조콘다>를 훔쳐간 범인의 집에도 경찰이 찾아갔고,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문은 채취되지 않았고, 집안은 수색되지 않았다. 지난친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지치기도 했고, 또 안면이 있거나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현장에 파견나간 일부 경찰들의 방종과 나태함이 부른 재난이었다.
범인을 찾아 온 경찰들이 딴청이나 부리고 불만이나 늘어놓다가 그냥 돌아서는 순간에, 수집해서 대조만 해 보았으면 그때 모두 드러났을 범죄의 단서인 지문 채취가 얼떨결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지문 채취 용지가 떨어져서 ‘시간 내서 박물관 조사실로 나와서 지문 채취에 협조해 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갔고, 범인은 다시는 박물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더 까무라칠 일은 경찰들이 의자 대신 깔고 앉아 노닥거리던 그 침대 아래 <라 조콘다>가 대충 옷가지에 덮여 숨겨져 있었다.
결국 범인은 한 번도 도난 사건의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라 조콘다>가 사라졌다 "
"<모나리자>를 도난당했다"



여러날이 지났건만 수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로 루브르의 폐관은 다시 연장되었다.
처음 추측성 기사만 올리던 조간 신문과 잡지들은 점차 심층성 있는 취재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이며 다양성 있는 기사들을 써서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루브르 박물관의 부실한 관리 시스템과 경비원들의 부주의, 정부와 공권력의 무능에 대해 차례로 비판의 강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라 조콘다> 초상화에 대한 이력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다름 아닌 ‘르네상스 미술의 3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었다는 대목에서는 파리는 물론 전 유럽인들의 가슴을 강하게 요동치게 만들기에 너무도 충분했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은 마침내 비판을 넘어 풍자와 조롱으로 변해가더니, 마침내‘아르센 루팡이 훔쳐 갔다’는 기사까지 등장하고 말았다. 지나친 민족주의에 빗대어 적국인 독일의 빌헬름 2세 황제가 벌인 일이라고도 했고, 한 미국의 대부호가 사주하여 지금 그림을 구입하려고 이탈리아를 방문중이라는 기사까지 올라왔다. 그 부호는 JP 모건이었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사건 해결에 막대한 현상금까지 내걸었고, 각 신문사들은 제공되는 정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내걸었다. 이후로 2년이 넘도록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제보가 신문사에 날아들었다.
옥타브 하마드 경감이 이끄는 특별 수사대(수레테 파리지앵)까지 투입했음에도 여전히 수수는 지지부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사가 한계에 도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수사를 하면 할수록 루브르 박물관의 보안과 관리에 심각한 취약점들이 산재해 있었음이 속속들이 드러났던 것이다.
전시실의 경비업무가 박물관이 일반인에게 오픈되는 영업 시간에만 실행되었다는 점이 가장 먼저 드러났다. 비영업시간에는 경비업무를 방치해 두고 개장과 폐장시간에 앞서 순찰을 도는 정도로만 그쳤다. 그나마 벌어진 순찰도 그냥 복도를 따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끝내고 경비실에서 잠을 자거나 모여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이런 수사의 이면까지도 전신과 전보를 타고 순식간에 전 세계로 연일 퍼져 나갔다. 전 세계 모든 조간신문의 1면 기사 발신지는 언제부터인가 오로지 파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멀고 먼 미국 땅의 <뉴욕 타임즈>에 이런 기사까지 올라 전 미국인들의 아침 인사말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온 세계가 넋을 잃고 주저앉았다. 세계 역사상 어떤 범행도 이번 〈모나리자〉 절도 같은 경우는 없었다. 범죄는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노련한 솜씨로 실행에 옮겨졌다. 도둑은 루브르의 운영 방침을 충분히 숙지했을 것이고 박물관의 설계는 물론 경비원들의 이동선까지 연구하여 주도면밀한 전략을 세웠다. 그들은 액자가 발견된 비상계단이 평소에는 접근 제한 구역이지만, 월요일만은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 월요일에 직원 수가 가장 적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내부자 소행일 것이라는 혐의가 짙어 보인다. 경비, 큐레이터, 청소부, 기술자, 사진사 등 관련자들에 대해 직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인원의 지문을 채취하고 심문을 진행했다고 하지만, 완전 범죄에 가까운 이 도난 사건을 보자면 내부자의 동조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도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수사 관계자들은 물론 박물관과 프랑스 정부까지도 그저 죽을 맛이었을 것은 너무도 뻔했다.
같은 시기에 파리 일간지 <르마탱>이 기사화해 올린 한 제보자의 글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초상화속의 조콘다 부인에게 쏠리던 연모의 마음이 어떤 강박 관념으로 변해 저지른 범죄가 아닐까 의심되는, 한 독일 청년이 <라 조콘다> 초상화를 자주 찾아오는것이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기사였다.
삽시간에 도난사건은 이제 로맨스 기사로 재구성되어 선 세계로 퍼져나갔다.
마침내 미국의 <시카고 트리뷴>은 ‘한 독일 젊은이가 사랑 때문에 그냥 미쳐버리고 말았다.’라면서 달콤한 사랑 때문에 이 모든 사건이 아주 치밀하게 사전 계산된 한편의 잘 짜여진 드라마로 재구성되었고, 독자들은 그림속의 조콘다 부인이 이 독일청년과 사랑에 빠져 함께 야반도주했다는 아주 즐거운 상상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수사당국으로서는 정말로 미치고 팔딱 뛸 일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상황이었다.
결국 특별 수사대(수레테 파리지앵)는 끝끝내 그 독일 청년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청년은 사건이 벌어지던 월요일에 파리에 있지 않았다는 알리바이가 나왔다. 그럼에도 수사대는 이 청년을 이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대신 죽어나는 것은 엉뚱하게 박물관 직원인 배관공 소브였다.
유일한 목격자라는 전제하에 소브는 오랜시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수사관들에게 집요한 조사를 받고 또 받았다. 그리고 지금 불려온 한 독일 청년을 수십 번도 더 살펴보았다. 처음 보는 청년이었다. 아무리 살펴보고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태어나서 처음보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거듭거듭 도난 사건이 일어난 아침의 기억속에서 저 독일 청년의 모습을 찾아내 끄집어내라고 강요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브는 그날 아침에 카레 살롱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에서 누군가를 만나긴 했었다. 그에게 문을 열어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저 그런 일상적인 일이었을 뿐, 수사대가 법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루브르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일제히 지급된 하얀 작업복 차림에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이도 이 청년은 아니었다.
이런 살벌한 즈음에 또 하나의 결정적 제보가 뒤를 이었다.
인근에 사는 한 남자 초등학생의 제보였다.
루브르 박물관 화단 앞에서 정비복을 입은 두 남자가 신문지로 그림을 싸고 있었다는 제보였다. 그림을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아저씨 두 명이 황급하게 그림을 신문에 싸서 품에 안고서 리볼리 거리 쪽으로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년의 제보 또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법인의 윤관이 처음으로 잡힌 것이다.
‘30줄의 작업복을 입은 남성 두 명이 <라 조콘다>를 훔쳤고, 신문지로 감싸들고 리볼리 거리 쪽으로 도망쳤다.’
다음날 전 세계의 모든 일간지 1면에는 파리발 긴급 특별뉴스로 ‘두 명의 남자가 루브르 벽면에서 <라 조콘다 초상화>를 떼어내는 삽화’가 대서특필로 장식되었다. 범인의 정체는 이제 30대 남성 두 명의 공범으로 압축되었다.
하지만, 이는 오보였다. 제보자인 소년은 실제 목격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학교가 가기 싫어서 다른 곳에서 딴짓을 하면서 보냈는데, 부모의 추궁이 무서워 이날의 행적을 감추려고 허위로 꾸며낸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퍼져나간 여파가 너무도 컸기 때문인지 신문사들은 오보 정정 기사를 따로 싣지 않았다. 범인은 그대로 남자 공범 2명으로 세상은 여전히 알고 있었다.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사건 발생 일주일이 지났고, 하마스 경감이 이끄는 특별 수사대(수레테 파리지앵) 60명까지 긴급 투입을 하고, 현대적 수사기법인 지문 감식과 머그샷까지 동원되었지만, 초등수사의 허점으로 인해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던것이다. 처음 지문 조회만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아마도 사흘 안에 모든 수사가 종결되었을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장기 공개수사로 전환된다고 발표했고, 국경 봉쇄가 풀렸으며 여전히 삼엄한 경계 속에 루브르 박물관은 재개관되었다.
재개관일 아침에 이미 루브르 광장은 인산인해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의 인파가 가득 몰려 장사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역사는 <모나리자 신드롬의 시작>으로 기억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피렌체의 성공한 상인 조콘다로부터 자기 아내의 초상화를 의뢰받아 포플러나무 패널에 유화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 전설은 시작되었다. 디빈치가 질곡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그림은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다시 피렌체에서 로마로, 마침내 알프스 너머의 프랑스로 옮겨 다닐 때마다 짐보따리에 실려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인생 말년에 프랑스에서 겨우 완성되었으니 거의 16년 만에 완성품이 된 것이다. 다빈치 사후에 제자 두 명의 손을 거쳐 다소 의문(?)의 과정을 거쳐 그림은 프랑스 왕가의 재산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침실에 걸리기까지 했으나, 세상에서 이 그림의 존재를 알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국고에 귀속되어 루브르 박물관에 걸렸으나, 여전히 큐레이터 몇 명을 빼고는 이 그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엔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라 조콘다> 도난 사건이 발생했다. 연일 온 세상의 조간신문 1면이 그림의 사진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이 세상에서 <라 조콘다> 그림을 실제로 본 사람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제 세상에서 신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치고 <라 조콘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그 그림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대 거장’ 중의 한 명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아니었던가? 오늘날처럼 ‘수수께끼 같은 모나리자의 은근한 미소’나 ‘눈썹이 없는 미완성 작품’이니 하는 것은 당시에 전혀 없었다.
오로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라 조콘다>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오로지 그 이유이자 시작이었고 전부였다.
중세 시대에 유럽의 상류사회에서 단테의 <신곡>을 줄줄 입에달고 다니니 않으면 그 사람은 결코 ‘유럽의 지식인’ 반열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유럽인들의 일상에서 다빈치의 <라 조콘다>를 입에 달지 않으면 그 사람은 결코 ‘지식인이나 진짜 신사’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조간신물을 통헤 <라 조콘다>에 관한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하루 종일 <라 조콘다>를 떠들어 대면서 살다가, 잠자리에 들면서 또 새로운 <라 조콘다>의 소식을 기대하면서 잠을 청했다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라 조콘다>는 이제 세상에서 명실상부 가장 유명한 그림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그림도 도난당한 마당에, 그림이 걸려있던 전시실이라도 보겠다고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루브르 박물관이 애초부터 장삿속으로 살짝 그림을 감춰놓고 훔쳐 갔다고 연출한 홍보전략이었다면,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돈벌이 재주가 또 어디 있겠는가? 누가 있어 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 예전에 있었던 한 광고가 불쑥 떠오른다. 어떤 수산물에 관한 광고였다.
‘너희들이 <라 조콘다>를 알아?’
거기에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면........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함부로 나대기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그냥 다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이 순간에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 회화 전시실’ 풍경을 떠올려 보라. A4 용지 6장 크기의 그림을 보겠다고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떠밀리면서 겨우 다가서니 정확히 3m 떨어진 저지선 앞이다. 거기다 그림은 방탄유리로 가려져 차단되어 있고, 사방에 켜진 조명 불빛들이 방탄유리에 번뜩인다. 그걸 보겠다고....... 인증샷 하나 건지겠다고 아우성들이다.
‘너희들이 <모나리자>를 알아?’
'그걸 미술품 감상이라고 할 수 있겠니?'


세계 미술계는 <라 조콘다>를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라고 비공식 인정하고 있다. 떠도는 소문에 대해 묵인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가히 가격을 가늠해 볼 수조차 없는 지상 최고의 미술품이라고 하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더이상 이의제기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제각각의 속내는 여전히 죄 다를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여기서 잘못 말하게 되면 문화 미개인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 느닷없이 나타나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던 그림이 그렇게 비싼 그림이 되었을까?
필자의 생각에 그 이유는 ‘1911년 파리에서 신문사끼리 벌인 무책임한 발행 부수 늘리기 전쟁의 후유증’이라고 결론 내렸다.
우리나라 방송에서 오랜 이력을 가진 프로그램 중에 <<TV쇼 진품명품>>이라는 제목의 방송이 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품과 문화재를 가지고 나와 진품인지 가짜인지 검증을 받아보고 나서, 전문가의 평가를 통해 요즘 시세로 치면 얼마 정도 하는지를 알아보는 흥미로운 오락 프로그램 이라고 하겠다.
먼저 이번에 대상이 되는 실물 상품이 등장하고,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가진 출연자들이 요리조리 살펴보고 질문을 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각자의 평가를 기준으로 예상 가격을 적어서 제시한다. 그럼 전문 평가사가 나서서 작품의 소개와 관리 상태와 희귀성 등의 객관적 자료와 설명을 토대로 예상 가능한 현재의 시세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아주 가끔 예상을 뛰어넘어 억대의 금액을 판정 받거나, 당장 국보로 보존될 가치를 지녔다는 평가로 세간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실제로 <대동여지도 채색본>이 출품된 2015년 방송과 <청자 음각 연화문 매병>이 출품된 2013년의 방송에선 감정평가액으로 25억 원이라는 놀라운 평가 금액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 프로그램은 어디까지나 현장에서 직접 대상 작품을 살펴보고, 출처와 근원과 관리 상태와 비슷한 다른 드러나 있는 상품들과의 비교 분석 결과에서 감정평가액이 산정되는, 어느 정도 합리적인 제도와 절차를 준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1911년 느닷없이 미술품 하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드러난 것은 그 미술품이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라는 것이 전부였다. 본 사람이 없으니 불쑥 눈앞에 들이민다 하여도 그 그림이 다빈치의 초상화인지 알 리가 만무했다. 그 그림에 대하여 추가된 설명은 진짜 그림의 제목이 <라 조콘다(La Gioconda)>이며, 포플라나무 판자에 그려진 크기가 53cm x 77cm 정도 되는 작은 유화 그림이며,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을 당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본적도 없는 그림 하나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는 내용뿐이었다. 그런 상화에서 그게 얼마짜리인지 감히 누가 알수 있겠는가?
전혀 세상의 이목을 끌만한 내용이 전혀 없는 애초부터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그림이었다. 그것이 느닷없이 발굴을 통해 세상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라, 어느날 누군가에 의해서 이유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그 그림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그랬다.
요점은 그림을 잃어버린 장소가 바로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유럽의(세계의) 최강대국은 여러나라가 있었지만, 최고의 자리를 놓고 3국이 극심하게 대립과 마찰을 벌이고 있었는데 바로 영국. 프랑스. 독일이었다. 그다음 레벨로 러시아와 헝가리 오스트리아 왕국과 이탈리아와 오스만 터키가 호시탐탐 세력 판도의 변화를 노리고 있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식민지 영토확장 전쟁이 한계에 다다르자, 이젠 약탈 문화재를 바탕으로 하는 문화와 예술 분야의 초일류 문화 강대국을 놓고 새로운 전쟁을 불사하고 있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3개의 박물관이 저마다 국가의 명예와 위상을 걸고 대립하게 되었다.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 영국)과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 프랑스)과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museum, 독일)이 살벌한 경쟁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20세기의 시작 지점에서 보자면 분명 한수 위인 프랑스의 승리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내용 또한 사뭇 길어서 차차 조금씩 살펴보기로 하겠지만, 누가 뭐라 해도 당장 세계 문화와 예술의 중심은 프랑스 파리가 분명했고, 그 이유로는 루브르가 파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점만은 그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딴지를 걸 수가 없는 하나의 진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루브르에서 미술품 도난이 벌어졌다. 거기다가 실제로 그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었다. 최신 시설과 완벽한 경비 시스템을 갖춘 루브르에서 도난되었고, 프랑스 경찰은 72시간 안에 사건 해결을 호언장담했음에도 일주일이 지나고도 전혀 실마리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수레테 파리지앵(특별 수사대)까지 파견하고 국경을 봉쇄까지 했음에도 드러난 것은 부서져 떨어진 문손잡이와 유리 파편 몇 개가 전부였다.
‘그래놓고 프랑스가 무슨 문화강국이란 말인가? 찾아야 하는 그림을 제대로 알아보기는 하는 사람들이 지금 쫓아다니고 있는 것인가?’
영국과 독일의 언론이 앞장서서 연일 프랑스의 자존심을 무차별 공격해서 박살내기 시작했다.
사라진 그림을 조사하다 보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두 명의 제자에 관한 행적 조사에서 석연치 않은 이탈리아 연루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게 어떻게 프랑스 재산이야? 조콘다가 주문한 그림이니까 이탈리아 재산이어야 하는 것 아니야?’ 하는 의문 제기가 이루어 지면서 이젠 프랑스 내부의 사건 사고가 아니라 영국과 독일과 이탈리아가 가세한 국제전으로 점점 비화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국가 위상이 심하게 훼손되었고,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되고 말았다.
파리에서 발행되는 <릴뤼스트라시옹> 주간지에서 처음으로 <라 조콘다>에 대해 결정적 제보를 하는 사람에게 포상금으로 1만 프랑(4만 달러)를 내걸었다. 만약 누구라도 그림을 루브르에 돌려주기 이전에 신문사를 통해 돌려주게 된다면 추가하여 4만 프랑(16만 달러)을 포상금으로 내걸었다. 하루에 5백 통이 넘는 편지 제보가 쏟아져 들어왔고, 제보자들의 행렬이 편집국으로 길게 이어졌다. 당연하게 이 과정을 세세하게 소개하는 신문의 발행부수가 급격하게 늘기 시작했다.
허니 다른 신문사들 처지는 어떻겠는가?
발행부수가 왜 늘어나는지를 알게 된 파리의 신문사들이 앞다투어 현상금을 내걸기 시작했다. 여기에 후발 주자가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전임자 보다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야만 했다.
결국엔 프랑스 정부까지도 나서서 2만 5천 프랑(10만 달러)의 포상금을 내걸기에 이르고 말았다.
그림을 본 사람도 없고. 나타난다 해도 당장 그림을 알아 볼 사람도 없음이면서, 온통 파리는 지금 알지도 본적조차 없는 그림 찾기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어떻게든 서둘러 사태를 해결해야만 그나마 깊은 상처를 입은 프랑스의 자존심에 약간의 치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그럴수록 영국과 독일과 이탈리아의 민족주의를 뿌리로 하는 비아냥과 흠집내기는 벌써 도를 넘어도 한참 넘고 있었다.
그럼 이 대목에서 애초 <릴뤼스트라시옹> 주간지에서 내건 현상금의 최고액이 4만 프랑(16만 달러) 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다시 상기시켜 보기로 하자. 이것을 지금의 완률로 바꿔보면 대충 2억 삼천만원 정도가 나온다.
자. 이제부터 현금 2억 삼천만원을 들고 110년 전의 파리로 되돌아 가 보기로 하자. 그 돈으로 파리에서 뭘 살까? 얼마나 살까?
당시에 2억 삼찬만원어치 프랑스 국가발행 국채나 금괴를 사두었다면........ 지금 얼마가 되었을까?
대충 잡아 당시 맥시멈으로 <라 조콘다>가 2억 삼천만원 정도였다고 치자. 110년이 지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이란다. 거기다가 거대한 서사(?)까지 더해졌으니, 그런 스토리 값만도 엄청나지 않겠는가? 그냥 상상의 차원이라 해두기로 하자.
저렇게 비싼 돈 쏟아붇고 비행기로 프랑스 파리까지 가서 제대로 그림 구경도 못 했으면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비싼 그림 타령을 일삼고 있으니’ 도대체 저들을 어쩔꼬?
‘니들이 <라 조콘다>를 알아?’
그래서 나는 <모나리자>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비싼 그림이라는 데 대하여 그저 쓴 웃음으로 대신 대답을 하곤 한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림, 세상에서 가장 비싸야 할 그림, 가장 귀한 그림은 결코 <모나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는 내가 생각하는 ‘베스트 10’에도 들지 못한다.
내 주관적 판단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가장 훌륭한 대표작은 당연히 <최후의 만찬>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니들이 <최후의 만찬>을 알아?’
나는 <최후에 만찬>에 대해서도 <모나리자>만큼 할 이야기가 많이 있다. 언제도 또 기회가 생긴다면 말이다.

루브르 박물관이 재개관하여 수많은 인파가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그 빈자리라도 보겠다고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는 그 희귀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던 파리의 아침 출근 시간에 경시청장 루이 레핀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경시청을 드나들면서 경찰의 동향을 살피거나 화제가 되는 사건의 취재를 담당해온 <파리-주르날>에 소속된 신문기자였다. 고향과 출신 학교가 같은 이유로 레핀 경시청장과 가깝게 지내면서 이따금 특종에 가까운 기사를 여러 번 얻어낸 적이 있는 연륜이 있는 기자였다.
이번 사건의 초기에 레핀 경시청장이 조속한 사건해결을 호언장담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휘하의 하마드 경감이 이끄는 수레테 파리지앵(특별 수사대)의 투입으로 볼썽사나운 상황을 자초한 꼴이 되어 여간 난처한 지경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레핀 경시청장이 테오필 박물관장처럼 즉석에서 파면되었다면 모를까, 여전히 경시청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이번 사태가 원만하게 수습되고 나면 여전히 파리를 쥐락펴락하는 파리 경시청의 최고위 인물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경시청을 계속 출입해야만 하는 자신에게도 크게 유리한 경우가 자주 생길것을 여전히 기대하고 있기에 어떻게든 이번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도록 도우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거 아우가 일찍부터 어쩐 일이신가? 들어와. 커피나 한 잔 같이 하자고.’
레핀 경시청장은 기꺼이 후배 기자의 낯선 방문을 환영해 주었다. 그로서도 언론기관의 동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가 나왔고 서로 안부를 물으며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갔다.
‘청장님. 혹시 파리 경시청의 범죄자 명부에 이냐스 도르므상 남작이라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도르므상 남작? 처음 듣는 이름인데 왜? 자네가 무슨 좋지않은 일에 연루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이렇게 불쑥 찾아뵈었습니다. 확인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 어디 이름을 정확하게 적어서 주게. 이름만 정확하다면,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레핀 청장은 부관을 불러서 메모를 건네주면서 그 이름의 남작에 대해서 자료가 있는 만큼 찾아서 모두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이제 이야기해 보게. 그 남작이라는 자가 뭐하는 자인지 말이네.’
‘오후 2시에 맞춰 저와는 일절 나눈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하시고, 지나다가 그냥 들려 본 것처럼 하시고, 저희 신문사 편집실에 슬쩍 들려 보실 수 있겠습니까?’
‘자네 신문사 편집실을 불쑥 찾아가 보라고? 왜? 2시가 아니라 아무 때라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가 볼 수 있겠지만, 꼭 오늘이라면 왜? 자네도 모르는 것처럼이라니 도대체 왜?’
‘알송달송한 의문의 제보가 어제 도착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느낌이 다른때와 영 다르게 느껴져서입니다. 어떤 직업적 감이랄까?’
‘그 제보자가 남작이라는 사람인가? 내용이 루브르 도난 사건과 연계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루브르 도난 사건인 것은 맞아 보이는데, <라 조콘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냐스 도르므스상 이라는 남작의 이름이 자꾸만 걸리는게........ 단독 범행이 아니라 혹시 어떤 범죄 단체가 연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입니다.’
‘그래? 자네의 느낌이 그렇다면 예사로 넘길일은 아닌 것 같고........ 어디 좀 더 소상하게 이야기를 해 보게.’
‘어제 편집실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루브르에서 훔친 조각상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발신인이 바로 이냐스 도르므스상 남작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초상화가 아니라 조각상이라고?’
‘그렇습니다. 분명 조각상이라고 했습니다. 초상화에 현상금이 걸린 것을 보았는데, 이 훔친 조각상을 <파리-주르날>을 통해 반납하고자 한다면 약간이라도 보상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보상을 원한다? 그래 얼마를 원하던가?’
‘250프랑(천 달러, 한화로 백 오십만원 정도) 정도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250프랑이면 초상화에 내걸린 현상금에 비해서 너무나 형편없는 금액이 아닌가? 누군가의 장난이 아니겠는가?’
‘250 프랑이라는 금액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다음의 진행을 살피게 되면 생각이 달라지실 것입니다. 제보자는 신문사가 이 거래에 응할 의향이 있으면 편집실 창문에 화분 두 개를 내어놓으라 했습니다. 이는 신문사 편집실의 위치를 알고 있을뿐더러, 거래가 성사되지 않을 경우에도 자신의 신분이나 정체가 일절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덧붙여서 거래가 성사되면 루브르의 큐레이터 중에서 비밀 보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데리고 와서 진품인지를 즉석에서 검사하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그런 전제가 모두 받아들여진다면 오늘 오후에 훔친 조각상을 가지고 직접 편집실로 와서 거래에 임하겠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밝힌 이름이 도르므상 남작입니다. 그만큼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는 뜻이겠지요. 이는 결코 일개의 절도범이 꾸밀 수 있는 단순 범죄가 아니라고 판단되었습니다.’
‘단순한 범인이 아니라면 그에 합당한 상당한 금액을 전제로 흥정을 해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끼 거래라면 다르지 않겠습니까? 만약 전문적인 사람들이 모인 국제 미술품 범죄단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로 용의주도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사소한 작은 범죄를 미끼로 누군가를 대신 내세워서 박물관이나 경찰 측의 대응 반응을 살펴보고, 예상한 대로 무난하다 싶으면 그제서 다른 핵심 범죄를 꺼내놓고 실질적인 거래 흥정을 해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라 조콘다> 도난 사건의 주범이라면, 이번에 슬쩍 조각상 도난 사건을 미끼로 내놓고 <파리 – 주르날>을 사이에 끼워 넣은 뒤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안전선상에서 실질적인 거래를 전망하면서 거래의 흥정을 부풀리려는 노림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불쑥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경시 청장 부관이 들어와 ‘범죄 사건에 연관된 이냐스 도르무상 남작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순한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만 한 직원의 조언에 의하면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듯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 이름이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여간 파리 경시청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범죄와 연관된 이냐스 도르무상 남작이라는 이름은 없다는 결론이었다.
레핀 청장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하필 이런 시점에 도대체 이건 뭐지?’ 레핀의 뇌리에도 뭔가 석연치 않은 촉이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오후 2시 5분에 레핀 청장은 <파리- 주르날> 신문사의 정문을 그대로 통과해 다짜고짜 편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신문사의 정문과 후문으로는 이미 사복 차림의 형사가 열 명이나 배치된 상태였다.
신문사의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청장과 친한 후배 기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편집실 회의장 문을 벌컥 열었을 때, 회의 사무실 안엔 미술부장 앙드레 살몽이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는 큐레이터랑 책상 위엔 놓인 조각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이거 본의 아니게 실례를 했습니다. 살몽부장. 어째 내 동생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모처럼 근처에 왔다가 커피라도 얻어 마시려고 들렸더니....... 근데 이 양반을 어디서 봤더라? 가만....... 박물관에서 본 큐레이터가 아니십니까? 아니? 루브르 박물관 큐레이터께서 이 시간에 신문사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도난 사건에 관한 무슨 용무라도 생긴 것인가요? 그랬다면 경시청을 먼저 찾아오셨어야지요. 그런데 이건 또 뭡니까? 조각상 아닙니까? 딱 보아도 아주 오래된 물건 같아 보이는데? 혹시 지금 무슨 거래라도 하시는 것입니까?’
‘거래라니요? 의뢰를 맡아 잠시 감정을 하고 있는것 뿐입니다.’ 서둘러 답변을 늘어놓고 있는 살몽 미술부장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당한 감정이라면 당연히 박물관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합법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물관 직원이 신문사까지 와서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하다니요? 제 오랜 직업적인 경험으로 보아서 이건 예사로워 보이는 정경이 결코 아닙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큐레이터님에게 잠시 제가 경시청으로 동행을 요청해야만 할까요? 놓여 있는 조각상과 미술부장님에 대한 조치는 같은 동료인 제 동생의 입장을 생각해서 시간을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차후에 절차에 따른 공식적인 연락을 드리면 그때 경시청으로 좀 와주셨으면 합니다. 저 조각상도 그때 함께 가지고 오도록 하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굳이 들리지 말았을 것을, 괜히 커피 생각이 나는 바람에........’
레핀 청장이 큐레이터에게 동행을 요청하고 몸을 움직여 사무실을 나서려 하자 당황한 살몽 미술부장이 허겁지겁 문을 가로막으며 사정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모든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레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이제까지의 모든 정황은 손바닦을 들여다 보듯이 샅샅이 알고 난 이후였다. 다만 의당 함께 있어야 할 이냐스 도르므상 남작으로 추정되는 조각상을 실제로 훔쳤다는 그 가상의 인물이 지금 이곳에 함께 있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나오기 힘든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느낀 앙드레 살몽은 이번 사태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사실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레핀 청장에게 고백하듯 늘어 놓았다.
하지만 정작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좀 전까지 이곳에 그 이냐스 도르므상 남작이 정말로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도르므상 남작은 혹시나 이런 사태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약속된 2시를 앞당겨 15분 전에 불쑥 편집실에 조각상을 들고 들이닥쳤던 것이다. 큐레이터로 하여금 감정케 하였고, 그것이 루브르에서 도난당한 조각상이 맞다는 결론과 함께 돈을 수령할 사람을 따로 보내겠노라고 하면서 바람처럼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레핀 청장은 구체적인 도르므상 남작에 관한 신원이나 정보를 요구했다.
하지만 사전 분명한 합의가 먼저 있었다고 내세우며 취재원의 보호 차원에서 더 이상의 협조는 어렵다고 거듭거듭 직업 윤리를 앞세워 앙드레 살몽 부장은 더 이상의 진술을 거부하며 버텼다. 레핀은 구속 수사를 들어 압박을 가했고, 살몽은 언론을 통해 강압 수사를 폭로하겠다며 저항하자, 이번엔 큐레이터의 부정한 직업윤리를 물고 늘어지기로 작전을 세우고 일단 한 발 물러서기로 하고 혼자 밖으로 나왔다.
레핀 청장은 지명도가 한참이나 떨어지는 작은 신문사를 슬그머니 끌어들여 ‘한 유명 신문사와 루브르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합심하여 도난 미술품을 거래한 사건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돌입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아울러 ‘그 사건의 배후를 파헤쳐서 곧 <라 조콘다> 사건 수사에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다.’라고 아주 작고 짧막한 기사를 덧붙였다.
그 파장은 즉시 사방으로 예측할 수 없는 지경으로 퍼져나갔고, <파리-주르날>의 앙드레 살몽 미술 부장은 완전 백기를 들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항복한 살몽 부장의 입에서도 별로 더 털어서 새롭게 나올 새로운 정보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사는 이번 일을 계기로 다양하게 다각도로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터져 나오기를, 범인이 앞세웠던 이냐스 도르므상 남작이라는 이름이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인 공쿠르상 후보에 오른 기욤 아폴리네르의 단편<이교 창시자 회사>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이라는 것까지 밝혀졌다.
다음날 레핀 청장은 결국 파리에서 손꼽히는 저명인사이자 프랑스 지성을 대표한다는 말솜씨가 청산유수로 널리 알려진 기욤 아폴리네르를 이번 범죄에 등장하는 도르므상 남작의 창조자 신분으로 마주하고 앉았다. <파리 해폴드> 신문은 레핀 경시청장이 아폴리네르를 소환했다는 기사와 함께 <라 조콘다>에 대한 모종의 단서를 레핀이 얻었을 수도 있다고 보도하면서, 어쩌면 사건의 해결이 임박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넌지시 흘렸다.
미술사는 1905년에서 1911년 까지의 7년을 ‘현대 미술의 창세기’라고 기록했다. 거기에 파블로 피카소는 수호신이며 기욤 아폴리네르는 최고의 흥행사로 등장했다. 어떤 논쟁도 피해 가는 경우가 없었고, 자신의 주장을 결코 삭혀두는 법 대신 언제고 서슬 시퍼런 일갈을 날리던 언변의 마술사가 <라 조콘다> 도난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의 취조를 받았다는 기사가 일제히 일제히 모든 조간 신문의 1면을 도배해 버렸다.
평소 루브르를 혐오한다고 공개적으로 이미 여러 번 밝혀왔던 아폴리네르였기에 갑자기 수사 선상에 새롭게 떠오른 그에 대해서 레핀이 남다른 짙은 시선으로 의심을 하는 것은, 어쩜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루브르 컬렉션에서 죽어있다가 되살아 난 듯, 극한 화제의 중심에 느닷없이 우뚝 솟은〈라 조콘다〉는 사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는 새로운 사고와 신진 화가들을 질식시키는 원흉이라고 치부해도 좋을만큼, 형식의 틀에 얽매인 진부한 박물관 미술의 상징이었다. 〈라 조콘다>야말로 그들이 거부하는 죽은 과거가 낳아놓은 걸작의 원조였기에 당면한 가장 명확한 공격 목표였다.
아폴리네르와 피카소는 새로운 시대적 예술의 방향을 놓고 파리에서 구시대와 벌어지던 격렬한 투쟁의 전위부대였다. 일명 ‘피카소 패밀리’로 불리는 그들은 르네상스를 파괴하고 학살하여 고리타분한 전통 예술의 형식 중심 역사로부터 진심으로 예술을 완전하게 해방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레핀은 피카소 패밀리야말로 어쩌면 루브르에서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국제 미술품절도단과 모종의 연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여 지금 자신이 <라 조콘다> 도난 사건의 해결에 점차 접근해 가고 있다고 자신했다. 어쩌면 카레 살롱에서 초상화를 훔쳐낸 도르므상 남작이 바로 아폴리네르가 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은밀하게 아폴리네르와 피카소의 주변으로 점차 집요하게 수사망을 조여가기 시작했다. 잘만하면 이번 사건 초기의 실수를 만회하고, 수레테 파리지앵의 실질적 책임지휘관이 자신이라는 것을 세상에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시 2주의 시간이 지난 즈음에 결국, 낭만적 시대의 반항아 집단으로 파리의 낭만주의자들과 온 유럽의 젊은 지성들을 선두에서 이끌다시피 하고 있던 ‘피카소 패밀리’들이 <라 조콘다> 도난 사건과 연루된 외국인 국제 미술품절도단과 은밀하게 연결되는 거래가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기사까지 등장하게되면서 파리와 유럽을 온통 커다란 충격에 빠트리고 말았다.
바로 그 시간에 피카소 패밀리들은 피레네 산맥의 깊숙한 프랑스와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세렛이라는 마을에서 회합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 밖에서 <라 조콘다> 도난 사건으로 떠들썩한 세상을 맘껏 비웃으며 자신들 방식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워낙 외떨어진 산악지역이라 파리에서 발간된 신문이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서 겨우 도착하는 정도의 절대 오지였다.
밤새 벌였던 광란에 가까운 파티의 후유증으로 정오를 지나고서야 겨우 모닝커피를 마시면서 사흘 전에 발행된 파리의 조간신문을 손에 들고 살피기 시작한 피카소는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라 조콘다> 실종 사건 기사의 서두에 아폴리네르와 자신의 이름이 분명하게 거론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흘간 이들 패거리로 인해 온통 낭만에 젖어들었던 산골 오지 세렛은 순간적으로 온통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피카소는 축제의 뒤처리를 조각가 브라크에게 위임하고 곧장 파리로 출발했다. 동행하고 있는 시인 아폴리네르는 <라 조콘다> 도난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고 있는 이냐스 도르므상 남작을 창조해 낸 인물이 그 자신이었기 때문에, 결국 지금 모든 의심의 눈초리가 자신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들이 오르세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경찰이 아폴리네르의 아파트를 영장을 받아 수색하고 난 다음이었으며, 곧 피카소의 아파트에도 들이닥칠것 이라는 소식을 지인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허겁지겁 피카소는 자신의 화실에서 몇 블록 떨어진 클리시 대로의 중산층 아파트로 이사를 감행했다.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로서는 이번 이사의 과정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인데, 이를 의심하는 경찰의 집요한 감시망으로 인해서 결국 문제 해결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새로 이사한 집의 붙박이장 깊숙한 곳엔 여전히 두 개의 조각상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조각상의 바닥에는 루브르 박물관의 직인이 여전히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프랑스 경시청의 수사관들이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그야말로 탈탈 털 듯이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달리 어쩔수가 없었다.
이곳은 엄연히 프랑스 법률이 지배하는 파리였고, 그들 두 사람은 현재 모두가 낯선 이방인이었다. 모든 것이 불리했다. 국외 추방은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피카소는 스페인을 도망쳐 나온 난민 체류자 신분이었고, 아폴리네르는 로마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모로코와 니스를 떠돌며 성장한 어디까지나 이때까진 무국적자 신세였던 때문이다. 설사 국외 추방을 당한다 해도 이들은 당장 쫓겨갈 나라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끝내 아폴리네르는 체포되어 구속 수감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에서 세기의 러브 스토리 주인공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이 드디어 등장한다. 아울러 거기에 멈추지 않고 파블로 피카소의 영원한 첫 뮤즈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까지 마침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 너무 길어져서 다음 회차로 나누어 계재해 올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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